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불면의이쑤신(@ymmfl_11)
여름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하나.
루카와 카에데는 서른 살에 NBA에서 은퇴했다.
커리어 최악의 부상을 입은 건 시즌 초반이었다. 치열한 골밑 점프슛 후에 떨어지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부딪혔다. 누구에게도 고의성은 없었으나 결과는 태클 수준으로 참혹했다. 오른쪽 무릎이 이상한 각도로 돌아간 데다가 위에 두 명이 쌓였다. 루카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기 중에 짐승처럼 단말마를 질렀다. 들것에 실려가는 동안 두 눈을 너무 세게 감아서 노란 불꽃놀이 같은 게 암흑 속에 퍼졌다.
연골이 찢어지고 인대가 늘어나고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이었다. 시즌 아웃. 이 시점에선 아무도 좌절하지 않았다. 일시적으론 끔찍하나 충분히 쉬면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CT를 찍고 MRI를 찍었다. 다치지 않은 왼무릎까지도.
의사는 반투명한 사진 속의 하얀 얼룩을 가리키면서 루카와의 무릎 사진이 70대 같다고 했다. 각각 퇴행성 연골 파열과 박리가 상당히 진행됐다고.
"지금까지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그야 종종 통증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다. 격렬한 경기 후에 으레 찾아 오는 근육통이라고 생각했다. 적절히 휴식하고 나면 괜찮아졌다. 의사도 납득했다. 원래 퇴행성 질환은 초기에 통증을 느끼기 어렵다고. 그래서 무서운 거라고. 언제 임계점을 넘어갔는지 알 수 없어서...
"외상만이라면 충분히 재활이 가능하지만... 현 상태는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자면 관절이 거의 수명을 다한 거예요. 수술과 재활을 거쳐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회복하는 게 최선입니다."
최대한 회복해봤자 이미 건강한 무릎이 아니라고 했다. 선택은 전적으로 루카와의 몫이었으나 의사가 은근하게 권유하는 방향은 분명했다.
"인생은 아직 길잖아요."
루카와 카에데는 차라리 무릎이 잘려 나갔다면 기쁜 마음으로 휠체어 농구를 시작했을 사람이라는 걸 의사가 알 리 없었다. 그렇다고 잘라 달라고 할 순 없으니. 루카와는 담담하게 수술과 재활을 선택했다. 그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면. 수술은 값비싸고 고통스러웠다.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루카와는 10월부터 4월까지 꼬박 7개월을 재활에 전념했다. 아예 입원을 오래 했고 늘 목발을 짚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구단에서는 피지컬 뿐 만 아니라 멘탈 테라피스트도 붙여 줬다. 마치 결과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재활은 실패였다.
최소한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했다. 루카와는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고 단거리라면 가볍게 뛸 수도 있었다. 당대의 최신 의학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새처럼 나는 듯한 점프는 무리였다. 물리적으로야 시도할 순 있었다. 하지만 착지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충돌은 더더욱 언감생심. 다시 삐끗하기라도 하면 비명을 참을 수 없는 끔찍한 통증과 함께 지난 7개월이 무효가 된다.
재활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대치로 예상한 건 본래 운동능력의 90%. 실제 회복된 건 7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NBA는 100%, 아니 120%를 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다.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이런 무릎으로 포지션을 사수하는 건 무리였다.
한창 포스트시즌이 진행 중이던 5월. 루카와는 구단과 에이전시에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발표 시기는 시즌 종료 후로 조율했다. 팀의 목표는 언제나처럼 파이널이고 우승이니 경기 하나하나가 중요한 상황이다.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루카와는 단 1분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더 경기를 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득해진 지난 시즌 파이널이 인생 마지막 경기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감독과 코칭 스태프는 마음은 알지만 아무 것도 약속할 순 없다고 했다. 루카와도 납득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 1분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NBA 파이널 마지막 경기. 팀은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가비지 타임. 루카와에겐 쓰레기가 아니라 보석 같은 기회였다. 부상 이후 시즌 내내 복귀할 수 없었고 진작부터 은퇴설이 파다한 루카와가 교체 투입되는 순간.
홈 관중이 전부 스탠딩 오베이션을 보냈다. 루카와는 드래프트 이래 10년 간 한 팀에서만 쭉 뛰었다. 신인상을 탔고 득점왕을 했고 네 번 우승했고 홈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농구했다. 그야말로 뼈를 깎아서 얻은 리스펙이었다. 정확히는 무릎뼈.
인생에서 가장 간절한 1분. 루카와는 코트에 발을 딛자마자 실감했다.
다시는 여기로 돌아올 수 없다.
내 무릎은 끝났다. 다시는 예전처럼 농구할 수 없다. 당장이라도 트라우마에 가까운 통증이 돌아올지 모른다. 잘못하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질 수도 있다.
그래도 루카와는 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시는 걷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 이 1분을 포기할 수 없어서.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마지막 1분.
승부가 난 상황에서도 상대팀은 최선을 다해 루카와를 상대했다. 10초를 남기고 상대 팀 에이스가 루카와에게 공을 패스한 뒤 다른 팀원을 물렸다. 일 대 일 매치업. 낭만적이군. 루카와는 속으로 감사했다.
박수와 환호가 커진다. 1년 내내 매일 같이 프로 스포츠의 뜨거운 승부가 펼쳐지는 미국에서도 이 정도로 극적인 드라마는 흔치 않다. 스타디움의 공기가 용광로처럼 진한 밀도로 끓어오른다.
