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NIGHT IN SUMMER
미인콜렉터(@BTcollect13)
1 Akira
카나가와에서의 3년을 마무리하고 돌아왔을 때, 도쿄는 왠지 낯선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실제로 변한 곳도 있었을 테지만, 사실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면서 자신이 많이 달라진 탓일 거라고 센도는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생각했다. 이제는 모든 계절을 다시 도쿄에서 보내겠지. 바다 앞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려 보다 걸음을 내디뎠다.
뒤를 쫓아오겠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기에, 이대로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웠지만 낯선 도쿄,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수많은 사람. 대학 리그의 시합.
모든 것들이 새롭게 센도를 자극했다. 대학 리그에서는 정말로 터져나갈 듯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모두가 고등학교 때와 또 다르게 각자의 재능과 노력을 충실히 밟고 온 선수라는 점도 분명 달랐다. 취미로 하던 사람들은 그만뒀을 것이고, 어쩌면 재능과 노력이 부족해서 돌아선 사람들도 있겠지. 모든 일을 겪고도 남은 일부만이 이곳의 코트 위에서 함께 뛰어오른다. 누구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그래서…
센도는 즐거움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센도가 들어간 대학은 대학 리그에서도 강호인 학교여서 센도 혼자만 돋보일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각자의 역할이 철저하게 주어진, 어쩌면 냉담한 평가의 세계 속에서 센도는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코트 위에서 어떻게 증명하는지를 센도는 이미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알았기에.
늘 가장 심장 뛰는 순간에 그는 가장 차분해진다. 그가 지닌 냉정함은 언제나 득점과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센도 아키라는 언제나 그 순간 최선을 선택했다. 그래서 코트 위에서 센도 아키라는 항상 눈부시게 빛났다. 센도 아키라의 특별함은 닳아 사라지지 않았고, 수많은 카메라와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왔다.
그래서인지 센도는 대학 리그의 루키로 불렸고, 다음 에이스는 네가 될 거란 소리도 자주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 소년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슈퍼 루키라는 말이 어울리던 소년을. 고등학교 대회에서 이젠 정말 상대할 사람 없을 선수가 되었을 루카와 카에데가 매번 생각났다. 떨어진 채로 몇 달을, 그리고 더 지나 1년을 지내면 흐려질 법도 한데, 처음부터 그 녀석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긴 했지.
여전히 그렇고.
소년이 생각날 때마다 센도는 더 많이 달리고 뛰었다. 슛을 하나라도 더 던지면서, 자신이 지닌 슛의 정밀함을 한 단계씩 더 쌓아 올린다. 공을 던지는 순간마다 그 소년이 뒤에서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와 만나고 닿는 것만 같았다.
그가 따라오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센도는 더 많이 공을 던져 넣었다.
그 1년 동안에도 농구 잡지에 이름이며 얼굴이 실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아이다에게서 잡지를 봤다는 요란한 전화가 왔을 때는 문득 루카와도 그 잡지를 보았을까 생각해 본다. 자신이 덩크를 꽂아 넣는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한 잡지는 카나가와에서도 종종 보았던 것이라, 아마 그곳에도 어딘가 서점에 꽂혀있겠지 생각했다.
센도는 매끈하게 닳은 엄지로 농구공을 매만지며,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로 달려오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인데도 오래된 영화 속 필름처럼 아주 살짝 빛바랜 채로 머릿속을 스친다.
자전거 바퀴가 멈춰서는 끼익, 하는 쇳소리.
날카로운 소리가 자신을 방해해도 신경이 거슬리지 않았던 것은 결국 다가오는 소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어서였다.
