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불명
시코(@ymmfl_11)
*사망소재 주의
*BGM이 따로 있습니다. 우측 상단의 BGM을 눌러주세요.
제 편지를 보실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서태웅이라고 해요. 18살이고 북산고 2학년이예요.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죽은 사람이예요. 그렇다고 귀신은 아니고 설명하기 좀 복잡하네요. 저는 10년전쯤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졸음 운전을 한 트럭에 치였다고 했어요. 사실 저도 사고가 날 때쯤 기억이 희미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10년째 이승에서 머물고 있는 걸 보면 사후세계란 게 있나 봐요. 제가 살아있을 때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10년이나 여기에 머물고 있으니 점점 지루해요. 혼자서 농구 하는 건 재미없거든요. (아, 저는 농구를 정말 좋아해요. 살아있을 땐 농구선수였어요.) 그래서 심심할 땐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 편지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겠지만 아무라도 제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거든요.
제가 죽었다는 걸 깨달은 건 정말 간단했어요. 제 눈으로 눈을 감고 있는 제 모습이 다 보였거든요. 아, 난 기절한 게 아니구나. 잠깐 기절한 건 줄 알았는데. 옆에서 아무리 움직여도 저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모두 다 제 육체에 매달릴 뿐이었죠. 시끄럽게 삐-소리가 울렸어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포기한듯 제 몸에서 떨어졌죠. 그 다음엔 장례식이 치뤄졌어요. 거기 가만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마지막날까지도 오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예요. 윤대협, 이라고… 사실 많이 좋아했어요. 결국 거절 당한 게 제 마지막 기억이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나 봐요. 그 애가 다녔던 능남고 감독님까지 오셨는데 그 애는 보이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에 그 애를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그 애를 발견한 곳은 다른 곳도 아닌 병원 안이었죠. 저랑 같이 병원까지 와 놓고 의식을 잃었다가 그제서야 깨어난 거였대요. 깨어난 그 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의사 선생님을 봤어요.
“제가… 왜 여기 있나요?”
“환자분께서 서태웅씨 여기에 데려다 주고 의식을 잃으셨어요.”
“…누구요?”
그 애는 내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내 이름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거든요. 깨어난 그 애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는 걸 따라다녔어요. 다행히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걸 지켜봤어요. 그 애는 정말 도려낸 것처럼 저에 대한 기억만 다 잊어버렸어요.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만 빼고.
처음엔 분했어요. 내가 그렇게 잊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을까요. 날 까맣게 잊어버린 그 애를 두고 다른 곳을 돌아다녔어요. 제가 다녔던 학교를 갔다가, 바다를 갔다가… 그러다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은 능남고 체육관이었어요. 거기서 그 애를 계속 기다렸어요. 나는 그 애가 농구 하는 걸 많이 좋아했어요. 그냥 그거라도 보고싶었는데, 그 애는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어도 그 애는 보이지 않았어요. 경태는 널 닮고 싶다더니 패스가 많이 늘었다. 태산 선배는 대학 농구팀에서 스카우트가 왔어. 그 애는 알고 있었을까요? 날 잊어버리더니 농구도 잊어버린 걸까요? 그 애는 한번도 체육관에 발을 들이지 않고 졸업을 했어요. 졸업식 날 많은 사람들이 그 애의 미래를 응원하고 축하해주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왜 농구를 그만뒀어?’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애의 앞에 서서 물어봤어요. 당연히 그 애는 나를 지나쳐서 아주 멀리 사라졌어요.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언젠가 사라질 테니까.
그 애는 아마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 것 같았어요. 그 애가 살던 자취방에는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거든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북산고 주변에서 혼자서 농구를 하고, 같이 농구를 했던 친구들이 연습하는 걸 지켜보기도 했어요. 가끔씩 농구를 하는 그 애가 떠올랐어요. 대학에서도 농구를 하지 않는 걸까. 그 애가 어떻게 산다는 소식 단 하나조차 들을 수 없었어요. 또 다시 여름이 찾아올 때까지도 말이예요.
그 날도 평소와 같이 학교 옥상에 누워 멍을 때리다 농구를 하려고 일어났어요. 평소엔 학교 체육관에서 농구를 했어요. 어짜피 아무도 내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그냥 갑자기 그 애와 처음 원온원을 했던 코트가 가고 싶었어요.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애를 마주쳤던 건널목 앞이었어요. 한참을 그 애를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던 그때 타이밍 좋게 그 애를 만났었죠. 지금처럼 아주 더운 여름날 해가 지도록 원온원을 했던 하루. 그 애는 갑자기 찾아온 저를 불평 한마디 없이 상대해주었죠. 그때는 그 애를 뛰어넘는 게 저의 최대 목표였어요.
잠시 추억에 잠겨 있었는데, 맞은 편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어요. 벌써 몇 개월이나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죠. 그 애는 제가 있는 쪽으로 건너오려고 차단기가 올라가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침내 우리가 가까워졌을 때, 저는 한참이나 부르지 못했던 그 애의 이름을 말했어요.
“윤대협…”
“…응? 나?”
그 애는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어요. 내 착각인가? 보일리가 없는데… 그 애는 멍하게 멈춰서 있는 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어요. 차단기가 다 내려가도록 저는 그 애를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학생, 괜찮아요? 근처에 있던 역무원이 달려와 제 안부를 물었어요. 제가 보이는 건 그 애 뿐이 아닌 것 같았어요. 왜 내가 보이는 걸까요?
“그렇게 있으면 위험하잖아.”
“…내가 보여?”
“응, 안보이지는 않지. 내 시력 정상이거든.”
뚫어져라 쳐다보는 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 애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그 애는 여전히 저를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었어요. 더 이상 내가 좋아했던 농구도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이젠 더플백 대신 백팩을 메고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으니까요.
“다치진 않았지?”
“…응.”
“뭐… 뭔진 몰라도 이렇게 된 거 밥이나 사줄까? 근처에 선배 가게 가는 길이었거든.”
여전히 쓸데없이 다정해서 또 기대하게 만들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애를 좋아하게 되겠죠. 바보같이.
수취인 불명
뭐, 예상과 다르지는 않았어요. 또 그 애를 좋아하게 됐죠. 내가 보이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믿기지는 않겠지만 일주일동안 그 애와 있으면서 알게 된 건 이래요.
