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가마쿠라 현의 바다는

 ㄹ(@ririleul)

  그해 여름은 이상토록 더웠다. 얼음이 가득 찬 플라스틱 컵에 몇 모금 들어있는 과도하게 비싼 커피를 홀짝이며, 셔츠의 깃을 짜증스럽게 잡아당기면서 사람들은 쩍쩍 달라붙는 신발 발 창을 끌며 거리를 걸었다. 바다의 소금기 어린 공기를 향해 꾸역꾸역 몰려들어 해수욕장의 입구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는 바닷바람을 흔적처럼 옷깃에 묻힌 채 맹렬히 내리꽂는 햇볕 아래 느적거렸다. 시멘트가 나른하게 녹고 땅의 풀들이 누렇게 말라붙었다. 숨통을 막는 열기와 아무 연관이 없다는 듯, 언제나처럼 청명한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한동안 이 열기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 엄포를 놓는다. 오늘 전국이 강한 일사에 뜨겁게 달구어지며 평년 기온을 훌쩍 웃돌았는데요. 내일은 낮 최고 기온이 35도까지 올라 올여름 최고로 무더운 날이 되겠습니다. 한동안은 비 소식 없는 무더운 나날들이 찾아올 전망입니다.

 

  윤대협은 라디오의 버튼을 꾹 누른다. 귀에 명쾌히 내리꽂히는 캐스터의 미성을 지운다.

 

  더운 걸 말한다고 더운 게 가시는 건 아니지. 

 

  대협은 중얼거린다. 대협은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았다. 침실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작은 방이 여름의 훈기로 건조하게 달아오르는 와중에도, 동향으로 난 창덕에 맹렬한 작열은 비껴갈 수 있었다. 침대 위 다리를 꼰 채 누워 머리를 젖혀 침대 머리맡에 난 창을 본다. 해의 모양이 양껏 뭉그러져 새하얀 것을 보니, 지금 시각은 정오 가량.

 

  대협은 옆으로 돌아눕는다.

 

  지금 나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태웅은 눈을 깜박인다. 

 

  "자, 이건 네 거야."

 

  윤대협의 손에는 낚싯대가 쥐어져 있다. 기대에 찬 듯한 미소를 머금고 왼손을 제 얼굴 쪽으로 뻗은 윤대협을 보며 태웅은 시큰둥한 얼굴로 낚싯대를 살짝 밀어낸다.

 

  "관심 없다."

  "에, 너 하라고 가져온 건데."

  "대신 너 하는 거 봐주잖아."

 

  대협은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으쓱한다. 

 

  "그럼."


 

  윤대협은 종종 미끼를 낚싯바늘에 걸지 않고 줄을 바다로 던지곤 했다. 매달린 무게 없이 지나치게 가벼이 떠다니는 찌가 수면 위 동동 표류한다. 얇고 견고한 대나무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윤대협의 손 아래 느슨하게 잡혀있다. 찰나의 졸음으로 인해 손아귀가 잠시 물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빠질 것처럼.

 

  "지렁이는 안 끼워?"

  "손에 냄새 배잖아."

 

  간단한 답이었다. 윤대협은 갈고리에 몸에 꿰여 까무룩하게 죽어가는 지렁이의 미미한 신경 중추를 신경 쓸 정도로 섬세한 위인이 아니었다.


 

  여름 오후의 햇빛은 길다. 태웅의 검정빛 머리카락이 뜨듯하게 달아올랐다. 태웅은 대협이 자신의 것이라 가지고 온 낚싯대를 손가락으로 훑는다. 바다에 던질 생각은 없었다. 태웅은 무언가를 낚는 것에는 취미가 없었다. 대신 낚싯바늘의 차갑게 둥그런 곡선을 만지작거린다. 가장 뾰족한 가장자리에 손끝을 살짝 대어본다. 무디게 눌리어져 오는 날은 태웅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 그러다 다친다. 대협이 경고한다. 이쪽으로 고개도 안 돌렸으면서, 어떻게 아는 거지. 손끝을 갈고리로부터 떼어내던 그 찰나, 날은 순간 태웅의 손바닥을 엷게 쓸고 지나간다.

 

  아야.

