습도 95% 짝사랑
후보(@omg_rukawa)
오전 11시. 투명한 햇빛이 흔들리는 반투명한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일정한 규칙으로 흔들리던 빛은 조금씩 움직이더니 베개에 묻은 얼굴을 쓸어보았다. 햇빛은 깊게 잠든 속눈썹을 쓸었고, 빛이 쓸어주는 기다란 속눈썹은 느릿하게 깜빡- 깜빡하며 움직였다. 따가운 빛에 움찔거리는 눈꺼풀. 그리고 얼마 안 가, 뜬 눈에는 속눈썹의 그림자가 커튼처럼 그늘져 있었다.
잠에서 덜 깬 서태웅은 짜증 섞인 소리를 짧게 내며 왼팔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익숙한 듯 오른손을 머리 위로 뻗었지만, 손에 잡혀야 할 커튼이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의 헛손질 후 이상함을 느낀 그는 왼팔을 들어 햇빛이 들어오는 창을 쳐다봤다.
익숙하지 않은 색의 커튼과 처음 보는 모양의 전등, 자기 방에서 못 봤던 벽지 색. 놀란 듯 급하게 상체만 살짝 들어 눈을 크게 떠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서태웅은 따끔거리는 눈을 서너 번 감았다 뜨고 나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7번이 적힌 흰색 파란색 유니폼과 그 옆에 걸려있는 익숙한 훈련 재킷. 유니폼에 적혀 있는 ‘능남’…. 저건 윤대협 유니폼, 그 옆은… 어제 입었던 내 옷.
그제서야 어제 있었던 일들이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떠올랐다. 하아- 하는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히던 서태웅은 침대에 걸터앉아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어있는 에어컨은 언제부터 켜져 있었는지 적당한 냉기를 내보내고 있었고, 그것도 부족하게 느꼈던 건지 선풍기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다.
“…. 건조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리모컨을 본 서태웅은 전원 버튼을 눌러 에어컨을 껐다.
‘어디로 갔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넘긴 서태웅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에어컨을 끈 지 10분도 안 됐는데도 이렇게 더울 일인가? 게다가 윤대협은 어디로 간 건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맺히고 있었다. 서태웅은 눈을 감고 선풍기 바람으로 땀을 날려 보냈다. 눈을 감으니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 더 잘 들어왔다.
창밖에서 들리는 주민들의 이야기. 조용한 이야기 그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집과 해변은 거리가 꽤 되는데도. 더불어 작게 울리는 웃음소리와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자전거의 경적, 더 가까이,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는 선풍기 소음,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 모든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들려왔지만 무언가 빠진 느낌이었다.
주인 없는 집에 이렇게 있어도 되나? 작은 방 안에는 집주인의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손님을 집에 두고 나간 집주인을 생각하니 서태웅은 순간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제 벽에 기대져 있었던 낚싯대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야 허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낚시라도 간 건가. 그는 침대 위로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크게 한숨을 쉬는 코끝에 달짝지근한 레몬 냄새가 스쳐 갔다.
윤대협과 약속한 장소까지 가는데 30분.
하늘 끝에선 회색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물속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높은 습도까지. 하지만 서태웅은 농구공과 농구화가 든 운동 가방을 들고 전철에 올라탔다.
항상 만나던 야외 코트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고, 서태웅은 예상한 듯 가까운 나무 아래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쏟아지는 비의 시작점을 바라본 그는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라 생각해 윤대협을 기다리기로 했다. 예상외로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약속이니 안 올 리는 없겠지. 바람에 몰아친 비가 나무 아래까지 거세게 들이닥쳤다.
“…. 안 오잖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더 억세게 올 뿐이고, 듣고 있던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A사이드에서 B사이드로 넘어가는 소리가 철컥- 하고 작게 울렸다.
40분 동안 뛰어다녀도 쉽게 지치지 않던 다리가 오늘따라 무거운 이유가 뭔지. 주저앉아 있었던 서태웅의 바짓단은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비바람에 젖은 머리카락은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마치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보이도록 만들었고.
대체 왜 안 오는 거지? 약속을 잊었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능남고 앞까지 가볼까 생각하던 서태웅은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쳐다보기만 했다.
B사이드의 음악이 반 정도 지나갈 때가 되어서야 서태웅은 일어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은 젖은 옷을 흔들어 대면서 그의 몸도 같이 떨리게 하는 것 같았다.
