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다습 주의보
후루츠(@fruitsendo)
*BGM이 따로 있습니다. 우측의 BGM을 눌러주세요.
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가득한 경기장. 탁탁 돌아가는 선풍기가 머리칼을 헤집었으나 더위를 식히는 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태웅이 가슴팍에 자꾸 들러붙는 유니폼을 손으로 펄럭였다. 맨살과 유니폼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면 조금 살 것 같았지만 그조차 잠시 뿐. 더위만큼이나 불편한 어색함에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는 선수들 사이에서 태웅만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바로 섰다. 그들의 뒤로 청소년 농구 국가대표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팔락댔다.
도쿄나 카나가와나 덥기는 매한가지네.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유니폼 위의 3번이라는 숫자를 매만졌다. 아직 새 것인 유니폼의 숫자가 맨질했다. 여름부터 시작되는 합숙 훈련을 위해 에노덴을 타고 바다가 보이는 마을을 지나, 홀로 도쿄로 건너온 태웅은 이제 국가대표로 농구 코트를 뛰게 되었다. 그것도 스타팅. 한 학교의 이름을 등에 업고 에이스로 코트를 누비던 태웅은 다른 나라의 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더 큰 세상으로 기꺼이 발을 내딛었다. 이제는 서태웅의 본질과도 다름이 없는 11번을 떼고 당당히 한 자릿수, 3번이라는 숫자를 꿰찼다.
손으로 유니폼을 쓸면 두 자리 숫자가 한 자리가 되었음이 감각으로 여실하게 느껴졌다. 국가대표 행을 제 일처럼 기뻐해주던 농구부 선배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카나가와를 처음으로 벗어난 태웅은 묘한 허전함을 느낀다. 인터하이를 준비하는 동안 시끌벅적했던 북산의 분위기에 적응이 되었던 탓이다. 지금 나란히 줄 서 있는 사람은 아홉. 청소년 국가대표 농구선수 명단의 마지막 선수만이 남아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같은 학교 출신은 없다는 걸 알아서 딱히 호기심은 생기지 않았다. 국가대표 첫 소집일부터 늦는 인간에게 큰 기대가 없었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보던 태웅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들어온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딱히 죄송해보이지 않는 목소리. 태웅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엔 생각지도 못하게, 윤대협이 서 있다.
윤대협은 늦은 타이밍에도 어김없이 해사한 얼굴이다. 열을 늘어선 선수들을 주욱 살피던 대협의 시선이 태웅에게 닿았다. 대협이 눈을 접어 밝게 웃어보였다. 태웅이 고장난 로봇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그런 말을 해 놓고도 국가대표로 대협이 합류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윤대협과 같은 학년인 정우성이 미국행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태웅은 마음대로 대협의 행방을 이역만리로 결정지었다. 윤대협이라면 미국에 가서도 문제없이 농구를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대표로 이 곳에 모인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마지막 선수까지 도착했음을 확인한 국가대표 감독이 지루한 인삿말을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웅의 시선은 걸어오는 대협에게 꽂혀 있었다. 대협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태웅의 옆자리에 가서 섰다. 여. 인사인지 부름인지 불분명한 태웅의 목소리에 대협이 안녕, 서태웅. 하고 인사를 건넸다. 태웅은 깔끔히 볼일이 끝난 듯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인삿말을 귀에 담는다. 대협은 그런 태웅의 옆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서태웅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더위가 시작될 무렵, 서태웅이 옆구리에 농구공을 끼고 능남고를 찾아왔다. 북산이 능남을 이기고 인터하이에 진출했던 시점이라 의외의 방문이었다. 북산의 에이스를 보자마자 약 올리러 왔느냐며 잔뜩 날이 선 영수의 반응을 미적지근하게 넘긴 태웅은 기어코 대협의 눈 앞까지 찾아왔다. 하고 싶은 건 하고, 갖고 싶은 건 가져야만 하는 성미. 윤대협은 그런 서태웅이 고깝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보단... 재미있는 편에 가까웠다.
"여, 승부하자."
