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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 sweet watermelon

우택 (@wootaek00)

  바다에 익숙한 소년들에게는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더위였다.

  같은 여름이라고 해도 산 속의 더위와 바닷가의 더위는 질이 다르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햇살을 울창한 나무가 막아내며 회색과 초록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모습은,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바다와 빛나는 백사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나무들이 뿜어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방울들도 주변의 온도를 낮춰주어, 새벽에는 차라리 서늘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탁 트인 해변에서 아무것도 막아서는 것 없이 몰아치는 바람, 이글거리는 모래에서 올라오는 건조하기까지 한 복사열과는 달리 수분을 머금은 산의 공기는 한낮동안 눅눅하게 모두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덥다, 그리고 힘들다. 훈련에 어지간하면 우는 소리를 하지 않는 3학년들까지도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오전 루틴을 시작했다. 인터하이를 앞둔 여름, 북산과 능남의 공동합숙 닷새째였다.

  “대협아! 대협아!”

  학년순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배식 줄에 따라서 먼저 식사를 끝낸 윤대협이 플립플랍을 직직 끌면서 합숙소 마당으로 나왔을 때, 출입문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전 중에 자리를 비웠던 유감독의 목소리였다. 나가보니 앞마당 시멘트 바닥 위에 주차된 유감독의 승용차가 보였다. 그리고 자동차 뒷좌석을 꽉 채우고 있는, 푸르고 검은 무늬도.

  “수박 사 왔다. 이따가 다 같이 먹게 애들 불러서 좀 옮겨라.”

  차량 뒷문을 열면 우르르 쏟아질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득그득한 수박은 한 눈에 보기에도 스무 개 가까이 되어 보였다. 우리 감독님, 손도 크시지. 윤대협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꿈뻑거렸다. 한창 때의 고등학생들이 마흔 명 남짓 있으니까 두당 반 통 정도는 먹어치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만 문제는, 뒷문을 조심조심 열고 꺼내든 수박이 차 뒷좌석에 갇혀 산골짜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찜통더위 때문에 미지근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수박을 윤대협의 손에 우선 하나 건네던 유감독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가정집이라면 수박 하나 냉장고에 넣어서 차갑게 만드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여긴 산 속의 합숙소이다. 수박 스무 개를 집어넣을 냉장고 여유 공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이구, 이걸 어쩐다….”

  미지근한 수박이라도 좋다고 달려들 만한 녀석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고생하는 선수들에게 시원하고 단 간식을 먹이고 싶은 유감독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윤대협도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다. 윤대협보다 조금 더 늦게 식사를 마친 안영수와 황태산이 두 사람을 발견해서 다가오고, 선배들이 뭘 하는지 아직도 사사건건 기록을 하는 박경태까지 와서 다섯 사람의 머리가 모인 후에야 이 수박들을 숙소 앞 개울에 넣어두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낮에도 냉기를 유지하는 계곡물에 넣어두면 이 수박들도 속까지 시원해 질 것 같았다.

  결정이 되자 윤대협은 가타부터 따지지 않고 수박을 담아둔 그물을 한 손에 세 개씩 모아 쥐었다. 그럼 바로 갖다놓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엉겁결에 수박 배달에 동참하게 된 황태산도 윤대협에게 질세라 여섯 개를 들고, 안영수와 박경태가 네 개씩 꺼내들자 차 안이 금방 비었다. 숙소 대문을 나서면 개울은 코앞이라 길을 물을 것도 없었다. 능남고 바스켓 클럽 티셔츠를 입은 네 명이 나란히 개울가로 내려갔다.

  “…앗!”

  “왜?”

  “생각해보니, 이런 건 선배들이 직접 하실 게 아니라 1학년들 시키시지 그랬어요!”

  물가에 수박을 우선 내려놓은 윤대협이 계곡물 안으로 이미 들어간 후에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박경태가 소리쳤다. 강백호 같은 씩씩한 생태계 교란종이 없었던 덕분에, 능남도 운동부답게 선후배간의 기강이 단단하게 잡혀있었다. 다른 여느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시합 중 음료수나 수건 준비 등 심부름은 당연히 후배 몫이었고 그것은 합숙 중에도 변함이 없었다.