멋대로 다가와서는, 자신이 고개 들어 바라보면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로 내려다보는 그 애. 웃지는 않아도 어쩐지 그 마음 하나하나 다정했던 소년. 추워서 머플러를 두른 채로 달려와서 차가운 바다 앞에 서는 이유가, 오직 나라던 그 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어쩌면 노을 지는 바닷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려서, 어딘가 가게 앞에 멈춰 섰을지도. 가게 앞 가판대에 걸린 농구 잡지를 집어 들고, 표지를 장식한 나를 보면서 한 번쯤은 도쿄에 있을 나를 생각할지도 모르지. 전부 내 상상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좋았다. 루카와 카에데가 자신을 바라보는 상상이 지겨울 리가.
그래서,
네가 바라는 만큼 나는 빛나고 있어? 루카와.
그게 어디든 금방 쫓아갈 거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던 소년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센도는 혼자 몰래 웃었다.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잡지는 봤냐고 떠들어대고 싶었지만, 다시 만나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을 쌓아 올려야 했다.
그 애가 충분히 쫓아올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2 Summer in Midnight
삑―
버저음이 울리자, 선수들이 하나씩 코트 위로 걸어 나온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한여름, 경기장 안의 열기도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홈 유니폼을 입은 센도가 코트 가운데로 향하며, 후반이 되어서야 나온 상대편의 한 선수를 응시했다. 전반 때부터 벤치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맹랑한 1학년. 작년 고교 전국 대회 우승의 주역 중 하나가 자신을 그렇게 열렬히도 바라보니 무시할 수도 없어서 센도는 씩 웃었다.
“오랜만이다?”
“…흥.”
여전히 말없이 까탈스럽게 구는 건 변하지 않았네. 그럼, 저런 태도 뒤에 숨겨진 다정함 같은 것도 그대로일 것이라고 센도는 멋대로 추측하면서 몸을 낮춘다. 코트 위의 영역을 차지하고서 그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속삭이듯 낮게 인사했다.
“기다렸다, 슈퍼 루키.”
1년 넘게 기다려 온 재회였다.
.
.
.
도쿄의 거리는 어두워질 날이 없다. 밤이 되면 오히려 더 번쩍이며 빛나는 도쿄라는 도시가, 루카와에게는 아직 낯설었다. 그걸 아는 것처럼 센도는 조금 더 외진 곳으로 걷다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산책로를 밝혀주는 불 말고는 저 멀리 도시의 불빛만 보이는 곳으로, 둘은 걷고 또 걸었다.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니 도시 한 구석 정도는 내려다보였다. 슬슬 느려지던 걸음이 멈추고 나면 센도는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루카와를 돌아보았다. 바다 없는 도쿄의 건물들을 바라보는 루카와의 옆모습이, 어슴푸레한 불빛에 비쳐 빛나고 있었다.
“…이제 다시 만났네.”
정적을 먼저 조심스레 두드려 깨자, 루카와의 고개가 돌아가 자신에게로 향했다. 이제야 봐주네, 싶어서 부드럽게 웃자, 루카와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만 얌전히 끄덕였다. 시합 때는 그렇게 달려들더니 지금은 왠지 많이, 조용하네. 말이 없는 것과는 좀 다른데. 뭔가 더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손끝을 그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감아온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내려갔다가 다시 루카와에게 향하자, 루카와의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많이, 기다렸냐.”
이거 봐. 루카와 카에데는 여전히 다정하다니까. 센도는 이제는 완전히 안심해서 웃었다. 고작 1, 2년 정도로는 그 소년을 뒤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너는 여전히 내가 알고 좋아하던 카나가와의 소년이 맞아.
“응, 1년도 넘게 기다렸으니까.”
“…나도 많이 기다렸어, 센도.”
고요히 이름을 부르면서도 손에는 힘을 주는 루카와를 바라보다, 센도는 아예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어 꼭 쥐었다. 아프지는 않게, 하지만 절대 그를 놓치지 않도록.
“있잖아, 루카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혹시 내가 나온 잡지는 봤어? 나 어땠어, 멋졌지. 자랑하며 그에게 멋지단 소리도 들어보고 싶었다.