그 후로 어떻게 됐냐면요, 이미 엔딩까지 본 영화를 계속해서 다시 보는 것처럼 그 애를 좋아하게 되고, 제 마음은 거절 당해요. 마침내 제 기일에 그 애의 기억이 잠시 돌아오면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다 저는 사라져야 해요. 그게 올해로 벌써 10년 째예요.
제가 귀신이라서 이렇게나 오래 이 곳에 머무르는 줄만 알았어요. 아직 너무 어려서 한이라도 맺힌 건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학교 선배님(?)이 저는 귀신이 아닌 것 같다고 했어요. 한이 느껴지지가 않다고… 산 사람이 아직 보내고 싶지 않아서 사념…이라고 했나 뭐 그런 걸로 떠도는 거래요. 어린 나이에 죽거나 갑작스럽게 죽으면 그럴 수 있대요. 여기에도 제가 나타나기 전 쯤 그런 애가 있었대요. 지금은 안 보이는 걸 봐선 떠난 것 같지만. 하지만 산 사람에게 보이는 건 왜일까요? 그 답은 귀신 선배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애가 날 보내기 싫어하는 건가, 막연하게 생각이 들었어요. 그 애가 제 모습을 제일 먼저 봤으니까요. 다음 해엔 그 애에게 잊혀지려고 노력했어요. 언제까지 여기에만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요. 아예 그 애와 마주치지 못하게 아주 멀리 떠나보려고 했어요. 마주치지 않으면 아예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보려고 기차를 타려고 했는데 벽에 막힌 것처럼 한 발짝도 더 갈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또 그 애를 마주쳤어요. 그 때 확신했어요. 나를 이 곳에 붙잡아 두는 사람은 그 애라는 걸요.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피해 다녀도 그 애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애가 나를 보내주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받아들였어요. 기일이 다가오면 그 애와 함께 일주일을 보내고 똑같은 엔딩을 10년 째 보고 있어요.
벌써 기일이 일주일 남았어요. 오늘도 그 애는 저를 보게 되겠죠. 이번에는 덕규 선배네 가게 앞이예요. 여기서 술 마시고 있구나. 덕규 선배는 제 기일이 다가오면 그 애를 불러서 술 상대를 해줘요. 저는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 길고양이와 놀아줬어요. 그래도 이건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걸 일주일 동안은 맘껏 만질 수 있는 거. 덕규 선배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다 저를 발견했어요. 처음엔 덕규 선배도 많이 놀랐지만 이젠 익숙하게 말도 걸어줘요.
“들어 올래? 안에 있어.”
“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래. 늦지 않게 가라고 할게.”
“…고마워요.”
이건 진심이예요. 그 애 옆에 덕규 선배 같은 좋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예요. 덕규 선배는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어서 그 애를 많이 걱정해주거든요. 이렇게 꼬박꼬박 불러내서 술 상대를 해주는 것만 봐도요.
술자리는 예상보다 길어졌어요. 한참이 지나서야 술에 잔뜩 취한 그 애가 가게 밖으로 나왔어요. 술이 올라 기분이 좋은 지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고 있었어요. 덕규 선배에게 인사를 한 그 애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술 냄새. 얼마나 마신거야. 취기가 올라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 애가 저를 봤어요.
“고양이네. 까만 고양이. 이름이 뭐야?”
“키키야. 여기 자주 나타나는 길고양이.”
“키키? 이름 귀엽다.”
그 애는 고양이가 아니라 제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투박하고 큰 손이 제 머리를 헤집어요. 그 애가 말한 고양이가 저였나 봐요. 그 애를 흘겨봤어요. 뭐가 좋은 지 아직도 실실 웃으면서 키키야, 키키야, 불러댔어요.
“난 고양이가 아니야.”
“고양이 같은데. 털도 이렇게 까맣고. 생긴 것도 고양이 같고.”
“난 고양이가 아니라 서태웅.”
“그래, 키키야. 키키는 늦었는데 집에 안 가고 뭐해.”
이 애는 저를 제 이름으로 불러줄 생각이 없나봐요. 한 숨을 푹 내쉬고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줬어요. 어쩐지 제가 길고양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갈 곳 없는 길고양이. 그래서 고양이들이 날 좋아하나? 어디도 속한 곳이 없는 같은 처지라서.
“…갈 데가 없어.”
“왜?”
“진짜 길고양이인가 보지.”
그 애는 주머니를 뒤적대더니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어요. 언제부터 였더라. 아마 성인이 된 이후로 그 애는 담배를 피기 시작한 것 같았어요. 농구를 두더니 몸에 나쁜 짓만 하고. 불을 붙이려는 그 애의 손을 막았어요.
“담배 피지마. 고양이 있잖아.”
“아, 미안.”
“건강에도 안 좋아.”
“응, 미안. 키키야.”
그 애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갸르릉 대는 고양이를 가만히 쳐다봤어요. 그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저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키키야, 우리 집 갈래?”
“…”
“술 취하니까 갑자기 냥줍하고 싶어졌어. 나랑 같이 가자.”
그 애는 아주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어요. 그 애를 바라보다 왠지 그 눈을 보기가 싫어서 고개를 돌렸어요. 저는 그 얼굴을 좋아했거든요.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햇살을 닮은 환한 웃음. 아직도 그 애를 좋아하는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애가 본 내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 애도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까요? 괜히 고양이의 코를 톡톡 치다가 할퀴는 손톱을 피하지 못했어요. 아야, 손을 떼어내니 고양이가 골목으로 사라졌어요.
“안 가는 거야? 아쉽네…”
신발코로 땅을 툭툭 치던 그 애도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요. 위태하게 걸어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요. 조용히 그 애를 뒤따라 걸어요. 밤바다의 바람이 살랑거렸어요. 돌부리에 걸려 휘청대는 걸 잡아주고 나서야 그 애는 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뭐가 좋은 지 베시시 웃어요.
“키키야, 우리 집 갈 거야? 나 간택 받았다….”
“키키 아니고 서태웅.”
“응, 키키야~”
“…멍청이.”