루카와의 결 좋은 까만 앞머리가 공중에 떴다. 폭발적인 드리블로 자신보다 10cm 크고 6살이 어린 상대팀 에이스를 순식간에 돌파해 날아오른다. 덩크를 꽂는다. 홈 관중이 미친듯이 환호했다.
버저가 울린다. 동료들이 달려 온다.
손가락을 림에서 놓는 순간부터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루카와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공중에서부터 비스듬히 무너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오른쪽 무릎이 덜그럭거렸다. 아프다. 사실은 덩크를 위해 점프하는 순간부터 아팠다. 지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두 눈을 꾹 감았더니 굵은 눈물 줄기가 동시에 네 갈래로 주르륵 흘렀다. 동료들이 등짝을 두들기다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누군가 팀 닥터를 부른다.
난반사된 조명 빛으로 시야가 엉망진창이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뜨끈하고 땀에 젖은 팔뚝들을 붙잡고 골 밑에 주저앉아 루카와는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다. 기억하는 이래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눈물의 은퇴 경기였다.
센도 아키라는 서른두 살에 일본 10대 IT기업 임원이 됐다.
대학 다닐 때 머리 좋은 선배들이 회사를 창업한다길래 합류했다. 재밌어 보여서. 그리고 대기업 취준이 더럽게 귀찮고 지루해서.
그랬더니 이게 무슨 일. 웹 서비스 하나로 유니콘 기업이 됐다. 창업 초기 센도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접점이 되는 지점에서 마케팅, 영업, 홍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해 성장에 기여했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CFO로 재무를 총괄한다. 사람보다는 숫자를 훨씬 많이 본 지가 꽤 됐다.
한창 시작할 때보단 훨씬 재미없는 일이다. J커브를 그리던 성장은 둔화됐고 벤처기업은 대기업이 됐다. 창업 멤버 중에는 상장 이후에 주식을 팔고 이른 은퇴를 하거나 새 사업을 시작한 선배들도 있다. 센도는 남았다. 그 정도로 하기 싫은 일은 아니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다른 일도 없었다. 어쨌거나 청춘을 바쳐 키워 온 회사에 애착은 있었다.
농구도 딱 이런 기분일 때 그만뒀다.
대학 리그까지는 제법 진지했다. 인터칼리지에서 U21 세계대회에서 또 올림픽에서 나름대로 활약했다. 실업 리그에서 러브콜도 있었다. 일본에도 드디어 프로 리그가 생겼을 때는 모두 센도 아키라의 미래가 결정된 것처럼 굴었다. 본인만 빼고.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센도가 쉽게 질리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풀이 너무 좁았다. 농구는 결국 공 하나 던져 놓고 사람끼리 부딪히는 게 전부인데. 센도가 속한 리그의 멤버는 고등학교 때부터 인터칼리지, 국가대표까지 다 고만고만했다. 어느 시점까지는 서로 부딪히며 성장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문턱을 지나가니 속도가 둔화되고 비슷해졌다. 영원히 자라는 나무는 없다. 고인 물은 썩는다.
한 달만 지나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실력이 늘었던 십 대 시절과 비교할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몸은 그 때의 짜릿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루카와 카에데를 처음 만난 경기를 어제처럼 기억한다.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는 것이다.
시금석이 다이아몬드인 셈이다. 한 번 잭팟을 경험한 도박 중독자가 가장 취약한 것처럼. 그럭저럭 견딜만한 재미로는 부족했다. 의욕이 점점 말라갔다. 그 정도로 재미있는 상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적어도 국내에선 그랬다.
인생에 어떤 선택권이 주어진 시절부터. 항상 갈림길에선 더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골랐고 뒤돌아 보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달렸다. 센도는 창업 이후로는 취미로도 농구를 안 했다. 완전히 일에 몰두했다.
몇 년이 지나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나서야 주말에 가끔 혼자서 실내농구장을 예약했다. 별 재미는 없었다. 농구는 팀 스포츠였고 지난 몇 년 간 인간관계를 독점한 회사 동료들은 딱히 농구에 관심이 없는 IT 긱이 대다수였다. 이제 와서 사회인 스포츠를 시작하기도 귀찮았다.
루카와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게 농구했던 그 때처럼. 영원할 수 있었을까. 지속적으로 한 뼘씩 쑥쑥 성장해서 제 몸에 또렷한 마디 하나를 긋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돌연변이 대나무처럼. 언제나 파죽지세였던 루카와 카에데.
센도는 잘 알았다. 실은 가장 먼저 손에서 빠져나간 건 농구가 아니고 루카와다. 그래서 영원히 십 대의 여름에 남아 있다. 손 댈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6월 마지막 주. 센도 아키라는 야근 중이었다. 사무실엔 몇 명이 더 남아 있었다. 4월에 상반기 공채로 뽑은 신졸자들의 3개월 평가가 코앞이다. 급성장하는 신사업에서 안정적이고 복지 좋은 대기업이 되어버린 만큼 요즘 신입사원들의 성향도 많이 변했다. 어쨌든 현재 회사에 남은 사람 중 센도만큼 이 회사를 위해 사람을 많이 뽑아 보고 교육해 본 경력자는 없었다. 특히 올해는 재무부서 충원이 많았다. 이제 센도는 신입을 가르칠 부하들을 가르쳐야 했다. 맛보다 카페인이 우선인 캡슐 커피를 들이키며 기지개를 켠다. 피곤이 쌓였다.