  애초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감독도 처음에 윤대협에게 심부름을 시킨 게 아니라 후배들을 불러 옮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심지어 주장과 부주장이 나란히 후배들 먹일 수박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에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박경태의 안생이 파래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종아리까지 물에 들어간 윤대협이 손을 내저으면서 피식 웃었다.

  “어엉? 됐어. 그냥 손 비면 하는 거지.”

  “…허…?”

  무심결에 수박배달에 함께했던 안영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이미 와 버린 일이니 딱히 이제 와서 후배들을 부를 걸, 하고 후회하지 않는 것은 안영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윤대협이 원래 저렇게 후배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아무렇지 않게 후배 부리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 왔는데. 게다가 윤대협 저 자신도 도쿄에서 일부러 스카웃 해온 에이스라는 화려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1학년 때는 군말 없이 선배들의 지시에 따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솔선해서 잔심부름을 한다? 수상했다. 새삼스럽게 감독에게 잘 보여서 예쁨을 받으려 군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 건 윤대협의 캐릭터가 아닐뿐더러 유감독은 윤대협이 심부름 잘 하고 싹싹하게 굴 시간에 농구공이나 한 번 더 튀기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미심쩍은 눈으로 윤대협을 바라보면서도 그래도 안영수는 기왕 자기 손 안에 떨어진 일을 대충 하지는 않았다. 넷이서 열심히 돌을 옮겨가면서 수박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물속에 잘 고정해두고 있으려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수박을 넣어둔 개울가에서 조금 상류로 올라와서 물가로 걸어 나가려는 안영수를 윤대협이 불러세웠다.

  “야, 영수야.”

  “왜?”

  대답 대신 거센 물보라가 안영수의 얼굴을 덮쳤다. 물론 계곡물이 파도를 일으켰을 리는 없고, 윤대협의 손이 만들어낸 물보라였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고 티셔츠가 축축해진 안영수가 소리를 꽥 질렀다.

  “악! 윤대협, 너 미쳤어?!”

  “…대협아….”

  안영수 옆에 바로 붙어 있다가 졸지에 물벼락을 같이 맞은 황태산도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선배들 뒤를 따라서 조금 늦게 올라온 덕분에 윤대협의 폭거를 피할 수 있었던 박경태가 당황스러운 듯이 눈을 꿈뻑거렸다.

  “하하하, 시원하지?”

  “…좋다.”

  두 주먹을 꽉 쥔 황태산이 무언가를 결심한 눈으로 윤대협을 마주 바라보고 섰다. 어쭈, 바닥이라도 두드리게? 눈썹을 으쓱한 윤대협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인 황태산이 물싸움에 참전했다. 농구공을 우습게 잡는 커다란 두 손이 거센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 너네 이러려고 심부름 했냐?!”

  “아니~ 더워서 짜증나 보이길래~”

  어푸푸, 하면서도 물을 피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맞은 윤대협이 해맑게 웃었다. 옷이 흠뻑 젖어 티셔츠가 달라붙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대협도 다시 물을 한 움큼 쥐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뿌려댔다. 자리를 피하려고 했던 박경태도 결국 등짝을 물로 후드려 맞았다.

  복수다, 어쩐다 하면서 본격적인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물이 엉망으로 여기저기서 튀어오르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온 사람의 존재를 물 안에 들어가 있는 네 사람 모두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윤대협. 다 했으면 오라고 너네 감독님이….”

  촤아악.

  윤대협이 웃으면서 만들어낸 물보라가 물가에 서 있던 사람의 얼굴을 덮쳤다. 그제서야 가까이 다가온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린 박경태가 비명을 꽥 질렀다.

  “서태웅 선수!!!”

  “…아.”

  네 명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북산고 티셔츠에 민소매 한 장을 겹쳐 입은 서태웅이 장승처럼 우뚝 서서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늘하늘하게 붕붕 떠 있던 앞머리는 물에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기이할 정도로 박력 있는 모습에 안영수조차도 남의 학교 2학년이 저희 주장 이름을 막 부르는 것을 지적 할 수가 없었다.

  “…이 자식….”