그 애는 얼마 전에 이사를 한 것 같아요. 작년까지는 서울에 살았는데… 어쩐지 걸어서 가더니, 고등학생 때 살았던 자취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어요. 십년 전과 비슷한 위치, 그때와 비슷하게 단정하게 정리된 방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농구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었어요. 그 애의 인생에 농구는 없었던 것처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삼 깨달을 때마다 기분이 저 아래까지 처박는 것 같았어요. 그 애는 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볼을 붙자고 주물 대며 바보같이 웃음을 흘렸어요.
“키키는 뭐 좋아해? 고양이는 우유 좋아하나?”
“…몰라.”
“우리 귀한 손님 대접을 해야 되는데-”
“…너 키컸어?”
“난 원래 컸어, 키키야.”
“…미워.”
어쩐지 그 애의 눈높이가 예전보다 높아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다 미웠어요. 농구를 그만 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그 애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날 기억도 못하면서 보내주지 못하는 것도 다요. 미워 하지마, 난 네가 좋단 말이야. 그 애는 큰 덩치를 구겨 저에게 안겨요. 베시시 웃으며 절 올려다보는 그 애를 밀어내요. 빨리 씻어. 술 냄새 나니까. 간신히 그 애를 욕실에 밀어 넣고 침대에 털썩 누웠어요. …좋으면 왜 그랬어.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날 밤은 잠에 들지 못했어요. 사실 잘 필요도 없긴 하지만, 밤새도록 뜬 눈으로 잠든 그 애의 얼굴을 보고 있었거든요.
**
밤새 한숨도 못 자서 아침이나 차릴까 싶어 냉장고를 뒤지는 소리에 그 애가 깼어요. 까치집이 된 머리를 아무렇게 헝클어뜨리며 그 애는 얼빠진 표정으로 저를 봤어요. 역시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어제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 어떻게 왔어? 미안, 나 기억이 하나도 안나.”
“네가 데려 왔잖아.”
“와… 나 이제 사람도 주워 오네.”
“멍청이.”
“그래서… 그… 넌 누구야?”
“서태웅.”
“아… 그래 그 통성명 중요하지… 난 윤대협이야.”
“알아.”
그렇구나… 그 애는 어느새 다가와서 제가 아침을 차리는 걸 구경했어요. 도울 게 없나 기웃거리다 그냥 식탁에 앞에 앉은 그 애는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어요. 어려 보이는데 학교는 안가? 안가도 돼. 생각보다 나이가 많나… 집은 어딘데? 출근할 때 데려다 줄까? 집 없어. 가출? 그래도 집은 가야지. 일주일 후면 돌아갈 거야. 뭐… 사연이 있나 보네. 그러더니 저를 향해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요.
“뭐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돌아가기로 약속. 집에서 걱정하실 거야.”
손가락을 내미는 그 애를 빤히 바라봤어요. 약속하지 않아도 나는 사라질 텐데… 그 애는 어서 손가락을 걸라는 듯 손을 내밀었어요. 저도 새끼손가락을 걸어줬더니 엄지로 도장을 찍고 손바닥에 사인까지 하고 나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어요. 예나 지금이나 유치한 건 똑같다니까요.
“…근데 내가 우렁각시를 데려왔나?”
그 애는 놀란 표정을 했어요. 애초에 냉장고에 뭐가 별로 없어서 간단하게 계란국이나 끓이고 밑반찬을 좀 냈을 뿐인데 말이예요. 고등학생 때도 이 정도는 요리는 종종 같이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잘 안 하나 봐요. 냉장고 안에 음식의 흔적은 없고 술만 많았거든요.
“아침 먹고 다녀.”
“너는 모르겠지만 직장인은 아침이 고달프단다…”
“그래도. 냉장고도 텅텅 비었어. 술만 마시지 말고.”
“나 각시 데려온 거 맞네… 퇴근하고 같이 장보러 갈까 각시야?”
어제는 고양이라고 부르더니… 이상한 호칭으로만 부르는 그 애를 째려봤어요. 자라나는 청소년을 굶길 수는 없잖아. 청소년이 아닌가? 아무튼. 잘 먹어야 쑥쑥 크지. 그러면서 제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요. 저를 애 취급하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자기도 딱히 더 어른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괜히 시선을 돌리다 시계를 봤더니 어느새 8시였어요. 넌 언제 출근 하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헐레벌떡 그릇을 치우고 출근 준비를 해요. 이거 봐요. 그 애도 아직 어른스럽진 않은데 저만 애 취급이예요. 현관을 나서는 그 애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저에게 소리쳐요.
“각시야, 6시 반까지 꼭 사거리 앞 마트에 나와야 돼!”
여기가 맞나. 사거리 앞 마트에 서있었더니 멀리서 뛰어오는 그 애가 보여요. 열심히도 일을 한 건지 급하게 오느라 망가진 건지 머리와 셔츠 차림이 흐트러져 있었어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 애는 자연스럽게 제 어깨에 손을 두르고 마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익숙하게 그 애가 좋아하는 걸 골랐어요. 은근 채소는 싫어하니까 생으로 먹는 샐러드보다는 요리에 넣을 것들 위주로, 술안주로 두부도 곧잘 먹었으니까 두부도, 흰 우유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여기 건 곧잘 마셨던 것 같고… 그 애는 알아서 쌓여가는 장바구니를 보며 잠자코 저를 따라다녔어요. 아이스크림 코너를 지나가다 우유 맛 아이스크림이 보였어요. 음… 더우니까 몇 개 넣을까. 이거 좋아했나. 고민하는 사이에 그 애가 냉동고 문을 열어 몇 개를 집어 넣었어요.
“너도 이거 좋아해? 역시 고양이라는 우유를 좋아하나…”
“너도 좋아해?”
“응. 심심한 맛인데 이상하게 계속 생각나.”
원래 그 애는 우유 맛 아이스크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그 애 입맛에는 심심해서 과일 맛을 좋아했거든요. 우유 맛은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가 자주 먹었죠.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변한 건가. 기억이 좀 떠오르는 건가. 그냥 별 건 아닌데, 우유 맛 아이스크림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거든요. 제가 살아있을 때 일인데… 진짜로, 진짜로 별 건 아니예요. 별 건 아닌데 혹시나 어렴풋하게 생각이 나나?