‘대체 윤대협이 뭐라고.’
괜히 왔다 싶은 서태웅은 잠시 줄어든 비 사이로 들어가 역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윤대협은 전철역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서태웅은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윤대협을 쫓아가 콱 소리가 날 정도로 어깨를 잡아 돌렸다.
“으악! 어? 서태웅?!”
갑작스러운 당김에 비틀대던 윤대협이 균형을 잡자, 날 선 서태웅의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냐’ 고 말하는 눈은 윤대협을 당황스럽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의 서늘한 분위기에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잔뜩 노려보는 그의 몰골에 놀란 윤대협은 이 날씨에 있어야 할 물건이 서태웅 손에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너 먼저 가라.”
윤대협은 같이 우산을 쓰고 있던 사람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우산을 넘겼다.
“어? 우산은? 이거 네 거잖아.”
“괜찮아. 나중에 줘.”
의아해하면서도 우산을 받아 든 윤대협의 친구는(서태웅은 둘이 같은 교복을 입었으니 같은 반 친구 일 거라 생각했다) 내일 보자고 가볍게 인사한 후 역 안으로 들어갔다. 윤대협은 친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참고 있던 깊은 한숨을 허공을 향해 뱉었다.
“왜 왔어.”
“원온 원, 하기로 했잖아.”
너무나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서태웅의 대답에 윤대협은 그게 아니라는 의미로 말을 바꾸었다.
“비 오는데 뭐 하러 왔냐는 거잖아.”
“나 나왔을 때는 안 왔어.”
아차.
그래. 서태웅이 여기까지 올 때는 안 왔을 수 있지. 여름 날씨는 알 수 없으니까. 윤대협은 목덜미를 쓸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 그 생각까진 못 했어.”
정말로? 둘러대는 듯한 윤대협의 말에 서태웅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당장이라도 농구공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것 같은 시퍼런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윤대협은 애써 서태웅의 시선을 피해 봤지만, 눈빛과 다르게 잔뜩 젖어 내려앉은 머리와 축축해진 재킷, 심지어 그가 들고 있는 가방조차 물먹은 듯 무거워 보여서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너 다 젖었어.”
“됐어. 집 가다 보면 말라.”
표정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 서태웅이었지만, 제 딴에는 불평의 표현인 것처럼 툴툴대며 대답했다. 게다가 대답하며 윤대협의 왼쪽 어깨를 비켜 지나갔고. 화났다 이거지? 나름 투정이랍시고 표현하는 그의 손목을 윤대협이 낚아채듯 잡았다. 잡자마자 손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한기에 윤대협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 지금…. 얼마나 기다린 거야?”
“신경 꺼.”
“몸 차갑잖아. 이대로 가면 감기 걸려.”
“됐어. 알아서 해, 내가.”
그만 좀 고집부렸으면 좋겠는걸. 자기 때문에 감기 걸렸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 것인지 됐다고 바둥대는 서태웅의 손목을 윤대협은 으스러질 듯 꽉 잡고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윤대협의 집, 그의 자취방은 역에서 멀지 않았다.
하지만 둘이서 걸어가는 도중 멈춰 있던 비가 다시 우수수 쏟아지는 게, 마치 빨리 가라는 듯 재촉하는 것 같아 얼떨결에 함께 뛰어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서태웅이야 윤대협과 만나기 전에 이미 홀딱 젖어 있어서 상관없었지만, 윤대협은 힘겹게 바짝 올린 머리가 축 처질 정도로 젖어버렸다. 원온 원 3시간 할 때도 무너지지 않은 머리였는데. 새삼 새로운 모습으로 윤대협을 마주 보게 되니 서태웅은 양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손가락으로 떼어보았다.
윤대협의 자취방은 특별하진 않았다. 일반적인 원룸 느낌의 방. 날씨 때문에 해가 떠야 하는 시간에도 어둑어둑한 방안은 물건들이 희미한 빛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먼저 들어간 윤대협이 불을 켜자 문과 마주한 창문으로 바람과 비가 들어와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창문 열고 갔네, 이런.”
신고 있던 신발을 휙- 하고 현관 구석에 대충 벗어 던진 그는 젖은 머리를 툭툭 대충 털어대며 들어갔다. 젖은 머리는 앞머리를 만들어 눈썹을 살짝 가렸는데, 그는 그게 불편했는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성큼성큼 짧은 거리를 걸어가 창문을 닫을 때까지, 서태웅은 현관에서 허리를 숙인 채 신발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젖어서 그런 건지 신발이 잘 안 벗겨지자, 창문을 닫고 온 윤대협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 꽉 묶인 신발 끈을 풀어주었다.