  동굴 안에서 울리는 것 같은 분노에 찬 목소리가 서태웅의 목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 큰일 났다. 하하…. 하고 마른 웃음을 웃으면서 윤대협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등 뒤가 물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 안에 들어와 있는데. 이걸 배수진이라고 할 수 있나?

  스윽, 하고 한 손을 들어 올린 서태웅이 이마를 쓸어 넘겼다. 잘생긴 이마와 부드러운 눈썹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감탄을 윤대협이 하기도 전에, 운동화를 신은 그대로-다행히 농구화는 아니었다- 서태웅이 물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어, 야, 잠깐만, 한 대 칠 건 아니지?”

  물벼락에 물벼락으로 갚아준다면 한 대 정도는 맞아줄 생각이 있었지만, 꽉 쥔 주먹이 아무리 봐도 물싸움을 할 폼새는 아니었다. 당황한 윤대협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진정하라는 듯이 보이는 두 손바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태웅이 팔을 휘둘렀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윤대협은 등이 오싹했다.

  “야,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서태웅 선수는 싸움도 잘 한다…. 요체크다!”

  “대협아….”

  아예 합장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태산과, 그런 황태산의 등짝을 때리는 안영수와, 약한 패닉에 빠져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박경태를 보면서 윤대협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거냐. 나 잘못 맞으면 턱 나갈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저를 도우려다가 팀원들이 서태웅의 팔꿈치 등에 턱이 나가는 것도 사양이었으므로, 윤대협은 최대한 혼자 힘으로 서태웅을 막아보기로 했다. 싸움을 잘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뒤로 물러나는 윤대협을 쫓아오는 바람에 물속에 허벅지까지 담그고 있는 서태웅의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돌을 피해 바닥을 조심해서 밟으면서 윤대협은 서태웅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 물벼락 좀 맞은 게 얼마나 화가 났으면 아예 물속에까지 따라와서 주먹을 휘두르나 하는 마음이 반, 그 귀하다는 앞머리 쓸어 올린 서태웅 얼굴 좀 구경해보자는 마음이 반이었다. 턱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윤대협을 바라보는 서태웅의 눈빛은 형형했다. 빡빡한 속눈썹이 물 때문에 가닥가닥 뭉쳐있고, 그 아래로 오똑한 콧대와 끝이 톡 올라간 코끝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 얇은 입술이 미소를…,

  “어라.”

  뒤로 물러나며 도망치던 것을 멈춘 윤대협의 얼굴 바로 옆을 서태웅의 주먹이 스치고 지나갔다. 으아악, 대협이형!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박경태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태웅은 뻗은 주먹을 거둬들이고 윤대협의 얼굴을 다시 노려보았다. 어쩐지 이게 정답이라는 기분이 들어서, 윤대협은 서태웅이 주먹을 다시 휘두르기 전에 먼저 팔을 움직였다.

  덥썩, 하고 허리에 갑자기 둘러지는 굵은 팔에 서태웅의 몸이 흠칫했다. 티 나지 않게 살짝 굳은 한 학년 아래의 에이스를 꽉 끌어안은 윤대협이 그대로 물속으로 넘어졌다.

  풍덩.

  물보라가 크게 울렸다.

  “으풉…!”

  당황으로 버둥거리는 손이 윤대협의 팔뚝을 퍽퍽 때렸지만 물속이라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허벅지까지라 그리 깊지도 않은 물이었지만 완전히 주저앉으니 머리꼭지까지는 간신히 잠길 수 있었다. 옷이 물속에서 사정없이 너울거리는 바람에 서태웅의 맨허리가 윤대협의 팔에 닿았다. 바르작거리면서 깜짝 놀란 서태웅의 무릎이 개울 바닥의 돌에 부딪히기 직전에, 윤대협이 얼른 허리를 감은 팔을 풀어주었다.

  “콜록, 콜록….”

  바닥에 주저앉은 윤대협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간신히 물 바깥으로 고개를 든 서태웅이 물을 뱉어내면서 기침을 했다. 야, 야, 괜찮아?! 넘어지는 것 까지 보고는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는지, 가까이 다가온 안영수가 서태웅을 얼른 부축했다. 제 어깨에 무게를 지탱하던 손이 없어지고 나서야 윤대협도 주섬주섬 물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푸하아…. 와, 죽는 줄 알았네.”