기분 환기 차원에서 회전 의자와 함께 빙그르르 돌아 본다. 사무실의 커다란 TV는 별 일 없으면 뉴스 채널에 고정이다. 브라운관 상단을 박력 있게 채운 익숙한 글자가 센도의 시선을 멈춰 세운다.
생중계. 루카와 카에데 NBA 은퇴 후 첫 귀국 기자회견.
센도가 발작처럼 리모콘을 찾아 볼륨을 키웠다. 뮤트가 해제되자 찰칵찰칵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들린다.
길다란 책상 뒤로 익숙한 얼굴이 느릿느릿 걸어 들어온다. 다리를 조금 저는 것 같다. 센도는 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루카와가 번쩍이는 플래시 세례 사이로 천천히 목례한다.
기자 대표가 사전 취합한 질문을 건넨다.
"부상으로 은퇴를 결심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재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건가요?"
센도가 커피잔을 꽉 쥐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는 뻔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처럼 느껴졌다. 관련 기사가 처음 부상을 입었던 1년 전부터 파다했는데. 막상 TV 속의 루카와는 담담해 보였다. 미리 질문을 확인해서 그렇겠지만. 높낮이가 없는 듣기 좋은 저음이 천천히 답한다.
"시즌 내내 재활했습니다. 그래서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걸을 순 있지만 농구는 역시 어려운 건가요?"
"농구... 할 수 있습니다."
루카와는 질문을 건넨 기자가 아니라 정면의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본다.
"하지만 더 잘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도 상처 입은 적 없는 매처럼 당당하게.
"저는 농구를 더 잘하고 싶어서 미국에 갔습니다. 오직 그 이유였습니다. 매 경기, 매 시즌 나아지고 싶었고 그것만을 목표로 뛰었습니다."
센도는 루카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시선에 꿰뚫리는 것 같다.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퇴합니다."
기자는 기계적으로 수첩을 넘기며 곧바로 이어 질문한다.
"일본 프로 리그로의 이적 가능성은 어떤가요?"
"없습니다. 지금 무릎 상태로는 확실히 말해 민폐입니다."
"국가대표도 마찬가지인가요?"
"물론입니다."
"NBA에 있는 동안 국가대표팀에 참여하진 못했는데요. 아쉽지 않으신가요?"
"아쉽습니다."
루카와는 프로 생활을 하며 국가대표를 뛴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때문에 국내 여론이 일시적으로 나빠지기도 했다. 물론 잠깐이었다. 다음 시즌이 오면 다시 루카와에게 감탄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명실상부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했으니까. 센도는 소속 구단이 부상 걱정에 대표팀 합류를 막았으리라 추측했지만. 루카와는 단답형 대답에 아무런 변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이 더 오간다. 루카와는 지금까지 국민들의 성원에 감사를 표하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자유 질문 시간이다.
"이후 국내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어... 집에 갑니다."
멍한 대답에 좌중에 잠깐 웃음이 일었다. 정말 아무 일정이 없어 보인다. 뭐가 잘못된지 몰라서 머리를 긁적이는 구부정한 뒷목이 센도가 아는 루카와 같다. 왠지 지켜보던 센도가 긴장이 풀린다.
"은퇴 경기가 현지에서도 국내에서도 굉장히 화제였습니다. 혹시 경기 장면을 다시 보셨나요?"
"아니요....."
"어째서죠? 감동적인 명장면으로 손꼽혔는데요."
"아니요...... 너무 울어서......"
다시 좌중에 웃음이 퍼진다. 누가 봐도 짖궂음이 담긴 질문이었다. 루카와가 약간 더 구부정해진다. 분명히 부끄러워하고 있다. 얼굴은 그대로지만 목 아래가 살짝 핑크색으로 물들고 있다.
센도는 문제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봤다. 그래도 익숙한 종목이라고 포스트시즌이 되면 종종 NBA를 틀어 놓곤 했다. 중계 시간에 따라서 무료한 주말 오전이나 야근 BGM으로 제격이었다.
일주일 전 NBA 파이널 마지막 경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화제였다. 그럴 만큼 강렬했다. 하이라이트는 라스트 1분. 가비지 타임에 교체 출장한 루카와 카에데. 상대팀의 리스펙과 홈 관중의 환호. 마지막 덩크와 처절한 눈물. 아름다운 스완 송. 스포츠 뉴스 뿐 만 아니라 모든 방송에서 수백 번 수천 번 리플레이 됐다. 아마 그 장면을 아직도 못 본 일본인은 없을 것이다. 루카와 카에데 본인 빼고.
센도는 그렇게 우는 루카와를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본인도 본 적 없을 거다. 센도는 솔직히 당시엔 경기를 끝까지 본 걸 후회했다. 생각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따져 보면 그 역시 부질없다. 어차피 일본에 살면서 그 장면을 안 볼 수는 없었을 거다. 경기가 끝난 뒤 루카와가 만원 관중 앞에서 은퇴를 선언하는 장면은 나중에 스포츠 뉴스에서 봤다. 새빨개진 눈과 쉬어빠진 목소리를 하고서.