“일단 씻어. 다 젖었네.”
신발 끈을 풀어주며 건네주는 하얀색 수건. 서태웅은 수건을 받아 든 채 서서 윤대협을 바라봤다.
“왜?”
서태웅은 젖은 자기 몸을 고개를 숙여 바라봤다.
“아.”
말이 없어도 무슨 뜻인지 알아챈 윤대협은 자연스럽게 옷장에서 티셔츠와 바지, 그리고 속옷까지 서태웅에게 내주었다. 음, 속옷은 좀 그런가? 바지만 입을래? 하며 물어보는 윤대협을 서태웅은 쳐다만 보고 있었고. 윤대협은 대답 없이 쳐다보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하하, 알았어. 하고는 서태웅의 등을 밀어 욕실로 넣었다. 뭘 알았는지는 말하지 않았고, 서태웅도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철컥하고 닫힌 뒤에 한참이 지나서야 물소리가 났다. 문 앞에 서 있던 윤대협은 물소리가 나니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젖은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욕실 문 쪽을 한참 보고는 벽에 쿵-하고 등을 기대고는 흘러내리듯 주저앉았다.
막 씻고 나온 서태웅이 본건 침대 아래에 앉아 매트리스에 고개를 젖히고 있는 윤대협이었다.
“아, 나왔어?”
고개만 살짝 돌려 서태웅을 바라본 그는 막 씻고 나온 티를 내는 서태웅을 바라봤다. 반질반질한 피부에 촉촉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는 모습이, 마치 자기 집에서 하는 것처럼 익숙하게 행동해서 윤대협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왜 웃어?”
“아냐, 아니야. 옷은 안 불편해?”
“응.”
서태웅의 얼굴은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상기 되어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했던 탓 일 거라, 하지만 빨개진 귀 끝은 머리를 털어내며 넘기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그의 손이 바빠졌다.
“어?”
아직 물기가 남은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수건에 서태웅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윤대협이 자신이 쓴 젖은 수건을 들고 옆을 지나치는 것을 쳐다보았다.
“야, 그거….”
“알아, 알아. 마른 수건 하나밖에 없었거든.”
또 뭘 알았다는 거냐? 대꾸라도 하려고 서태웅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욕실 문은 닫혀 있었다. 곧바로 나는 물소리에 서태웅은 작게 한숨을 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앉을만한 곳은 바닥 아니면 침대였다. 서태웅은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쳐 보았다.
끼익하며 내려앉은 매트리스는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푹신하지도 않은, 적당한 탄성을 가지고 있었다. 손으로 침대 시트를 툭툭, 그리고 시선을 요리조리. 그는 처음 본 것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어린아이처럼 윤대협의 방을 구경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닫힌 창밖 건물 사이로 보였다. 빗소리와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섞여 방안을 채웠고, 그 배경음을 따라 벽에 걸린 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작게 들렸다. 방 한쪽에는 대충 기대 놓은 낚싯대와 운동 가방이, 그리고 옆에는 능남고 교복과 농구부 유니폼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젖은 교복은 세탁 바구니에 걸쳐져 있었고. 막 샤워를 했는데도 끈적거리는 기분에 서태웅은 옆에 놓인 선풍기를 틀어보았다.
선풍기의 투명한 팬이 돌아가고, 백색소음을 만들며 바람을 보냈다. 그의 얇은 머리칼이 흔들리면서 말라갔지만 어째서인지 습하고 끈적대는 기분은 온몸에 달라붙어 날아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함께 달라붙은 생각들이 덕지덕지 머리를 채워갔다.
같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친구겠지. 그럼 나와의 약속은 잊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비가 와서 안 온 것뿐일까? 머리가 무거웠다. 비를 맞아서 피곤한 건지, 무거운 공기에 눌려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평소에 하지 않는 생각 때문에 감정에 파묻힌 건지… 알 수 없었다. 서태웅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코끝에 스며드는 레몬 향. 습도로 눅눅해진 침대 시트. 복잡한 생각들이 녹아서 침대 위로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시침과 분침이 각각 11과 12를 가리키자 서태웅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어제 널어놓은 옷은 말라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어보았지만, 신발은 아직 덜 마른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뒤꿈치에 손가락을 넣어 발을 욱여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덥고 습한 공기가 가슴 안쪽까지 훅 들어왔다. 눈부신 바닥을 내려다보니 어제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웅덩이에는 전날의 궂은 날씨를 잊으라는 듯 맑은 구름과 하늘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서태웅은 바다가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어떻게 알고 왔어?”