그래서 기꺼이 그런 요청에도 응할 수 있었다. 긍정적인 감정의 기반이 없었다면 수락하지 않았을 일이다. 길길이 날뛰던 팀원들의 말마따나 서태웅은 능남의 인터하이 진출을 가로막은 북산의 선수에다 1인분 이상의 에이스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협은 서태웅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흥미를 갖고있었다. 내밀었던 손을 탁 치고 지나가는 당돌함과 제가 얻고 싶은 것에는 최선을 다하는 맹목적인 목적성. 그리고...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아군보단 적군에 가까움에도 칭찬같은 질문을 던지는, 기꺼운 솔직함까지. 북산은 위험한 팀이었고 서태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전력이었다. 3학년 주전이 2명이나 되었어도 가장 쌩쌩한 태웅이 여전히 1학년이었으니 향후 능남을 위해선 그 애를 도와 좋을 게 하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대협은 그런 태웅에게 이끌렸다. 그래서 진심으로 태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언을 했다. 태웅이 강호인 산왕을 상대로 그 말을 실천했을 땐 묘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서태웅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그 때가 아니다. 북산이 이어진 경기에서 지학에게 무참히 깨어졌다는 말을 들은 대협은 그 경기를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서태웅이 처절하게 지는 모습 같은 건, 딱히 유쾌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북산은 누가 뭐래도 최강산왕을 5인 스타팅 전력만으로 이겨낸 팀이었다. 인터하이에서 우승을 쟁취할 만한 팀은 아니었다고 해도 강한 팀이다. 타학교처럼 벤치가 조금만 든든했더라도 해남 정도의, 혹은 그 이상의 성적을 냈을 것이다. 그걸 몇 번이고 맞붙어 본 윤대협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북산의 가치는 그것으로도 증명이 된 셈이다.
인터하이가 끝났으니 더는 원온원 하자고 찾아오지 않겠지. 후텁지근해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대협이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조언이 필요한 질풍노도의 에이스에게 필요한 말을 함으로서 제 역할은 끝이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림을 깔끔하게 통과해 바닥에 탕, 탕 튕겨지던 공이 데구르르 굴러 누군가의 발 앞에 멈춰섰다. 북산의 새까만 가쿠란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은 서태웅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에 대협이 어, 하고 짧은 육성을 냈다. 태웅이 허리를 숙여 공을 주워들었다.
"나랑 승부해."
"...우리 승부를 꽤 자주 한 것 같은데."
너희 학교에 졌잖아, 나. 그렇게 말한 대협이 차분하게 웃어보였다.
"네가 아니라, 능남 농구부가 진 거지."
그러면 지지 않은 게 되나.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대협은 종종 잔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지는 것이 나의 팀인 능남이 아니라, 저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협을 향해 태웅이 공을 던졌다. 대협이 익숙하게 공을 받아들었다. 네 경기를 잘 봤다고, 산왕과의 싸움에서 대단한 접점을 펼치다 결국엔 이겼더라고 얘기를 하려했다. 하지만 태웅이 한 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우리도 지학에 처참하게 졌어."
그런 말에는 무슨 위로를 해야할 지 몰랐다. 경기를 보지 않아서 크게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대협을 한 번 쳐다본 태웅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도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 네 말이 도움이 되었거든."
"......"
"그러니까 다시 하자, 승부."
고마운 것과 승부를 다시 하는 것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지 모르겠으나 태웅은 거절하기 어렵게 말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서태웅의 경향인지, 서태웅을 향한 대협 마음의 행방인지가 모호했지만. 대협이 기꺼이 그 요청을 수락했다. 북산에게 진 능남의 윤대협과 지학에게 진 북산의 서태웅이 다시 공을 지면에 떨어뜨렸다가, 손바닥으로 튀기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서 다시 승부를 시작했다. 몇 번이고 이기고 지는 세계에 몸을 담았어도 승부는 매번 심장을 펄떡이게 했다. 우리는 그래서 계속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온원이 끝나고, 누군가의 패배와 승리가 갈렸지만 둘은 그걸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처음에 이기고 싶어 기를 쓰고 찾아왔던 것 치고는 승부에 겸연해진 모습이다. 대협이 딱딱한 바닥의 한복판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눅눅하고 뜨뜻한 지면의 온기를 등에 맞대고 가쁜 숨을 고른다. 태웅이 이온음료를 벌컥 들이키고는 윤대협의 옆에 천천히 앉았다. 대협은 서서히 내려앉는 노을을 바라보는 태웅을 조용히 바라봤다.
쉽게 흐트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서태웅. 누군가는 서태웅을 볼 때 얼굴을 먼저 보겠지만, 글쎄. 대협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먼저 보인다. 발갛게 작열하는 노을을 가만히 쳐다보는 감수성이나 길을 가다 마주한 고양이에게 주저앉아 손을 내미는 따뜻함. 그리고...
"멍청아, 뭘 그렇게 봐."
결국에는 마음에 담아버리게 된 저 얼굴마저. 별안간 태웅과 눈이 마주치자 대협의 얼굴이 붉어졌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라 티는 나지 않았지만 경기가 끝난 지 꽤 됐음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윤대협과 서태웅의 관계를 따져보자면 서태웅이 개척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평소 집과 학교만 오간다던 녀석이 능남고등학교까지 와서 찾는다는 게 "윤대협"이라고 했을 땐, 좀 벼락같기도 했다.