우리는 원온원을 자주 했어요. 연습이 끝나면 항상 만나는 농구 코트에서 원온원을 하고 더 이상 못하겠다 싶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어요. 마지막 판을 제가 이겨서 그 애가 아이스크림을 사오기로 했어요. 그 애에 입에 물려 있는 건 제가 항상 먹던 우유 맛 아이스크림이었어요. 그 날은 아주 더워서 많이 지쳤어요.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어요.
[이것도 맛있네. 왜 이런 걸 먹는지 몰랐는데.]
[맛있다니까. 안 달고.]
[응. 그러게.]
입이 큰 그 애는 항상 저보다 뭐든 빨리 먹었어요. 그 애의 손엔 이미 빈 막대기만 쥐어져 있었어요. 저는 입이 작은 편이라 먹는 게 느려요. 더운 날씨 때문에 어느새 제가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었어요. 갑자기 제 손을 잡은 그 애가 남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어요. 그 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쳐다봤더니 눈이 마주쳤어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어요. 그러더니 순식간에 그 애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았어요. 방금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어서 조금 차가운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제 입술에 다른 몰캉한 게 닿았을 때 번뜩 놀라 그 애를 밀어 냈어요. 제가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은 어느새 땅에 떨어져 다 녹아 형체를 잃었어요.
[미안, 실수야. 잊어버려.]
그 애는 황급히 자리를 떴어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어요. 제가 그 애와 한 게 뭔 지 알아차렸을 땐 목 뒤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어요. 그건 제 첫 키스였어요. 아직도 감각이 남은 것만 같아서 입술을 만져봤어요. 아이스크림의 달짝지근한 맛이 입술 끝에 맴도는 것 같았어요.
정말 별 거 아니죠? 갑자기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서 입술을 축였어요.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하는 그 애를 따라갔어요. 계산을 마치고 나왔는데도 아직 바깥은 완전히 깜깜해지지 않았어요. 해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는 걸 보니 여름이 맞나 봐요. 우리는 양손에 짐을 하나씩 들고 집을 향해 나란히 걸었어요.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음… 카레.”
“카레? 그래. 내가 해줄게.”
“….그래.”
“그런데 각시야, 나 없는 동안 뭐했어?”
“그냥 뭐… 집에 있다가 농구하고…”
“아.. 농구했구나…”
농구 이야기가 나오자 그 애는 말이 없어졌어요. 십 년 내내 그 애는 농구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돌렸어요. 그래서 왜 농구를 그만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그 애의 침묵을 깨고 이번에는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어요.
“…넌 농구는 안 해?”
“음… 못하는 거야.”
“못하는 게 어딨어.”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어, 각시야-.”
그 애는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저벅저벅 걸어갔어요. 그 뒷모습이 왠지 너무 미워져서 성큼성큼 그 애를 지나쳐서 빠른 걸음으로 먼저 가버렸어요. 뭐가 어른이란 걸까요? 그 애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도 기억 못하면서. 어느새 그 애는 뛰어와 제 팔을 붙잡았어요.
“미안해, 내가 뭐 화나게 했어?”
[미안해, 태웅아. 화났어?]
그 애가 하는 말에서 코트에서 한참이나 그 애를 기다렸던 날 허리를 낮춰서 저에게 했던 말이 겹쳐 들렸어요.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는데, 약속까지 했으면서 늦는 게 너무 화가 났는데, 그럼 그냥 가버리면 끝인 걸 한참이나 그 애를 기다렸어요. 그 애의 얼굴을 보고 제가 왜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깨달아 버렸어요. 좋아하니까. 보고싶었던 거였어요. 그때도 지금도 제가 화가 난 이유는 그 애를 좋아해서인 걸까요. 앞으로 남은 일주일이 괴로울 것만 같아요. 저를 흔들고 다시 또 잊어버릴 제 앞의 사람 때문에요.
그 애가 사는 집은 바다와 멀지 않아요. 우리는 저녁을 먹고 매일 바다로 산책을 나갔어요. 그 애는 바다를 좋아했어요. 돌아가는 길이더라도 그 애는 꼭 바다를 따라 걸었어요. 서울이 집이면서 여기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유도 바다 때문이라고 했어요. 바다가 보이는 학교에 다니는 게 낭만이 있지 않냐고. 스카우트 제안이 와서 능남고에 왔을 때 해안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좋아서 제안을 받아들였대요. 지금도 이 곳이 그 애의 직장과 그리 가까운 것 같지는 않은데도 다시 온 걸 보면 바다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라서 사실 바다가 특별히 좋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제 일상 같은 거였어요. 그런데 그 애와 같이 있으면서 그 애의 눈으로 바다를 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 그래서 이 곳을 좋아하나, 조금은 그 애의 감정을 느껴요. 가만히 앉아서 낚시를 하며 바라보는 바다는 좀… 지겨워서 졸렸는데 편안하게 느껴 지기도 해요. 매일 이어폰을 끼고 자전거를 타고 오던 길을 파도소리때문에 희미하게 들리는 그 애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걸어갈 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요. 언젠가 한 번은 자전거를 두고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서 오느라 늦었던 적이 있어요. 그 애가 하던 것처럼요.
[태웅아, 오늘은 네가 늦었네?]
[…걸어서 오느라.]
[내가 하는 대로 해본 거야?]
[응, 이어폰도 빼고.]
[어땠어?]
[…파도소리가 너무 컸어.]
[하하하! 아직 어리네 태웅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어딘가 허전하다고 느꼈어요. 그냥 그 애가 바다를 보는 시선이 좋았던 걸지도 몰라요. 지금 여전히 그 애는 바다를 사랑하고 나에게 그 애의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해요. 저는 사실 그 애를 보고 있었지만.
밤 산책 코스의 끝은 맥주 한 캔과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편의점 의자에 앉아 쉬는 거예요. 당연히 맥주는 그 애의 것, 아이스크림은 제 것이예요. 맥주가 맛있나. 가끔씩 빼앗아 한 모금 마셔봤는데 딱히 맛이 있지는 않았어요. 술은 왜 마시는 거지. 여전히 아이인 나는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태웅아, 넌 언제 어른 될래?”
“몰라.”