두세 번 더 질문과 답변이 오간다.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거의 미국에서 있었던 은퇴 기자회견 내용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마지막 질문을 던진 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히코이치잖아. 센도는 반가운 얼굴이 화면에 등장하자 빙그레 웃었다. 내가 없는 데서 재회를 하고 있네.
"루카와 선수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 농구 선수들에게 명실상부한 우상이자 목표입니다. 반대로 루카와 선수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 궁금합니다. 누구에게 가장 영향을 깊게 받았나요?"
루카와가 세 번 눈을 깜빡인다. 시선이 다시 정면의 카메라를 향한다. 조그마한 입술이 열린다.
"마이클 조던. 그리고..."
잔잔한 여름 바다처럼 금빛 햇살을 머금은 투명한 눈빛이 센도를 똑바로 쳐다본다.
"센도 아키라."
머그컵이 요란하게 바닥을 구른다.
마시던 커피가 엉망진창으로 쏟아졌다. 야근하던 소수의 직원들이 일제히 소리의 기원을 쳐다보는 동시에 센도가 화장실을 향해 급히 몸을 돌렸다. 미안해요. 대걸레 가져 올게요.
하지만 센도는 금방 돌아갈 수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벽에 머리를 부딪히듯 기댔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밀려 드는 아득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갑자기 무겁게 때려 오는 심장 박동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중력보다 강한 힘이 센도를 지구 내핵 쪽으로 끌고 가려 한다. 시간을 되감으려고 한다.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십 대의 여름에 영원히 남은 것도 너 혼자만이 아니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카나가와의 본가에 도착했다.
7월이 시작됐다. 완연한 여름.
열여섯 살 때까지 살았던 집에 서른 살에 돌아왔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부모님은 아무리 권해도 이사도 새 집도 마다하셨다. 익숙한 것이 제일이라며. 미국에서 번 돈은 최대한 아껴 쓰라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 빨리 은퇴했으니 부모님 말씀이 옳았다. 다행히 농구를 안 한다면 크게 돈 들어갈 일은 없다. 제일 많은 돈을 잡아먹은 두 무릎뼈도 이젠 진정됐으니까.
남들은 집을 나가 새 가정을 차리고도 남을 나이에 루카와는 반대로 부모님 슬하로 굴러 들어왔다. 역자취? 퇴행? 캥거루? 나이 드신 부모님은 오히려 반가워하셨다. 14년을 떨어져 살았으니까. 부모보다 먼저 은퇴한 막내아들. 그래도 당신들 눈에는 아직도 먼 타지로 혼자 유학을 떠나던 고등학생 아이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루카와는 다이닝룸 식탁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가끔 야채 씻는 걸 도왔고 몇 마디 수다를 떨기도 했다. 14년간 손에 꼽을 정도 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시간이다. 앞으로는 매일 할 수 있다.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서 양파를 써는 어머니를 뒤에서 껴안아 본다. 어깨에 턱을 꾹 누른다. 고등학생 때도 안 하던 애교다. 마음이 조금 촉촉해지신 어머니는 한참 루카와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셨다. 설거지는 루카와가 했다.
배가 부르다. 소파에서 잠깐 낮잠을 잤다. 얇은 레이스 커튼을 통과한 햇빛이 나른하게 루카와를 감쌌다. 어머니가 에어컨을 약하게 켜 줬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금방 식어간다.
저녁을 먹기 전에 2층 방으로 올라갔다. 루카와의 짐은 아직 박스에 담겨 1층 거실과 2층 복도에 여기저기 널려 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집에서 살다 온 지라 정리할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14년간 쓰던 짐치고는 적은 걸지도.
이번 주 일정은 빼도 박도 못한다. 대청소뿐이다.
짐 정리를 하려면 짐이 들어갈 방부터 치워야 한다. 루카와는 14년 만에 돌아온 방을 둘러본다. 제법 깔끔하다. 부모님이 저 없는 동안에도 꾸준히 관리해 주신 거겠지. 감사함뿐이다.
두고 간 잡동사니가 거의 그대로다. 루카와는 팔을 걷어붙였다. 과거의 흔적을 선별할 때다. 과감히 버리거나 창고로 보내 간직하거나.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먼지들이 여름 오후의 누런 햇살 속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루카와는 일회용 마스크를 가져다 썼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보던 농구 잡지들. 조던의 기사를 모은 스크랩북. 박스를 꺼내는 순간 균형을 잃고 우르르 쏟아지는 카세트테이프들.
한때는 보물이었던 부스러기들이 먼지와 함께 굴러다닌다. 그리운 기분을 참지 않고 하나씩 만져 보고 펼쳐 본다. 사소한 마음을 다 쌓아 놓고 넣어 놨더니 훑어만 보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지 않은 것, 직접 수고를 들여 만들지는 않은 것, 수명을 다 하거나 망가져서 간직할 이유가 없는 것들은 과감하게 100리터 쓰레기봉투로 옮긴다. 카세트테이프는... 재생이 되려나?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한다.
느릿느릿 정리하다 서랍 구석에서 묘하게 낯선 물건을 하나 찾았다.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
루카와는 사진을 찍는 취미가 없다. 가족 중에선 아버지가 기록에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캠코더를 시작으로 디지털로 옮겨 간 지 꽤 됐다. 요즘은 기자들처럼 거대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취미로 새 찍으러 다니신다. 급기야 휴대폰에도 카메라 렌즈가 붙어 나오기 시작한 시대. 일회용 카메라는 운석 맞고 빠르게 멸종한 공룡이나 다름없다.