  “자업자득이다, 이 자식아.”

  황태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는 윤대협을 노려보면서 안영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히 머리끝까지 찬물에 잠긴 후에 열이 좀 식었는지, 서태웅은 윤대협을 한 번 흘겨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덤벼들지는 않았다. 옷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채로 다섯 명이 나란히 합숙소의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이놈들….”

  오후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심부름을 시켰던 주장과 부주장을 비롯하여 다섯 명 전원이 홀딱 젖은 꼴로 돌아온 탓에 유감독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누가 봐도 물장난을 만끽하고 온 꼬락서니였다. 혹시 딴 짓을 하고 있더라도 윤대협에게 제일 말려들지 않을 것 같은 놈을 보내서 불러오라고 했더니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유감독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서태웅은 태연했다.

  사태의 원흉과 한 세트로 묶이기는 억울하지만 친구를 고자질 하기는 싫었던 안영수가 입을 꾹 다물고, 원래 황태산은 이런 일에 입을 열지 않고, 박경태는 얼어붙어서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을 곁눈질로 살펴본 윤대협이 얼굴 가득 미소를 장착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자수한다면 빨리 말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윤대협이 뭔가 말 하기도 전에, 서태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윤대협이 절 끌어안고 물속에 쓰러트렸습니다.”

  “…엉?”

  당황한 것은 유감독 뿐만 아니라 윤대협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사제지간에 눈빛이 오고갔다. 너 임마, 뭔 짓 했어? 하긴 했지만 저건 아니예요.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던 송태섭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한 박자 늦게 강백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우! 너 지금 치사하게 물놀이 하고 온 거냐!”

  “안 놀았어. 그냥 안겨서 쓰러진 것뿐이야.”

  “아니, 안기는 했지만! 쓰러트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잖아.”

  급하게 윤대협이 말을 덧붙였지만 더 이상하게 들릴 뿐이었다. 결국 뭐라고 더 설명을 포기한 윤대협이 마른세수-라기에는 지나치게 축축했지만-를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백호와 서태웅은 말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게 물에서 논 거지! 완전 즐겼구만!”

  “안 즐겼어, 멍청아.”

  “그럼 싫었냐?”

  “…….”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오후 훈련은 시작하기 전이고, 일단은 심부름을 하고 온 다섯 명을 혼내기도 미묘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하이고, 하고 고개를 젓던 유감독이 한숨을 쉬면서 다른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대놓고 말은 못하고 있지만, 시원하게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온 녀석들을 부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닷새쯤 되니 후덥지근한 산속의 공기에 다들 지치지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더위로 헉헉대고 있는데 몇 놈만 놀고 온 채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버럭거리며 혼을 내기에도 억지스럽고 주장의 체면을 구기게 된다. 게다가 능남의 선수 몇만 꾸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교 에이스까지 얽혀 있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계산을 빠르게 끝낸 유감독이 북산의 안감독을 바라보았다. 양해를 구하듯이 보내는 눈빛에 안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정도는, 하는 합의가 두 감독 사이에 빠르게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딱…, 3시간만 휴식 시간이다. 신발 갈아 신고 숙소 앞 개울로 집합.”

  “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선수들이 서둘러 라커룸으로 뛰어갔다. 오늘 뿐이다! 버럭, 하고 소리를 한 번 친 유감독이 이미 흠뻑 젖어있는 녀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네도 다시 가라.”

  “감독님은요?”

  “뭘 나까지 오라가라야. 니들끼리 놀아.”

  묘한 눈빛을 교환한 박경태와 안영수가 축축한 옷 그대로 양쪽에서 유감독의 팔짱을 끼었다. 감독님, 물에 발이라도 담그시죠. 맞아요, 시원해요! 어느새 등 뒤에 붙어선 황태산도 유감독을 재촉하며 물가로 몰고 갔다. 놓으라는 둥 어쩌라는 둥 소리를 치면서도 유감독이 순순히 세 사람의 손에 끌려갔다. 큭큭거리면서 그 모습을 보던 윤대협이 옆에 멀거니 서 있는 서태웅에게 손짓했다.