“빨리 커서 내 술친구 해주라.”
“너 고등학교 선배 있다며.”
“그래도. 난 너랑 마시고 싶어.”
“왜?”
“귀엽잖아. 난 네가 좋다니까.”
“술 취했어?”
“아니. 완전 정상.”
술에 취한 건 아닌데 실없는 말을 해요. 제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여느 평범한 동네 친구처럼 술 한잔 하는 친구가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겠죠. 제가 살아있을 때 마지막 기억은… 다시는 보지 말자고 말한 거였으니까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게 우리의 최선일지도 몰라요.
“응? 어른 되면 나랑 제일 먼저 마시자.”
“…”
“대답을 안 하네… 아저씨는 싫나…”
“그런 게 아냐.”
그럼 뭔데에, 그 애가 말꼬리를 늘이며 턱을 괴고 바라봐요.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그 애의 시선이 느껴지는데도 바라보지 못했어요. 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재떨이에 대충 버리고 일어나요. 아저씨라고 무시한다. 너무하다 너무해. 그 애가 툴툴대는 걸 잠자코 들었어요. 나도 그러고 싶어. 이건 거짓말이 아냐. 속으로 말을 삼키고 그 애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그래, 가자-. 우리 각시 먹여 살리려면 내일도 출근해야지!”
내 손을 잡고 일어난 그 애는 앞뒤로 손을 흔들어 댔어요. 더운 공기 때문에 손바닥에 땀이 베어 나와도 그 애는 내 손을 잡고 집까지 걸었어요. 그 애가 좋아하는 바다를 따라서요.
**
오늘은 제 맘대로 그 애를 농구코트로 끌고 갔어요. 코트에 도착한 그 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어요. 멍청한 얼굴을 하긴. 그 애는 그저 코트 가장자리에 앉아 제가 슛을 넣는 걸 보고만 있었어요. 그 애는 코트 위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그 애를 중심으로 플레이가 흘러갈 정도로 주목받는 선수였죠. 경쟁자였지만 언젠가는 그 애를 닮고 싶었어요. 아마 제가 어른이 되어서도 농구를 하고 있었다면 그 애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처럼 멍청한 모습은 싫어요.
“태웅아, 너 진짜 잘한다.”
코트 한 구석에 앉아서 박수나 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애에게 공을 던졌어요. 공을 잡은 그 애는 볼을 긁적이며 얼빠진 표정을 했어요.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질 않아서 그 애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 일으켰어요. 마지못해 일어난 그 애는 공을 들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어요.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으니까 공을 두어번 튕기다 공을 림을 향해 던져요.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슛폼은 엉망이었어요. 당연히 공은 림 근처에도 닿지 않았죠.
“이거 봐. 나 농구 못한다니까.”
“가르쳐 줄게. 한 번도 안해보진 않았을 거 아냐.”
“태웅아, 나 고등학생 때 선수였어.”
“그럼 뭐가 문제야?”
“정말… 못하는 거야.”
바지 주머니 안으로 황급히 숨기는 그 애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어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그 애의 모습은 처음보는 것이었죠. 저는 가까이 다가가 그 애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감쌌어요. 예전에는 굳은살이 박혀 손이 많이 거칠었는데 이제는 부드러워진 손을 주물렀어요. 그 애는 멋쩍은 웃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감추려고 해요.
“웃기지. 공 좀 가지고 노는 게 뭐가 무섭다고.”
“…무서워?”
“응. 그냥… 좀.”
“왜, 그냥 공이잖아.”
그 애는 겹쳐진 우리의 손을 바라봐요. 무언가 할 말이 그 애의 입을 간질이는 것 같았어요. 벌어진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어요. 10년이나 지났는데 이제는 괜찮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걸까요. 제가 그 애의 농구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애가 좋아하는 걸 잃지 않기를 바랬어요. 그 애는 손인지 바닥인지 모를 곳에 눈을 두고 입을 열었어요.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내 맘대로 몸이 움직이질 않는 거야. 공만 잡으면. 나 나름 주장이었는데, 주장이라는 애가 그러고 있으니까 사람들 반응도 무섭고… 그러니까 더 내 맘대로 되질 않는 거야.”
“…바보 같아.”
“바보 같지. 진짜 기본적인 드리블도 못해.”
그 애는 웃음으로 아무 일도 아닌 척해요. 아무 일도 아니면 지금까지도 못할 리가 없는데. 그 애는 나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농구도 잊어버린 거였어요. 그래도 그건 잊지 않길 바랬는데. 좋아하는 걸 잃어버리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잊어버리는 건 저 하나면 될텐데… 그 애의 손을 힘주어 잡아요.
“그래도 가르쳐 줄게. 처음부터.”
그 애는 어느새 떨림이 잦아든 손으로 제 손을 꼬옥 쥐었다 놓아줬어요. 그리고 그 애의 시선은 저를 향해요.
“그런데 태웅아.”
“응.”
“왜 내가 농구를 했으면 좋겠어?”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알아.”
그 애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어요. 어쩐지 그 애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예전엔 그래도 키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조금 더 커버린 그 애는 제 품에 다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천천히 그 애의 팔을 끌어당겨 안았어요. 안으니까 더 확실했어요. 키가 더 컸구나. 제가 안긴 것 같은 꼴이 됐거든요. 그 애도 제 머리를 끌어안아요. 뒷머리를 쓰다듬는 그 애의 손길을 느껴요.
“태웅아, 너는 왜 이렇게 나를 잘 아는 거야?”
“…”
“너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다 아는 것 같아.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그 애의 옷깃을 꼭 붙잡았어요. 아주 오랜 시간동안 누군가를 좋아하면 사소한 것까지 다 알 수밖에 없다고. 아까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입술이 달싹거려요. 턱 밑까지 말이 차올랐는데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어요. 그저 그 애의 어깨에 더 깊이 얼굴을 묻을 뿐이었어요. 서늘한 바람에 흘린 땀이 식어서 여름인데도 어쩐지 조금 추웠어요.