 

  태웅은 얼굴을 찡그린다. 구부러진 날은 태웅의 살 속 박히지 않았으나, 두 마디 길이 정도의 젖은 빨간 선을 남겼다. 살갗이 갈라진 지점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더니 곧 혈액이 방울방울 맺혀 올랐다.

 

  "다쳤어?"
 

  대협은 놀란 얼굴을 하고 낚싯대를 내려놓는다. 태웅의 손을 잡아 눈 가까이 갖다 댄다. 낚싯바늘이 새것이라 다행이네, 감염될 우려는 없어서. 상처가 꽤 깊은 것 같은데.

 

  별 거 아냐. 태웅은 대협의 두 손에 잡힌 손을 뺀다. 윤대협이 쥐었던 오른 손목이 달게 시큰거린다. 윤대협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끙, 하는 숨소리와 함께 간이의자에서 일어난다. 일어서 있는 그의 종아리께에 밖에 오지 않는 의자를 한 손으로 간단히 접는다. 송사리 하나 없이 텅 빈 양동이의 손잡이를 쥔다. 그는 얕게 웃으며 태웅을 바라본다.

 

  "가자. 소독해야겠다."

  "아직 아무것도 안 잡았잖아."

  "꼭 고기를 잡으려고만 낚시를 하는 건 아니거든."


 

 

 

  윤대협의 집은 또래의 고등학생이 혼자 살 법한, 적당히 어질러진 따뜻한 공간이다. 분명 윤대협의 것이 분명한 몇 개의 농구화밖에 없는 좁은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벗으면서 서태웅은 그전까지 한 번도 윤대협의 집에 들어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상한 일이다. 둘의 만남이 대여섯 번 반복되는 일련의 과정들 속 서로의 집에 방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둘은 일전 약속 없이 만났고 흐르듯 헤어졌다. 윤대협은 이유를 묻지 않았으며, 태웅은 구태여 행동에 육성으로 설명을 덧붙일 위인이 아니었다. 한 번도 엇갈리지 않은 것이 신기한 일이다.

 

  "피 씻고 와. 비누 쓰지 말고. 흐르는 물로만."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중얼거리면서도 화장실로 들어간 태웅이 젖은 손을 바지에 쓱쓱 닦으며 거실 겸 침실로 들어섰을 때, 대협은 태평히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고 있다. 태웅은 침대에 등을 댄 채 바닥에 털썩 미끄러지듯 앉는다.

 

  연고 발라줄까? 대협이 반쯤 웃으며 묻는다. 태웅은 고개를 젓는다. 됐어. 그래도 반창고는 좀 붙이지? 대협은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 밑에서 조그마한 구급상자를 꺼낸다. 손 줘 봐. 대협은 살구색의 거칠한 의료용 테이프를 익숙한 듯 손으로 끊어 태웅의 환부에 붙인다. 접착력이 다해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손바닥으로 태웅의 손바닥을 감싸듯 잡아 잠시간 꾹 누른다. 대협의 손은 건조하고 따뜻하다. 

 

  "내일은 농구 하지 말고."

 

  자전거도 못 타겠네. 대협이 태웅을 건너보자 태웅은 어깨를 으쓱한다. 


  "학교는 어떻게 가게?" 

  "걸어서."

 

  대협은 씩 웃는다. 

 

  "태워줄까?"

  "차는 있냐?"

  "아니, 자전거로 말이야."

  "너 자전거 없잖아."

  "공원에 있는 것 잠깐 빌리면 되지."

  "별 뻔뻔한 놈이 다 있네."


 

 

   

  그날 대협은 결국 자전거를 훔치지 않았지만 태웅을 집까지 배웅해주었다. 낮 동안 내리쬔 작열이 도로의 구석에 고여있던 웅덩이들을 증발시킨 탓에 여름밤의 거리는 벌레 한 마리 없이 고요하다. 운동화 두 쌍이 건조한 아스팔트에 둔탁하게 부딪히는 엇갈린 리듬만이 나직하게 깔리던 후텁지근한 침묵을 깨고 대협은 불쑥 말을 꺼낸다.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다."