대협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상체를 들자 태웅과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서태웅은 그 때조차 딱히 흔들리지 않는 얼굴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냉소적인 것 같기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아주 조금은... 나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 서태웅이 한 치도 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대협에게 눈을 맞춰왔다. 윤대협은 마음이 조금 비틀린다. 서태웅을 볼 때마다 솟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밀어내고 싶었는데 서태웅을 보면 한 치도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너는, 네가 나를 찾아왔으니까.
"서태웅."
"왜"
"왜 날 찾아왔어?"
강하기 때문에? 아니, 전국에 농구를 잘하는 사람은 쌔고 쌨다. 하다못해 해남의 이정환을 마크하기 위해서 북산의 넷이 달라붙은 적도 있다고 했다. 이 즈음에서는 이유를 들어야만 했다. 인터하이도 끝나고 팀원들과 윈터컵 연습을 하거나, 강백호의 재활을 도와야 할 것 같은 시점에 저를 찾아오는 이유를. 대협은 듣고 싶었다.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서도 서태웅은 오랫동안 답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있었을 뿐이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 한 윤대협이, 조용히 다가가 입을 맞추기 전까지. 서태웅의 눈 앞까지 다가온 대협이 눈을 감고 태웅에게 입을 맞췄다. 태웅은 눈을 감지도 않고 가만히 윤대협의 내리깐 속눈썹에 초점을 맞췄다. 입술에 내려앉은 감촉이 따뜻하고 말랑했다. 맞닿은 입술 너머 대협의 심장이 강하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자의지로 윤대협이 입을 맞추는 것을 받아들인 거였다.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던 사람처럼.
오히려 당황한 것은 윤대협이다. 천천히 눈을 뜬 대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안. 그런 말을 남긴 대협이 뒤돌아 농구코트를 가로질렀다. 태웅은 윤대협이 일어난 자리에서 홀로 우두커니 남아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가 대어둔 자전거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윤대협의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얼마 뒤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무렵 정우성이 미국에 간다는 소식도 전해졌으므로 서태웅은 혼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윤대협도 미국으로 떠났겠거니. 그 날 맞췄던 입술은 충동이었는지 혹은 진심이었는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로. 하지만 웃기게도 그런 윤대협은 같은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태웅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서로의 출신지인 카나가와와 도쿄를 오가며 운명의 장난처럼 또.
*
합숙 훈련을 하면서는 2인 1방을 사용하게 된다고 했다. 누군가 짜기라도 한 듯 서태웅과 윤대협의 성씨는 자음순으로 나란히 붙어있었고, 태웅 앞에서 한 방이 마감되었므로 자연스레 태웅과 대협이 같은 방에 배정받았다. 윤대협은 애써 웃는 얼굴을 했고 서태웅은 차분한 얼굴을 지어보였으나 두 사람 모두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대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용기 내서 말을 건 것 치고는 멍청한 대사가 튀어나가서 대협이 속으로 제 자신을 원망했다. 이러면 꼭 사귀다가 헤어지기라도 한 것 같잖아. 그치만 멋대로 입맞추고 도망까지 가버린 건 저였으니 그런 말을 먼저 하는 게 마땅했다. 태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대답했다. 서태웅은 이런 단답의 대답 뒤에 질문을 붙이지 않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대협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협은 이을 말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날은 미안했다고 해야할지, 실수였다고 해야할지, 혹은 그 땐 진심이었으나 지금은 마음을 깨끗이 비웠다는 말을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셋 다 거짓말이었기에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다. 홧김에 저지른 일 뒤로 대협은 한동안 야외 농구코트를 피해 다녔다. 서태웅이 지나가지 않는지 곁눈질을 했지만 서태웅의 머리칼이든, 그 애의 자전거든 서태웅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다시 코트로 돌아가 서태웅을 기다렸다. 서태웅은 이제 능남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여름방학 직전, 자취방을 잠시 내버려두고 도쿄의 본가로 갈 준비를 하던 윤대협은 국대로 뛰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청소년 국가대표보다 능남의 우승을 위해 1년을 바치려고 했기에 유하게 거절을 했다. 하지만 거절을 하고도 자꾸 국대 팀의 라인업이 궁금했다. 고교농구에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개 중에는 대다수가 3학년이었고 대학에 발탁된 사람도 많았다. 산왕의 최동오나, 이명헌, 해남의 이정환처럼. 제가 맞붙어본 사람 중에 가장 잘 했던 정우성도 이미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협이 아는 선에서의 고교 농구선수 중 최고는 서태웅이 된다.