21장짜리 필름 중 소모된 건 겨우 5장.
나머지를 다 찍어야 필름을 꺼낼 수 있다. 루카와는 엄지손가락으로 태엽을 도륵도륵 감아서 방구석을 아무렇게나 찍는다. 묶어 둔 오래된 농구 잡지 위로 햇살이 내려오는 풍경이나. 무너진 카세트테이프들만 남기고 텅 빈 책장 선반이나.
조그만 방에서 찍을 만한 건 금방 떨어졌다. 1층으로 내려가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른다. 포즈를 잡기 전에 냅다 찍는다. 조금 당황하셨지만 싫어하진 않으셨다. 마지막엔 두 분이서 제법 다정한 포즈도 취해 주셨다. 환하게 웃으면서. 루카와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까만 플라스틱에 표시된 하얀 숫자가 0으로 바뀌었다. 더는 찍을 필름이 없다는 뜻이다.
달칵. 루카와가 일회용 카메라 뒤를 열어 동그랗게 말린 필름을 꺼냈다. 아버지가 현상해 주겠다며 까만 필름통에 넣어 가셨다.
다음 날. 루카와 카에데는 스물한 장의 사진을 손에 잡았다. 딱딱한 모서리를 손끝으로 지탱하고 하나하나 넘겨 본다. 가장 마지막 장은 환히 웃는 부모님. 어머니와 아버지의 독사진. 1층 집안 풍경. 2층 제 방 구석구석.
열여섯 장을 넘기고 나서야 다섯 장의 14년 전이 등장했다.
일회용 카메라의 정체가 생각났다.
루카와는 사진 다섯 장을 하나씩 책상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묵묵히 바라본다.
두고 갔던 여름 조각이었다.
#First shot
센도 아키라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열여덟 살을 회상한다. 하늘이 그때만큼 새파랗다는 이유로.
도시의 흡연구역은 이상할 정도로 손바닥만 한 녹지나 공원에 붙어 있다.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단 몇 그루의 나무라도. 인간은 자기들이 토해 낸 더러운 것들을 전부 자연에게 떠넘기고 뻔뻔하게 싱그러움을 꿈꾼다. 언제까지 응석 부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덕분에 센도는 이곳에 나와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공원을 마주한다. 짙어진 나뭇잎 사이사이 아래로는 햇살이 떨어지고 위로는 파란 하늘이 조각나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카나가와의 야외 농구장을 떠올린다. 불가항력이다. 머릿속에 하얀 담배연기가 차올라 스크린을 만들어 주면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어떤 장면들이 상영된다.
가령 열여덟 살의 어느 여름날.
센도 아키라는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그 농구장을 찾았다.
약속 상대는 먼저 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지만 센도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진 않았다. 루카와 카에데는 농구공과 단둘이 있을 때 절대로 남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센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카메라를 눈에 가져다 댄다. 가장자리가 약간 왜곡된 플라스틱 화면 안에 네 모서리만 표시된 사각형. 가운데 십자 표시 너머로 루카와가 날아오른다. 센도는 제법 멋진 순간에 셔터를 눌렀지만 카메라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 태엽을 안 감았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되어 커다란 엄지손가락으로 뾰족뾰족한 부품을 슥슥 돌린다. 벽에 부딪힌 것처럼 반응이 없을 때. 다시 눈에 가져다 댄다.
한 손에 농구공을 든 루카와가 아대에 이마를 문지른다. 하얀 팔꿈치 안쪽에 밀려 올라 간 까만 앞머리. 무성의하게 구겨진 예쁜 얼굴.
찰칵.
찬란한 여름 햇살 아래에선 있으나 마나 한 플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루카와가 이쪽을 눈치챘다. 낮인데 왜 플래시가 터지지? 카메라를 잘 모르는 센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루카와가 불만스럽게 공을 튕긴다.
"뭐해."
"이거 플래시 어떻게 끄는지 알아?"
한숨을 푹 쉰다. 아주 한심해 하네. 센도는 씨익 웃었다. 루카와는 건방질 때 제일 귀엽다. 늦은 주제에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어 놓고 딴소리나 하는 센도를 깊은 한숨 한 번으로 용서했는지. 순순히 겨드랑이에 농구공을 끼고 다가와서 고개를 들이민다. 어디 봐.
일회용 카메라를 잡고 있는 센도의 큰 손에 자기 손을 겹친다. 이리저리 기울이면서 번개 모양이 그려진 작은 버튼을 하나 찾아서 ON에서 OFF로 옮긴다. 센도는 자기 손가락에 닿았던 감촉을 의식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지만 루카와가 너무 거리낌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오. 이제 된 거야?"
다시 카메라를 들어 올리려다 턱 막힌다. 센도는 루카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많이 참았지.
구석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루카와의 가방 쪽으로 카메라를 가볍게 던진다. 포물선을 그린 끝에 톡. 안전한 착지. 주머니에 넣었다간 무사하지 못하겠지. 이 슈퍼 루키.. 아니 슈퍼 에이스를 상대하다 보면.