“그냥.”
자기 동네도 아니면서 길 잃으면 어떻게 하려고- 라며 말하려는 윤대협의 말에
“너희 집 앞에 편의점, 직원한테 바다 가는 길 물어봤어.”
스크린을 걸듯 답을 말하는 서태웅이었다.
“아아.”
그럼 다행이야. 윤대협은 물살에 흔들리는 낚시찌에 시선을 돌렸다. 바다는 전날의 이야기를 까맣게 잊은 듯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그와 똑같이 바다를 쳐다보았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물살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낚시찌를 바라보니 또 졸음이 오는 것 같았다. 낚시가 뭐가 재밌을까? 서태웅은 윤대협을 바라봤다. 그는 턱을 괴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어제,”
“미안해.”
이야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자기가 말할 걸 기다렸다는 듯 대뜸 미안하다고 해버리는 윤대협의 말에 서태웅은 움직이려던 입술을 멈추었다.
“학교 끝나고 나서 비가 오니까 당연히 네가 안 오던가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어. 어차피 비 오면 외부 농구코트는 쓸 수 없으니까. 그래서 친구와 집으로 가던 길이었어. 미안. 내 생각이 섣불렀어.”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괜찮아.”
“다음에도 왔는데 비 오면 그냥 돌아가. 어차피 농구도 못 하는데.”
윤대협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태웅이 갑자기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선 그를 바라본 윤대협 눈엔 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태웅의 표정이 보였다.
“농구는 비 그치고 하면 되잖아.”
“비가 안 그치면? 그리고 젖은 코트는 위험해. 미끄럽다고.”
“그럼 다른 거 하던가.”
“…? 다른… 거?”
서태웅 입에서 농구가 아닌 ‘다른 거’ 가 나왔다. 저도 모르게 되물어본 윤대협은 거칠게 흔들리는 낚시찌를 잠시 보다가 다시 서태웅의 얼굴을 쳐다봤다. 서태웅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올라와 있었다.
아. 어제 봤던 색이다.
서태웅이 고개를 홱 하고 돌리자 더 빨개진 귓불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하하…. 서태웅 입에서 다른 거라니….”
“시끄러워.”
윤대협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더니 작은 웃음을 내며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서 흘러나온 투정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래. 다른 거. 뭐 하고 싶은데?”
“몰라. 생각 안 했어.”
위아래로 흔들리던 낚시찌가 푹- 하고 물속으로 빠졌다. 윤대협은 잽싸게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작은 은빛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왔다. 물 밖으로 나와 버둥대는 물고기는 여름 햇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그런 반짝임이 신기한 듯 서태웅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반짝이는 얼굴을 바라보던 윤대협은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은빛 물고기를 다시 바다에 던졌다.
“왜 다시 보내?”
“이제 그래도 되니까.”
은빛 물고기는 수면 위를 맴돌다 맑고 깊은 바다로 내려갔다. 물고기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 윤대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낚싯대를 정리했다.
“그럼, 찾아볼까? 네가 하고 싶은 다른 거.”
파도 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윤대협의 웃음이 서태웅에겐 여름 햇살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 fin
- 서태웅이 잠들고 난 뒤
씻고 나온 윤대협이 바로 본 것은, 자기 침대에 자연스럽게 누워 잠이 든 서태웅이었다.
“서태….”
잠깐 당황해 깨우려고 했지만, 잠든 모습을 보니 이것도 귀하다 싶었다. 언제 북산의 에이스가 잠든 얼굴을 볼 수 있겠나(앞으로 계속 본다는 미래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옆으로 누운 서태웅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옆자리 바닥에 앉았다.
확실히 예쁜 얼굴이다. 남자애한테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왜 팬클럽이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숨소리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색색거리는 숨소리.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
“하….”
윤대협은 참아온 한숨을 다시 내보냈다.
“원온 원 때문이 아니라, 나를 보고 싶어서 오는 거면 좋겠는데.”
윤대협은 마른 수건을 서랍에서 꺼내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