대협은 제 섣부른 거절을 후회한다는 다소 뻔한 말로 전화를 시작했다. 국가대표 감독은 당연히 화색을 담아 화답했다. 윤대협보다 잘하는 추가 영입자를 찾지 못했으니까. 처음으로 농구를 하는 일에 있어 농구 외의 이유가 생겼다. 서태웅과 한 팀에서 뛰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라도 한 팀이 된다면... 대협은 좋을 것 같았다.
"넌?"
한참의 침묵 끝에 태웅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대협이 자꾸 마르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대답한다.
"나도 잘 지냈지."
"...멍청아."
별안간 멍청이라는 말이 떨어진다. 그러나 끝끝내 이유는 묻지 못했다. 태웅이 멍하니 서 있는 대협을 앞질러 방에 카드키를 찍는다. 전자음과 함께 찰칵 하고 문이 열렸다. 태웅이 안 들어오냐는 듯 문을 붙잡고 대협을 돌아봤다. 대협이 허겁지겁 태웅의 뒤를 따라 둘이 함께 쓰게 된 합숙소의 방 안으로 들어선다.
*
국가대표로서 시작하는 훈련은 인터하이 훈련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가끔 멍청한 소리를 하며 깔깔대고 웃는 인원이 없다는 것 정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인원들이다 보니 실력 하나는 보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훈련해보기를 고대했던 태웅으로서는 딱 성장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대협과 태웅은 같은 방을 쓰며 차츰 어색했던 분위기가 걷히는 것을 느꼈다. 서태웅의 말처럼 멍청이처럼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었다.
한여름이 되자 더위의 기세가 한껏 강렬해진다. 뉴스에서는 고온다습한 날씨를 주의하라는 안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섬나라의 비애처럼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고 습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날씨가 좋아도, 궂어도 연습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운동선수의 숙명이다. 태웅이 여느 때 처럼 연습에 합류하기 위해 대협과 함께 방문을 나섰다.
코치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익숙해진 같은 팀 선수들과 언제나처럼 연습경기가 시작된다. 태웅은 경기를 뛰다 말고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낀다. 극심한 무더위에 이 정도는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털고 경기를 재개한다. 저 멀리서 태웅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본 대협이 태웅의 곁으로 가볍게 뛰어왔다.
"괜찮아?"
"괜찮아."
"몸 안 좋으면 말해. 더위 먹었을지도 모르니까."
"응."
윤대협은 그렇지 않은 척, 태웅을 주시하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서태웅에게 입맞춤을 내린 때에서 마음이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태웅의 옆에만 서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지내다보니 마음을 숨기는 데 더 큰 노력을 들여야 했다. 태웅의 대답을 들은 대협이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간다. 골밑에서 한창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장신인 편에 속하는 대협의 도움이 기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태웅 역시 패스를 받기 좋은 위치로 달려가려고 하는데, 눈 앞이 깜깜해진다. 태웅이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서태웅! 윤대협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귓가에 웅웅 울리고, 태웅은 정신을 잃었다. 태웅이 다시금 눈을 뜬 곳은 선수촌의 의무실이다. 살풋 눈을 뜨자 간만에 마주하는 빛이 눈부셔서 태웅이 미간을 찡그렸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키자 의무실 침대 한 켠에 불편하게 몸을 구겨접고 엎드려 자고 있는 윤대협이 보인다. 태웅이 무의식적으로 윤대협의 머리칼에 손을 가져다댄다. 늘 멋부리며 세워두던 머리는 이미 눅눅한 날씨에 의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대협의 머리 위에 태웅의 손바닥이 내려앉는다. 부드러운 머리칼에 촉감이 닿자 태웅의 마음 한 켠이 찌릿했다. 제 머리에 무언가 얹어지는 느낌이 들자 대협이 눈을 떴다. 이윽고 제 머리에 손을 올린 것이 서태웅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대협이 제 머리 위에 있는 태웅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직도 뜨끈하고 맥없는 손을 그러쥔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
"몸 안 좋으면 말하라니까... 열사병이래. 그래도 조금 쉬면 나아진다니까 다행이지."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태웅의 손바닥을 침대 위에 얹었다. 대협은 꼭 수작을 부리는 것 처럼 침대 위에 얹은 태웅의 손 위에 한참이나 제 손을 올려둔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돌아서자마자 쓰러진 서태웅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같은 방을 쓰면서도 서태웅의 상태를 이렇게나 몰랐다니. 제 자신이 더없이 바보같았다. 대협이 쓰러진 태웅을 들쳐업고 한달음에 의무실로 날랐다. 뜨거운 숨을 내쉬는 서태웅을 의무실에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어 자는 서태웅의 옆에 남겠다고 했다. 둘이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였으니 그러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곤히 자는 서태웅을 뜯어 보다가 아프지 말라고 혼자 조용히 빌었다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윤대협."