작년에는 내가 루키라고 불렸는데, 하면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기도 했고. 루키라고 들을 때마다 널 떠올렸다고 낯간지러운 말도 하고 싶다.
그리고, 너는… 너는 나를 얼마나 생각했냐고, 너는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없었던 루카와 카에데의 시간을 전부 되묻고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달싹거리던 입술은 전혀 다른 말을 하나 내뱉었다. 풀어야 할 회포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산더미 같았지만. 너를 다시 만난 지금은 다른 말이 필요하니까.
“다시 만난 기념으로…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
뜬금없이 소원을 들어달라는 말을 하는 센도를 바라보며 루카와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센도가 바랄 소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루카와의 눈은 흔들림 없이 빛났다.
“…아키라라고 불러줘.”
센도. 겨울 낮에 그가 불렀던 제 이름.
이 겨울이 지나고, 결국 다시 만날 여름에 네가 나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루카와는 한참을 더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조금 뻘쭘해질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대답이 없자, 싫은가 싶어서 슬슬 센도도 불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거절하진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왜냐면 나는 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일 줄 알았으니까.
얼굴에 점점 열이 올랐다. 볼이며 귀까지 숨길 수도 없이 붉힌 채로 센도는 루카와의 손등을 엄지로 문질거리고, 제 머릴 긁적이며 부끄러운 티를 팍팍 냈다. 내려고 낸 것도 아니고 그냥, 정말로, 첫사랑 마주한 남자애란 그런 법이니까.
“내가 널, 솔직히 많이 좋아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해서 기다린 거거든. 그리고 그때부터 듣고 싶었어.”
고백 없이도 함께 하던 시간이 지나가 버렸고, 그 시간에 빛이 바래다 너를 겨우 다시 만났다. 어쩌면 우리의 시차는 대학의 마지막쯤 되면 또 벌어지고 다시 너를 만날 이유가 없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등학교의 그때처럼, 아무것도 아닌 채로 널 보내줄 생각은 없어.
나는 이제,
“아키라, 라고…. 그렇게 불러도 되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카에데의 아키라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졌거든.
“너는 아니야? 루카와….”
너무 절박해 보였을까? 답해주지 않는 루카와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그 순간 바람이 불어 손등을 간지럽혔다. 아니, 바람이 아니라. 그냥 누가 웃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믿기지 않아서 고갤 퍼뜩 들자, 루카와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카에데.”
“응?”
대뜸 내뱉은 말에 놀라 되묻자, 루카와의 입꼬리가 조금 씰룩였다. 화가 난 건지 웃고 싶은 건지.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하며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눈이 마주친다.
“너도 그럼 카에데라고 해.”
귀도 볼도 붉힌 소년이 둘, 그곳에 함께 있었다.
“…아키라.”
센도,
아키라.
다정히 불러주는 목소리가 겨울 낮의 어느 이별과 겹친다. 네가 이 목소리로 날 불러줄 것을 알아서,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여름을 기다릴 수 있었어.
“하하! 응, 카에데. 카에데.”
“윽, 좀 떨어져…. 더 무거워졌어.”
“너도 키가 좀 더 큰 것 같은데?”
카나가와를 떠나던 때에 마음 속에 담아내던 바다. 그리고 그 곁에 머물렀던 너와, 네 목소리. 너는 그 모든 기억을 가지고 다시 날 쫓아와 줬구나.
3 Kaede
루카와.
바다 끝자락도 보이지 않는 도시 속에서
네가 곁에 서 있으니 꼭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우리가 마지막에 함께 바다 앞에 섰던 계절은 겨울인데도 이상하게 너와 있으면…
언제나 이렇게 바다와 여름이 함께 하게 돼.
그러니 나는 어떤 계절이라도 너와 함께 있으면
결국은 처음 만난 첫사랑의 계절로 돌아가겠구나.
그러니까, 있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시 만나서 반가워,
사랑하는 나의 카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