  “우리도 갈까?”

  “…….”

  “이제 안 쓰러트릴게.”

  “멍청이.”

  이미 더위에 지쳐있던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가 물에 뛰어든 탓에 계곡이 시끌시끌해졌다. 여기저기서 물보라소리, 즐거운 비명소리가 뒤섞여 물방울들이 날았다. 그늘진 자리의 넓적한 바위를 찾아낸 윤대협이 그 위에 걸터앉아서 발목만 물에 집어넣었다. 학교 가리지 않고 후배들이 뒤섞여서 노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다리를 흔들고 있는 윤대협의 옆에 서태웅이 다가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일부러 그랬지.”

  “어엉? 뭘?”

  “…내 허리 끌어안고 넘어진 거. 안 다칠 각도로 일부러 그랬잖아.”

  “내가 그랬나?”

  피식 웃으면서 발로 작게 물을 튀기자 서태웅이 인상을 쓰면서 팔뚝으로 윤대협을 퍽하고 쳤다. 아야야, 하고 엄살을 부리면서 윤대협이 웃었다. 그러는 자기도 일부러 말려들어줬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는 대신에, 윤대협은 고개를 돌렸다. 몇몇 능남 부원들의 손에 번쩍 들려서 물속으로 텀벙 빠지는 유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뭐, 감독님…. 이렇게 핑계거리를 만들어드려야 좀 솔직해지시니까….”

  유명호 감독이 부임한 후로 능남의 지옥훈련은 꾸준하고 철저하게 이어져왔다. 윤대협조차도 그것을 떠올리면 안색이 파래질 정도의 지독한 훈련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부원들이 농구 자체에 지쳐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이렇게 숨통을 틔워주는 순간을 잊지 않고 챙겨온 것도 유감독이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모래사장을 한껏 달린 후에는 입수 시간이, 겨울의 실내 훈련 후에는 눈싸움 시간이 윤대협의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어디서 수동빙수기계를 빌려왔는지, 훈련 중 쉬는 시간에 다 같이 얼음을 갈아대면서 빙수탑을 쌓아서 푹푹 퍼먹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타교와의 합동 합숙이라 대선배이기도 한 안감독에게 이런 일정 외의 휴식시간에 대한 의견을 쉽게 내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박을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사온 건 뭐, 이런 사태로 이어질 것을 예상했는지 아니면 그냥 손이 클 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윤대협은 기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자였고 누군가가 자각 없이 던지는 기대도 캐치해 낼 눈치가 있었다.

  “넌 오후 훈련 못해서 싫어?”

  “수박 먹고 나랑 원온원 해.”

  “엉?”

  어쩐지 서태웅은 이런 일에 오지랖을 부릴 성격 같지는 않았는데, 윤대협 옆으로 와서 네 속을 다 안다는 듯이 군다 싶었다. 이 사태를 일부러 만들어냈다는 자백을 받아내자마자 빚추심이라도 하는 마냥 당당하게 원온원을 요구하는 서태웅의 모습에 윤대협은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야 수박 먹어라! 수박을 벌써 썰었는지, 이한나와 이달재를 포함해 신중한 몇 명이 칼을 들고 있는 자리에 다른 멍청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드를 서던 송태섭이 소리를 질렀다. 선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려던 서태웅이 멈칫하고 윤대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말 하고 해.”

  “응? 뭘?”

  “말 하고…, 안으라고. 놀랐으니까.”

  “…말 하면 안아도 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서태웅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확하고 윤대협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사나웠다. 하지만 그대로 몸을 휙 돌려서 가버리는 서태웅의 뒷모습을 보던 윤대협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는 서태웅의 목덜미가 새빨갰다.

  “…….”

  덩달아서 윤대협의 얼굴도 빨개졌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감싸고 하, 하고 숨을 쉰 윤대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태웅과 조금 차이를 두고 수박을 받으러가니 큼직하게 잘려진 수박 조각을 건네던 송태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너네는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냐. 물에 안 들어갈 거야?”

  “하하…. 일단 수박부터 먹고.”

  약간 떨어진 자리에 주저앉아서, 수박처럼 새빨간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수박을 갉작거리고 있는 서태웅을 보면서 윤대협이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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