열여덟 살의 센도 아키라는 카나가와 고교 농구계의 명실상부한 일인자였고 열여섯 살의 루카와 카에데는 더 이상 루키가 아님에도 여전히 타도 센도를 외치는 슈퍼 에이스였다. 루카와는 작년에 전국 대회에 나갔고 국가대표로 뽑혔으니 현을 벗어나면 센도보다 훨씬 선수로서 인지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루카와는 센도를 넘어야 비로소 전국 대회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팀으로써 쇼호쿠가 넘어야 하는 벽은 여전히 카이난이었다. 타오카 감독이 열심히 스카우트해 온 1학년 센터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농구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하나미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리바운드와 디펜스에서 확실하게 밀리는 료난에게 스피드와 공격력까지 갖춘 쇼호쿠는 골칫거리였다. 물론 료난의 주장 센도 아키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현 예선에서 두 팀은 아직 맞붙지 않았다. 료난은 카이난을 이겼고 카이난은 쇼호쿠를 이겼기 때문에 쇼호쿠가 료난을 이기면 계산이 아주 복잡해진다. 승점이 같고 승자승도 애매하다. 그럼 골 득실률을 따져야 한다. 이러면 료난과 쇼호쿠가 카이난보다 유리할 수 있다. 둘 다 원래부터 미친 공격력의 팀인데다 올해는 부쩍 디펜스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상대를 해 주면 전력 노출인가?
센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주제에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새파란 초여름의 하늘을 등에 지고 날아오르는 루카와의 앞을 가장 단단한 벽이 되리라는 마음먹고 막아설 때는.
사실 아무런 생각이 안 든다. 그저 즐겁다. 농구는 이 정도의 상대가 없으면 결코 이만큼 즐겁지 않다. 센도는 가치 있는 것이 눈앞에 있을 때 즐기자는 주의다. 아껴 놨다 사라지고 후회하면 무슨 소용.
두 사람은 한 마디도 없이 몇 시간이고 맞붙는다. 루카와는 작년보다 체력이 많이 늘었다. 센도만큼은 아니다. 아직은 이기기 때문에 재밌다.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는 아찔함이 작년보다 더 스릴 있다.
각자 가져온 물병과 2L짜리 페트병 하나. 한꺼번에 마시면 뛸 수도 없기 때문에 번갈아 입을 조금씩 축이다가 그걸 다 먹으면 다른 말없이도 적당히 파하는 분위기가 된다.
쪼그리고 앉아서 가져온 수건에 이마를 부비던 루카와가 물끄러미 무언가를 응시한다. 아까 던져둔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 자칫하면 이대로 루카와 가방에 실려서 보낼 뻔했다. 긴 팔을 쭉 뻗어서 회수. 루카와의 시선이 고양이처럼 따라온다.
"집에서 찾았어. 나도 처음 찍어 봐."
"수학여행 때 안 찍었어?"
"음. 내가 찍어 본 적은 없는데."
흐응. 루카와가 코와 목의 중간에서 지나가는 심드렁한 소리로 대꾸한다. 센도는 루카와의 반응을 곱씹다가 굉장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렇게 쿨하고 무뚝뚝하게 생겨서는 수학여행 때는 일회용 카메라로 친구들이랑 서로 사진도 찍어 준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의외함이 왠지 참을 수 없이 우습다. 혼자서 쿡쿡 웃었더니 더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이 표정을 찍어 놓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더니 손을 뻗어서 가렸다. 그래. 센도는 순순히 카메라를 내려놨다. 싫으면 안 찍을게. 그냥 고양이 같은 반응이 귀여웠을 뿐이다.
바람이 지나간다. 건조하고 청명하다. 적당히 땀을 식혀 준다. 이 동네에는 바다를 건너 온 바람이 분다.
에어컨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시 눈을 감는다. 바람을 즐긴다. 서로가 달궈 놓아 뜨거워진 덕분에 더욱 시원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루카와의 여상한 목소리가 실렸다.
"다음 주는 못 와."
"월요일? 아니면 일요일?"
"둘 다."
매주 월요일은 쇼호쿠도 료난도 부 활동이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학교가 끝나면 바로 야외 농구장으로 왔다. 매주 일요일도 아침 연습으로 끝이다. 오후에는 시합이 없으면 연습도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점심을 먹기 전이나 후에 야외 농구장에서 만났다. 언제나 루카와가 먼저 와 있었다. 가끔 못 올 때도 있었고. 센도가 늦잠을 자 버릴 때도 있었지만.
루카와가 미리 일정을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센도는 무심코 물었다.
"왜?"
루카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월요일은 진로 상담."
두껍고 빽빽한 속눈썹이 4월의 청보리밭처럼 부드럽게 물결친다.
"일요일은... 면담을 해."
루카와가 눈을 뜬다. 조각 난 햇살이 통과하는 검은 눈동자가 센도를 바라본다.
"미국에서 온 코치하고."
바다를 건너 온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자주 가던 야외 농구장으로 향했다. 하늘이 그때만큼 새파랗다는 이유로.
혼자 간 건 아니다. 조카들과 함께다. 루카와도 볼 겸 아이들 방학도 보낼 겸 일주일 간 카나가와 본가에서 묵게 된 첫째 누나는 오랜만의 친정 방문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형부는 일하느라 못 왔다. 누나가 숙면하는 잠깐 동안 발생한 부모의 부재는 루카와 삼촌이 책임지기로 했다.