 

  태웅은 고개를 돌려 대협을 본다. 대협의 얼굴에 가로등의 수직으로 내리꽂는 노란 불빛에서 비롯하는 어둑한 그림자가 져 있다. 늘 뻣뻣하게 세워져 있었던 머리가 약간의 땀으로 편안하게 풀려 이마를 덮는다. 짠 냄새를 미미하게 품은 바닷바람이 둘의 이마를 간질이고 지나간다. 

 

  "누가 너보고 대단하대?"

  "나 사실 자전거 못 타거든."

 

  태웅은 코웃음을 친다.

 

  "바보냐? 자전거를 못 타게."

  "배울 기회를 놓쳤어."

 

  대협은 특유의 맥없는 웃음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어머니가 못 타게 하셨어. 어렸을 때 눈앞에서 자전거 사고를 목격하셔서. 크고 나서 배워볼까, 했는데 이제 와서 자전거를 못 탄다고 고백하기에는 조금 민망하지 않나.

 

  "그러니까, 생각보다 네가 할 줄 알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꽤 있다는 소리야."

 

 

 

  달구어진 아스팔트가 끈끈하게 내뿜는 훈기 속 둘은 얼마간 말없이 걷는다. 

 

  "어떻게 타는지 가르쳐 줄 거야?"

 

  태웅을 보는 대협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난다.

 

  "네가 애냐?" 

  "난 가르쳐 줬잖아. 농구."

 

  태웅이 눈을 매섭게 뜬다. 네가 나한테 가르치긴 뭘 가르쳐. 대협은 소리 내어 웃는다.

 

  "배우겠다고 온 거 아니야?"

 

  재밌냐. 태웅은 대협을 쏘아본다. 대협은 웃으며 팔꿈치로 태웅을 가볍게 친다. 

 

  "나중에 네가 나 태워줘."

 

  맨 입으로 그러긴 좀 그러니까, 조건을 하나 걸어볼까. 다음에 내가 이기면. 어때? 싱거운 도발에 태웅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대협은 익숙하단 듯 휙, 한 마디의 휘파람을 잇새로 가볍게 뱉는다. 약속한 거다? 대협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태웅의 집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 오늘 달 되게 크다."

 

  태웅은 무심히 턱 끝을 들어 달을 본다. 빛나는 것에 머무는 태웅의 눈이 얼마큼 커지는 것을 대협은 놓치지 않는다.


 

 

   

  여름에 자상이 덧났다간 골치가 아파진다. 태웅은 대협의 조언대로 하루 동안 공을 잡지 않았다. 그 대신 온종일 다리를 움직인다. 축축한 열기가 공기 중에 응어리진 한낮의 운동장을 달린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태양볕의 텁텁이 차오르는 압력 덕에 오후 2시의 운동장에는 그만이 존재한다. 

 

  태웅은 천천히 긴 숨을 뱉는다. 땀에 젖어 이마와 눈가에 마구 들러붙은 머리카락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차차 경보의 정도로 속도를 줄여 신발 밑창으로 흙먼지를 주욱 끈다. 팔을 들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다. 손을 뒤집어 대협이 어제 저녁 손으로 어루만져 준 환부를 본다. 반창고 밖으로 비치는 살갗은 분홍빛으로 부풀어 연하지만 더 이상의 무던한 통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태웅은 미미한 열기가 느껴지는 반창고를 손끝으로 만진다. 붕대를 단단히 감는다면 공을 던지는 감각에 다시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갗이 붙었다. 태웅은 주먹을 쥐었다 놓는다.

 

  "서태웅, 오늘따라 몸이 가벼워 보이네. 공을 못 만지니 힘이 남아돌지?"

 

  체육관에서 건너온 듯한 한나 선배가 차가운 물병을 건넨다. 서태웅은 숨을 고르는 와중 가벼운 묵례와 함께 그것을 받아든다.

 

  "그런데, 손은 어쩌다 다친 거야?" 

 

  태웅은 잠시 침묵한 후 대답한다. 넘어졌어요.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는 거울이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눈에서 매섭게 빛나는 풋익은 호승심을 본다. 그 속 겹친 자신의 얼굴이 반히 일렁인다. 한여름의 코트 아래 둘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잠시 포석을 위해 뛰어오르는 근육의 탄성을 정지시키는 한순간의 찰나.