**
이제 이틀 정도 남았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도 같이 저녁을 먹고 나란히 걸으며 예전처럼 하루의 일상을 나눠요. 최근에 승진을 해서 일이 좀 바빠졌고, 다음달에는 장기로 출장을 갈 예정이고, 팀원이 곧 아기를 낳아서 그 애한테 키가 크려면 아기한테 뭘 해줘야 하냐고 물어봤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넌 왜 여기로 이사 왔어? 일하는 데랑 멀다며.”
“음… 바다가 좋고 또…”
“…또?”
“그냥 왠지 여기로 돌아와야 할 것 같았어.”
“왜?”
“이유는 몰라. 뭔가 찾을 게 있는 것처럼… 계속 여기 생각이 났어.”
그 애는 가만히 파도가 치는 걸 바라보다 저를 바라봤어요. 그 애를 보고있던 게 들켰을까요? 그럴지도 몰라요. 그 애는 말없이 저를 바라봐요. 바다를 보는 것처럼 그 애의 시선엔 의도가 보이지 않았어요. 한동안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다 그 애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태웅아.”
“응.”
“넌 네 이야기를 별로 안 하네.”
“별로 할 게 없어.”
“태웅아.”
“왜.”
“넌 누구야?”
“서태웅.”
“그런 거 말고, 음… 몇 살이고, 지금은 뭘 하고, 집은 어디고… 그런 거 있잖아.”
“…”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우리 일주일 동거 중이잖아."
그 애는 날 똑바로 쳐다봤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걸까요. 네가 답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저는 그 애가 만들어낸 존재일 뿐인데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음… 질문을 바꿔볼까. 그럼 왜 날 따라왔어? 모르는 사람이잖아.”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만난적이 있었나… 난 생각이 안나.”
“…멍청이.”
"진짜 만난 적 있어?"
"..."
"또 말 안하지, 서태웅."
넌 너무 어려워. 난 널 더 알고 싶은데. 왜 내가 궁금해? 라는 질문이 맴돌아요. 하지만 혹시라도 제 생각과 다를까봐 무서웠어요. 제 마음은 들켜도 상관없었어요. 몇 번이고 잊어버릴 때마다 말해준 거니까. 하지만 거절 당하는 건 아직도 두려워요. 고백할 때마다 사실 긍정의 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은 다르지 않을까 항상 기대를 했어요. 기대한만큼 실망도 크다는 걸 알게된 후로는 두려움이 커졌어요.
그 애가 큰 손으로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제 머리칼을 정리해줘요. 그 애의 눈은 다정해서 또 기대하게 될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해요. 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어느새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다 저를 끌어당겨요. 어느새 그 애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우리의 거리가 좁혀졌어요. 그 애의 눈에 저만 온전히 담겨있는 걸 봤을 때 이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는 걸 직감했어요. 이번에는 무슨 엔딩을 맞든 저는 그 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저에게는 그 애를 사랑하는 선택지만 있으니까요.
눈을 감으면 그 애의 온기가 느껴져요. 닿은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이 느껴져요. 그 애는 우리가 첫 키스를 했을 때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다가와요. 저는 허락을 하듯 그 애의 옷깃을 붙잡아요. 더 깊이 절 끌어당기는 그 애는 방금 전과 다르게 조금이라도 더 저와 가까워지려는 듯 깊숙한 곳까지 닿아와요. 숨이 모자라 밀어내려 하면 그 애는 틈을 주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왔어요. 오랜 입맞춤 끝에 우리는 한참을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봤어요.
집에 가는 길도 적막했어요. 파도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채웠어요. 그렇게 가까이 닿았는데도 우리는 손 끝도 닿지 않은 채로 길을 걸었어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 끝이 스칠 듯 스치지 않는 거리를 유지했어요. 목욕을 하고, 하루를 정리하고, 잠에 들기 위해서 침대에 눕는 그 순간까지 그 애와의 입맞춤이 머리 속을 둥둥 떠다녀요. 처음도 아닌데 고장 난 것처럼 제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어요.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데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 애도 그런 건지 누워있다 말고 일어나 테라스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잠시 후 돌아온 그 애에게 약한 담배 냄새가 났어요. 돌아와서도 한참 뒤척이던 그 애가 적막을 깨고 말했어요.
“태웅아, 자?”
“…아니.”
“잠이 안 와?”
“…응.”
“나도.”
잠에 들려고 억지로 감았던 눈을 떴어요. 몸을 돌려 그 애를 보도록 누웠어요. 그 애는 한 손을 이마에 얹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어요. 그 애도 아까 했던 입맞춤이 계속 신경 쓰이는 것 같았어요.
“태웅아, 내가 왜 이럴까.”
“…”
“안 하던 짓이나 하고… 나 원래 집에 사람들이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런데 널 술 취해서 데려오고…”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요. 예전에도 원온원이 끝나면 그 애가 자취하던 방에 종종 가서 씻고 쉬다가 집에 갔으니까요. 그 애는 머릿속에 있는 말을 정리도 하지 못하고 꺼내는 것 같았어요. 이사 오고 제가 첫 손님이고 장기 투숙객은 처음이라서 잘 해주고 싶었다, 그런 빙빙 돌아 핵심은 피하는 말만 했어요. 저는 참지 못하고 늘어지는 그 애의 말을 끊었어요.
“…나랑 키스한 게 신경 쓰여?”
“…”
“난… 신경 쓰여. 많이.”
“태웅아, 난 네가 좋은데…”
“…”
“그냥 좋은 형, 동생이었으면 좋겠어. 이상하잖아, 이런 거… 우리 잘 모르는 사이고… 그리고 너 같은 애가 왜 나 같은 아저씨를 따라다녀.”
그렇구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10년째 같았어요. 알고 있는데도 분한 마음이 들어요. 10년이나 기대를 하고, 또 실망을 하고. 그래도, 그래도 이번만큼은 다를 줄 알았어요. 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럴 것만 같았어요. 바보, 윤대협. 그 애가 너무 미워요. 단 한 번도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그 애가…
“왜 울어… 아저씨 미안해지게.”
언제 흐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그 애의 손을 쳐내고 일어났어요. 단 한순간도 그 애를 보기가 싫었어요. 널 좋아하는 게 무슨 죄라고… 현관으로 향하는 저를 그 애의 손이 붙잡았어요.
“태웅아, 내일 가. 응?”
“싫어. 갈래.”
“오늘 너무 늦었어.”