휑한 공터와 야외 농구장 몇 개가 연이어 있던 공원에 무려 어린이용 야외 풀장이 설치된 지도 몇 년이 지났다고 한다. 바다가 코앞인데 why... 루카와의 의문은 첫째 누나가 잠들기 전에 처치해 줬다. 넌 애를 키워 본 적은 없고 애였던 적만 있어서 몰라. 바닷물과 민물은 씻기는 난이도가 천지차이다. 모래가 있는지 없는지도. 루카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다 말고 풀장 갈게. 어차피 야외 농구장에 가고 싶었던 차였다.
루카와가 미국에 있을 때 태어난 조카들은 각각 일곱 살 여자아이와 네 살 남자아이다. 둘 다 에너지가 엄청나다. 얼굴은 누나와 형부를 반반씩 섞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기한 구석이 루카와를 닮았다. 첫째는 재채기 소리가 루카와랑 똑같다. 아무런 전조 없이 고요하게 있다가 온몸을 움츠리면서 츄! 또는 쳇! 같은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 둘째는 윗입술 정중앙이 유달리 톡 튀어나온 게 루카와랑 똑같다. 양쪽 가족을 통틀어 루카와만 갖고 있는 특징인데. 유전자는 신비하다. 아마도 자신의 아이를 낳을 일이 없는 루카와 입장에선 가장 분신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어쨌든 유전적으로는 그렇다.
아이들이 훨씬 작았을 때는 주로 사진이나 영상으로 봤다. 작년까진 1년에 한 번 겨우 만났다. 그래도 일본에 오면 꼭 얼굴을 봤다. 저만의 기억을 가질 만큼의 나이가 되고 나서는 둘 다 절대로 루카와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번쩍 들어서 빙빙 돌려준 덕분이겠지. 루카와 삼촌은 놀이 기구 가득한 유원지만큼이나 사랑받았다. 일본에 사는 아이들은 루카와보다 큰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말본새가 똑 부러진 첫째 아이는 루카와가 왔다 가면 한동안 제법 큰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 키가 크네. 그렇지만 루카와 삼촌보다는 안 크네.
첫째는 일곱 살치고 키가 아주 크다. 누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라고 생각한다. 죽순처럼 쑥쑥 자란다. 특히 종아리가 길어서 모델 같다. 루카와는 내심 기대를 했다. 실내용 농구대랑 작은 농구공도 사줬다. 누나는 진부하고도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며 쯧쯧 혀를 찼지만. 강요는 절대 아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수영복을 입었고 루카와는 그냥 5부 팬츠에 젖어도 상관없는 짧은 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짐이 많아서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 커다란 비치타월 세 개. 튜브와 비치볼. 혹시 몰라서 생긴 어른용 농구공과 아이용 농구공. 물놀이에 질릴 수도 있으니까. 루카와는 어릴 때부터 포기에 서툴렀다. 강요는 절대 아니다. 아마도.
루카와는 운전이 서투르다. 미국에서 면허를 따는 바람에 좌우가 달라 더 그렇다. 다행히 주말 낮에 카나가와의 도로는 한적한 편이다. 천천히 바다가 보이는 수변공원으로 나아간다. 누나의 차는 시동을 걸면 자동으로 쩌렁쩌렁 동요가 나온다. 아이들은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부모님 없이 삼촌하고만 떠나는 나들이에 들뜬 모양이다. 루카와는 도로와 운전에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예전에는 이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지금보다 훨씬 빠른 스피드로. 뺨에 스치는 바람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아무런 보호장구도 없이. 핸들을 잡은 채 정신이 반쯤 다른 데로 떠나도 두려움이 없었다. 너무 익숙한 풍경이나 공기나 냄새 같은 것들은 최소한의 경계심조차 무디게 한다.
긴장감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을 때 시작된다. 대체로 루카와의 인생에서는 센도 아키라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는 어디서든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런 종류의 참을 수 없는 긴장을 부여하는 존재였다.
가령 열여섯 살의 어느 여름날.
미국에 가는 건 루카와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마이클 조던이 되려고 시작했던 농구였다. 방법이 없어도 만들어서 갈 생각이었다. 농구를 더 잘하고 싶었다. 게다가 갈 방법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선례도 있고 경쟁자도 있다. 가장 잘 할 줄 아는 종류의 경쟁이었다. 농구로는 져 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명한테만 빼고.
결국 그 녀석이...
루카와는 이 문장을 어떻게 마쳐야 하는지 잘 모른다.
당연하고 쉬울 줄 알았던 길을 가로막았나?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부숴버리려고 찾아갔다. 벽을 만났을 때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힘껏 뛰어올라 훌쩍 넘으려고 했다.
그렇게 만만한 벽이 아니었다. 애초에 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에 그 녀석은 딛고 점프하는 발판이나 밟고 올라가는 계단처럼...
센도 아키라는 엉터리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도움닫기였다.
거칠 것이 없었던 십 대 시절의 농구 인생. 센도의 존재 덕분에 예측할 수 없는 전개의 연속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숙명 같은 장애물이 생기고. 장애물인 줄 알았더니 잡고 올라갈 밧줄이었고.