 

  "그렇게 빈틈을 주면 안 되지!"

 

  대협은 날쌔게 팔을 뻗어 태웅의 손에 들린 공을 쳐 낸다. 그대로 몸의 각도를 가볍게 틀어 삼점슛 라인에서 팔을 젖혀 공을 던진다. 깨끗한 슛이다. 공이 그리는 호는 태웅의 블로킹보다 높을 것이다. 태웅이 뻗은 손끝에 미세히 스칠 듯 닿지 않은 공은 수직의 직선을 그리며 네트 속으로 깔끔히 낙하한다. 윤대협은 한쪽 팔을 의기양양하게 추켜올리며 웃는다.

 

  "이 판은 내 승리로 해주지?"

 

  서태웅은 쳇, 혀를 차며 그를 잠시 쏘아본다. 윤대협은 씩 웃어 보인다. 대협이 날렵하게 던져 넣은 공은 몇 번 바닥에 맞서 맥없이 튕겨 오르더니 곧 태웅의 발끝으로 주르르 굴러 온다. 태웅은 익숙히 손바닥으로 그것을 튕겨 옆구리에 끼운다. 그대로 등을 돌려 성큼 코트의 입구로 향한다. 

웬일로 오늘은 한 번 더 하자고 안 하냐. 그럼, 다음에 보자고. 대협이 작별 인사를 뱉을 찰나, 서태웅은 코트 입구에 세워놓은 자전거의 손잡이를 잡는다. 한쪽 다리를 자전거의 반대편에 걸친 채 대협을 무심한 눈으로 건너본다.

 

  "타."

 

  뒷안장을 턱으로 까닥 가리킨다.

 

  "뭐야."

  "네가 이겼잖아."

 

  설마 저번의 그 말 때문에? 내기가 아니었는데. 대협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태웅을 바라본다. 태웅은 다시 한번 턱을 까닥거린다. 

 

  "안 탈 거야?"

  "그 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대협은 자전거 곁으로 건너가 뒷안장에 걸터앉는다. 뒷바퀴에 달린 동승자용 발 받침에 발을 올리려면 다리를 잔뜩 수그려야 한다. 뒷안장의 작은 공간에서 손을 어디에 둘 줄 몰라 잠시 망설인다.

 

  "허리를 잡아."

 

  대협은 순순히 태웅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는다. 검은색의 얇은 나일론 셔츠 아래로 따뜻한 살갗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태웅의 허리는 촘촘한 근육으로 군더더기 없이 단단하다. 

 

  그럼. 서태웅은 오른발로 페달을 툭 친다. 체인이 경쾌하게 끼릭, 돌아간다. 두 사람의 합중된 무게에 잠깐 덜컹거리던 자전거는 태웅의 규칙적인 발짓 아래 점차 균형을 잡는다. 야, 잠깐만. 야...! 대협이 반항을 표하건 말건 태웅은 성큼성큼 페달을 밟는다. 너무하네, 난 자전거 타는 게 처음이라고. 부드러이 올라가는 가속도에 주변 환경이 뭉그러지고 바람이 얼굴을 향해 거침없이 불어와 눈을 시리게 한다. 

 

  대협은 태웅의 허리에 얹은 손길에 힘을 준다. 시선 너머로 보이는 것은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태웅의 검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어딘가 결연함을 품은 얼굴의 한 각도.

 

  "밟다가 넘어져 봐. 그럼 돼."

  "무언가가 우러나는 조언이다, 그거."

 

  자전거의 손잡이를 잡은 손을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둘의 시야 너머 가마쿠라 현의 바다가 드넓게 직조되어 번지듯 푸르다. 얇은 파동이 치는 물이 일렁이며 발 아래 방파제에 하얗게 부서진다. 

 

  바람이 불었다. 윤대협의 향이 섞여 불어온대도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윤대협이 말한다.

 

  더 밟아봐, 슈퍼루키. 

 

  오후의 노란 햇빛이 피부 속으로 올올이 스며든다. 직선으로 뻗은 해안 도로가 굽이굽이 이어졌다. 자전거 체인의 끼릭거리는 소리가 바닷바람에 옅게 흩어진다.

©2023 by SENRU_IN_SUMM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