“보기 싫어. 너 같은 거…”
그 애는 더 이상 저를 붙잡지 못했어요. 있는 힘껏 그 애를 노려보다 문 밖을 나섰어요. 갈 곳이 없지만… 지금 당장은 그 애가 정말로 보기 싫었어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어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심호흡을 해도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어요. 아직은 좀 서늘한 새벽의 공기가 볼을 스치는데도 무거운 것에 눌린 것 같이 가슴이 갑갑해요.
무작정 뛰기 시작했어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심장이 빨리 뛰면 답답한 마음이 가실까봐요. 물론 멀리 가진 못했지만, 그 애와 일주일을 함께 한 바닷가를 따라 한참을 뛰다가 모래사장 아무 곳에나 누웠어요. 숨이 차 더 이상은 뛰지 못하겠다 싶었을 때였어요. 가쁜 숨을 내쉬는데 머릿속이 비워 지기는 커녕 그 애 생각으로 가득차요. 여기 앞 카페에서 바다를 보면 이야기를 하던 일, 장난을 치다 둘 다 옷을 적셨던 일, 그 애와 키스를… 했던 일까지. 그 애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에서 그 애를 잊어보려는 게 바보 같은 일이었던 거죠.
지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깼을 땐 해가 뜨고 있었어요. 푸르스름한 하늘이 붉게 물드는 걸 쳐다봤어요.
이제 그 애가 저를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한 번의 해가 더 뜨면 다시 또 모든 걸 잊어버리겠죠. 아니, 사실 그 애는 10년 동안 저를 잊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직도 제가 그 애 곁을 맴도는 거겠죠. 이제는 모든 걸 잊어줬으면 좋겠어요. 10년이나 저를 그리워하는 건 그 애에겐 힘든 일이잖아요. 저를 그리워하면서도 제 기억을 지워버리는 건, 아직도 그 날 있었던 일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걸 텐데.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그냥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 애가 슬퍼하는 게 싫어요.
저는 원래 윈터컵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미국에 가기로 했어요. 미국에 가기로 최종적으로 결정됐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그 애였어요. 그 애를 1년 가까이 좋아하면서 제 마음을 전한 적은 없었어요. 그 때 말하지 않으면 어쩌면 영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도 없이 그 애의 집을 찾아갔어요.
[…헤이.]
[태웅아, 말도 없이 무슨 일이야?]
[나 미국 가게 됐어.]
[…그렇구나. 축하해. 언제 가는데?]
[아마 내년 초.]
[생각보다 빠르네… 얼마 안 남았다.]
태웅이는 잘 하겠지, 라며 제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그 애의 커다란 몸을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어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말을 꺼내야 하는데 온 몸이 떨렸어요. 갈 곳 잃은 그 애의 손에서 그 애의 대답을 아마도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이미 너무 늦었을 지도 몰라요. 그래도 기대하고 있었어요. 저와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할 때, 앉아서 졸고 있으면 어느 새 곁에 와서 어깨를 내어주고 있을 때, 가끔 부딪혀 넘어졌다 일어나면 그 애의 귀 끝이 붉어져 있을 때, 그럴 때 그 애도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우리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이라고.
[윤대협.]
[…응.]
[좋아해.]
[…]
[이 말 하려고 왔어.]
할 말을 쏟아내고 왠지 무서워져서 그대로 뒤돌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애에게 손목이 잡혀서 돌아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 애의 표정은 어쩐지 화가나 보여서 그 애의 말을 듣기가 싫었어요.
[…대답 바라고 온 거 아니…]
[서태웅. 내 말 들어.]
[…하지마.]
[우리 그냥… 친구 같은 거잖아.]
그 애를 노려봤어요. 제 손목을 붙잡은 손이 떨리는 게 느껴지는데도 뻔히 보일 거짓말을 했어요. 그 때의 저는 그 애가 왜 굳이 그렇게 절 밀어내야 했는지 이해할 생각도 못해서, 거르지도 않은 말을 쏟아냈어요.
[겁쟁이. 멍청이.]
[태웅아, 달라지는 건 없어.]
[…네가 피하지 말랬잖아.]
[…그건]
[…다신 보지말자.]
그렇게 돌아섰던 게 제 마지막 기억이예요. 급하게 쫓아온 그 애의 모습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고… 이제서야 생각해보니 그 애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기도 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거죠. 한국에 혼자 남아있을 그 애 생각도 못하고. 조금만 더 일찍 말했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요. 아니, 제가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저를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결혼을 하고, 그 애를 닮은 아이를 품에 안고.
어느새 날이 밝아 눈이 부셨어요. 그 애는 오늘 잠을 자긴 했을까요. 제가 너무 제멋대로라서 그 애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그 애가 행복하길 바래요. 그런데 제 욕심이 다 망친 게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그 애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싶은 제가 한심해요.
생각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그 애와 함께 했던 곳이예요. 그 애와 항상 원온원을 했던 코트에서 공을 던지지도 못하고 골포스트를 바라보기만 해요. 나는 어떡하고 싶을 걸까요. 이대로 그냥 이상했던 인연으로 잊혀지고 싶은데, 그 애는 괜찮은 지 궁금해서 그 애를 찾아가고 싶어요. 제 마음을 정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요. 아, 이제 장마라고 했지. 그늘막 아래로 급하게 뛰어들어가 비가 내리는 걸 봤어요. 저는 추위를 많이 타서 비가 오니 으슬으슬 몸이 떨렸어요. 제가 추워할 때면 그 애는 자기 저지를 벗어줬어요. 그 애의 이름이 박힌 저지를 제 것인 것 마냥 입고 다닐 때도 많았죠. 그냥 그 애의 사소한 다정함을 좋아했어요. 불쑥 찾아와서 원온원을 해달라는 걸 거절하지 않은 것부터 그 애는 다정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손을 내밀어 쏟아지는 비를 맞다 비 속을 뛰어가기 시작했어요. 제가 향한 곳은 당연히 그 애의 집이었어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비에 금방 온 몸이 젖어버렸지만 두 발을 멈추지 못했어요. 그 애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길 건너편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어요. 저를 향해 뛰어오는 사람은 역시나 그 애였어요. 언제부터 나와있던 건지 비를 맞아 축 처진 머리칼과 가쁘게 내쉬는 숨.