태웅이 여전히 잠겨있는 목소리로 대협의 이름을 부른다. 태웅의 손 위에 얹어진 제 손이, 그 위에 얹어진 마음이 들켜버린 걸까. 괜히 찔려서 대협이 제 손을 스르륵 태웅의 손등에서 뗀다. 어? 바보같은 목소리로 태웅의 부름에 대답을 했다.
"우리는 무슨 사이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방금 전 까지 죽은 듯 자다 일어나선 뱉는 첫 마디부터 우리가 무슨 사이냐니. 생각해 둔 대답이 없었다. 태웅에게 입을 맞춘 뒤 지금까지도 마음을 버리지 못한 대협으로서는 괜히 마음 한켠이 바늘로 찔리는 듯 한 기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웅의 표정이 단호했다.
쓰러져있는 동안 꿈을 꿨다. 괴롭게도 꿈에서조차 계절은 여름이었다. 꿈의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타던 태웅은 제가 향하고 있는 길목이 문득 능남고등학교 초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윤대협을 찾아 수 차례 혼자 오갔던 길이었기에 자신있게 농구 코트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태웅은,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 이미 농구코트에 있었던 탓이다. 한 명은 딱딱한 바닥 위에 누워 있고, 한 명은 앉아 있었다. 농구 코트의 바로 윗 길목에서 태웅은 끼익. 자전거를 멈춰세운다.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익숙했다.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도... 익숙했다. 정확하게는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가쿠란의 형태가 너무 눈에 익었다. 이 근처에 저런 가쿠란을 입는 것은 오로지 북산고등학교 뿐이었다. 그 순간 누워있던 인영이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머리카락이 멀리서 보기에도 한껏 멋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윤대협과 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윤대협이 서태웅을 향해 입을 맞춘다. 태웅이 그 광경을 보며 괜히 제 입술을 쓸었다. 그 땐 상기하지 못했는데, 첫키스였다. 태웅의 심장이 뛰었다.
찰나도 영원같이 느껴지던 첫 키스의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대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태웅이 지금 서 있는 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태웅이 자리에서 벗어나 근처 담벼락을 돌아 숨었다. 왜 숨는진 본인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방금 입 맞춘 사람이 또 서있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바로 길모퉁이를 돌아 벗어날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윤대협의 발걸음이 태웅이 숨어있는 담벼락 앞에 멈춰섰다. 한숨소리와 함께 윤대협이 서태웅을 등지고 담벼락에 기대 앉았다. 태웅이 괜히 숨소리를 죽였다.
"서태웅 너를..."
연습하듯이 떨리는 말로 윤대협이 입을 연다. 그 대사 속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태웅은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좋아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자 태웅은 도망친 윤대협의 마음을 깨닫는다. 한순간의 충동이나 운동을 하고 나서 심장이 거세게 뛴 나머지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윤대협의 진심이었구나. 하는 절절한 것들이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거짓말처럼 눈 앞에 윤대협이 있었다. 태웅은 마음에 헤일이 친 듯 울렁거림을 느낀다. 입을 맞추고 도망갔으나 쓰러진 제 이름을 누구보다 빨리 외치며 한달음에 달려오고, 누워있는 제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윤대협. 이제 윤대협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윤대협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아 버렸으니까.
"나는,"
대협이 마른 침을 삼킨다. 대답을 종용하듯 빤히 바라보는 서태웅의 시선에서 자꾸 벗어나고 싶어진다. 도망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도망은 한 번으로 족했다. 무엇보다 서태웅을 찾아 국가대표까지 된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태웅에게 해야 하는 말. 서태웅에게 입맞추고 당당히 용기내어 했어야 하는 말이 너무 늦게 태웅에게 닿을 차례였다.
"널 좋아하는 것 같아."
담벼락에 기대어 발개진 얼굴로 허공을 향해 뱉었던 말이 드디어 주인을 찾아갔다. 그런 대협과 눈을 맞추던 태웅이 아직도 뜨끈하고 힘이 없는 몸을 일으킨다. 수도 없이 찾아갔던 윤대협을 향해 고개를 내린다. 윤대협과 서로 숨이 맞닿는 거리까지 오자 입을 맞출 때 윤대협의 마음을 문득 이해한다. 꼭 들릴 것 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을 안고 천천히,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춘다.
고온다습한 계절의 한복판에서 나는 문득,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