“다… 젖었잖아.”
“…”
“빨리 집에 가자. 감기 걸려.”
제 손을 잡아 끄는 그 애의 손도 드물게 차갑고 축축했어요. 얼마나 저를 찾아다녔던 걸까요. 그 애의 차가운 손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한 느낌이었어요. 그 애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물 온도를 확인해줬어요. 적당한 물 온도에 찬 기운을 씻어 내리고 나오니 갈아입을 옷이 욕실 문 앞에 놓여있었어요. 편하지도 않은 자세로 소파에 기대 졸고 있던 그 애는 문 소리에 깨서 졸린 눈을 비비며 드라이기를 꺼내 왔어요. 잠을 못 잔 건지 그 애는 많이 피곤해 보였어요. 머리를 말리는 그 애의 손길에 눈이 감길 것 같은 걸 억지로 뜨고 있었어요. 그 애도 연신 하품을 하며 느리게 제 머리칼의 물기를 털어냈어요.
“…태웅아.”
“응.”
“미안해.”
“…그 말은 듣기 싫은데.”
“미안.”
저에게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이제는 다 괜찮으니까… 그 애의 허벅다리 안쪽에 기대어 괜찮다며 다리를 톡톡 쳤어요. 내일이면… 당분간 또 못 보겠네요. 그래서 다 괜찮아졌나. 잠 때문에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 중얼대듯이 말했어요.
“…내일 갈 데 있어. 같이 가줘.”
“어딘데?”
“가보면 알아.”
드라이기의 전원이 꺼졌을 땐 그 애의 다리에 기대 잠이 든 것 같았어요. 깼을 땐 그 애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거든요. 그 애는 저를 재우고 소파에서 잔 것 같았어요. 더워서 아무렇게 걷어찬 담요를 제대로 덮어주고 바닥에 털썩 앉았어요. 오늘은 다행인지 아닌지 해가 쨍쨍한 게 날씨가 좋았어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졸고 있었더니 제 머리에 느껴지는 손길에 눈을 떴어요.
“잘 잤어?”
“응. 그런데 넌 왜 여기서 잤어?”
“너 편하게 자라구…”
“네가 불편해서 그런 거 아니고?”
“아픈데 찌르지 마, 태웅아…”
“일어나. 이제 가야 돼.”
“…응.”
우리는 준비를 마치고 그 애의 차를 타고 제가 있는 곳으로 가요. 예전엔 길도 좀 잃었는데 이제는 몇 번 와봤다고 길도 잘 찾았어요. 그 애에겐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서 계속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어요. 저는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지만요.
“다 왔어.”
“태웅아, 여기는 왜…?”
“따라와.”
그 애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 저를 따라왔어요. 어디더라… 계단 올라가서 두번째 벽 오른쪽. 익숙하게 길을 찾는 저를 따라 잠자코 따라온 그 애는 제가 담긴 작은 칸 앞에 섰어요. 누가 다녀왔다 간 건지 꽃이 한송이 놓여 있었어요. 하얀 사기그릇 위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 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애를 돌아보지 않았어요. 제 이름이 그 애의 큰 손으로 가려져요. 유리에 비친 그 애는 나를 보고 있었어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그 애의 손이 제 볼에 닿았을 때 고래를 돌려 그 애를 바라봤어요. 그 애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어요. 눈물이 그렁거리다 한 방울 톡 떨어졌어요. 저는 엄지로 그 애의 눈물을 닦아줬어요.
“…태웅아.”
“…이제 기억나?”
“…응.”
“또 잊어버릴 거야?”
“기억하면… 어떻게 되는데?”
“나도 몰라. 난… 네가 만들어낸 거니까.”
그 애는 눈가를 훔치는 제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작게 입을 맞춰요. 소중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제 손을 어루만지다가 절 바라봐요.
“넌 그 동안 혼자서 다 기억하고 있었겠네…”
“응,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럼 나 열 번이나 너 찬 거야?”
“…응.”
“나쁘다 나…”
첫번째, 기일 일주일 전부터 기일까지 모든 사람에게 내 모습이 보임.
두번째, 윤대협은 내가 죽은 것을 모름. 기억이 없으니까.
세번째, 윤대협을 제외하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음. (덕규 선배는 나를 알아봄. 웬만하면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것.)
네번째, 기일이 되면 잠깐 윤대협의 기억이 돌아옴.
다섯째, 기일이 지나면 내 모습도 보이지 않고 윤대협도 나를 잊어버림.
그 애는 절 끌어안고 제 어깨에 얼굴을 묻었어요. 들썩대는 그 애의 몸을 보고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애의 머리를 토닥이면서 괜찮다고, 이젠 다 괜찮다고 말해줬어요. 그 애는 제 품 안에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어요. 매년 이 순간이 되면 마음이 아파요. 항상 강해 보이던 그 애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젠 정말 괜찮은데. 평소의 그 애처럼 밝고 당당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는데.
“맨날 우네 넌. 어른이 돼서도…”
“옛날에도 많이 울었어?”
“응… 몇 년 전만해도 너 차도 없는데 저렇게 울어서 어떻게 집에 돌아가나 했어.”
“차 사지 말 걸 그랬다, 태웅아.”
“…왜?”
“그럼 너랑 더 오래 있었을 텐데…”
“…”
“가지마, 태웅아…”
그 애의 두 볼을 감싸 쥐고 바라봤어요.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으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요.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그 때도… 넌 날 좋아했어?”
“응, 당연하지. 그때도… 지금도… 많이.”
“…그럼 됐어.”
이제 정말로 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와요. 그 애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할까요. 다시 또 나를 잊어버릴까요.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만 같아요. 제 희망일 뿐일지라도… 그냥 느낌이 그래요. 이번에는 정말 영원한 이별일지도 몰라요. 그 애에게 마지막으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요. 그 애는 다시 저를 끌어당겨 깊은 입맞춤을 하고 점점 희미해지는 저를 붙잡아 보려 해요.
“사랑해…태웅아.”
나도 사랑해.
이제는 그 애가 더 이상 잔인한 여름 안에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편지도 이 문장이 마지막이길.
20xx년 7월 11일
서태웅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