어쨌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루카와는 미국으로 농구를 하러 가게 됐다. 그걸 센도에게 전달하는 일은... 역시 긴장됐다.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랑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센도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했다. 공치사나 감사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별처럼 다가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그랗게 커진 검은 눈동자가 가끔 떠오른다. 파란 하늘과 청량한 햇살이 반사되던. 예쁘게 쌍꺼풀진 커다란 눈. 결 좋고 짙은 눈썹이 그리던 힘없는 곡선이나.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 끝이나. 초여름의 공기만큼 맑은 침묵을 머금고.
너는 왜 그런 표정이었을까. 나는 왜 그런 심정이었을까. 그때도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누나가 옳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날씨 좋은 6월의 무자비한 햇살 아래 관광객들은 바다를 찾고 동네 사람들은 수영장을 찾기로 한 모양이다. 공원에 가까워질수록 전례 없이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아이들의 칭얼거림 속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주차장을 찾았다. 이미 자동차로 빽빽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주차장이 컸던가?
차에서 내린 루카와는 농구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어떤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저쪽에 철망과 나무의 배치가 너무 익숙한데?
얼른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을 들어 올려 눈앞의 풍경과 겹쳐 본다.
이 주차장이다. 예전에... 농구장이었던 곳.
야외 풀장을 만들고 폭증한 주차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였을까. 야외 농구장 전체가 주차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풍경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인 재개발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 이 동네 토박이라 해도 뭐가 크게 바뀌었다 느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철망 울타리도 나무들도 그 너머로 보이는 파란 바다도 그대로다. 허름한 농구 골대 몇 개만 사라졌을 뿐. 거기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열여섯 살 같은 걸 넣어 둔 사람은 많지 않겠지...
"루카와 삼촌! 빨리!"
아이들은 제 몫의 튜브와 물놀이 도구를 야무지게 챙겨서 루카와를 재촉한다.
"미안해. 삼촌 잠깐만."
루카와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진을 넣지 않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일본에는 아직 발매되지도 않은 최신 스마트폰은 미국 스폰서 회사에서 준 선물이다.
사진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면서 휴대폰을 코앞에 바짝 붙인다. 네모난 화면 속에 14년 전의 풍경과 눈앞의 풍경이 겹친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 셔터 소리가 파묻힌다.
찰칵.
#Second shot
센도 아키라는 꽉 막힌 퇴근길에 운전대를 잡고 열여덟 살을 회상한다.
평소에는 운전할 때 반드시 음악을 듣는다. 적당한 자극이 없으면 금세 집중력을 잃기 때문이다. 조용한 차 안을 견디기엔 출퇴근길은 너무 지루했다.
요즘은 다르다. 생각이 많으니 배경음이 필요 없다. 생각은... 주로 과거를 향해 있다. 틈을 주면 몰려오는 기억을 애써 막지는 않았다. 내심 반가웠는지도. 흐릿해져야 마땅한 세월이 흘렀는데 왜 눈앞의 회색 도로보다 그때의 나날들이 선명하게 채색되어 있는지.
가령 열여덟 살의 어느 여름날.
센도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작은 마을인데도 정해진 장소만 오가는 일상을 좋아했기 때문인지. 벗어난 적 없는 반경이 넓었다. 바다를 따라 곁을 걷는 해안 도로. 이날까지 센도의 세상에서는 야외 농구장이 이 도로의 끝이었다. 거기서부터 집이나 학교와는 반대 방향의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새로운 영토 개척이다.
비슷한 듯 낯선 풍경 속에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되짚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간지럽다.
루카와 카에데는 매번 이 길을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지나서 센도 아키라에게 왔다. 이렇게 느긋하게 걸어온 적은 없겠지만. 바람 속을 가르는 매처럼 망설임 없고 날쌘 자전거로 스치듯이 지나 왔겠지. 지금이라도 옆을 쌩 지날 것 같다. 지나치게 생생한 자신의 상상력에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왜 그렇게 한 사람만 생각했을까?
곧 떠날 거라서?
그건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전개이긴 했다. 루카와의 존재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전개의 연속이었지만. 마지막은 더욱 뜬금없었다. 잘 듣던 음악이 갑자기 뚝 끊긴 것 같은 느낌. 예의 상의 페이드아웃도 없이.
센도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마무리를 생각지도 못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시간관념이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무엇이든 끝이 있는데. 너무 좋으면 그걸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저 눈앞에 집중해 버린다. 푹 빠져 버린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한없이 즐거우면 그랬다. 누군가 휘슬을 불어 줄 때까지. 정확히 40분을 정해 놓고 거꾸로 가는 디지털 초 시계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주지 않으면. 마지막을 알 수 없다. 끝이 온다는 걸 잊어버린다.
루카와는 그런 센도보다도 더한 놈이었다. 가령 농구 골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게 해가 지면 아무리 센도라도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안다. 그건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휘슬이나 거대한 디지털 초시계보다도 명백한 인류 공통의 사인이다. 그런데도 루카와는 끝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달려 들었지...
그랬던 놈이 갑자기 들이댄 끝이라서 더욱 황망했는지 모른다. 센도는 그때 자신의 감정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지에 대해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졸업은 예상할 수 있는 끝이다. 농구 경기 하나가 40분인 것처럼 고등학교가 3년인 건 누구나 안다. 그런 종류의 마무리였다면 조금 더 대비할 수 있었을까.
사실은 그 모든 게 핑계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짐작하기 싫었던 걸지도. 무의식에도 들여놓기 싫었을지도...
이 모든 게 곧 과거형이 되겠군.
끝이란 그런 거다.
해안 도로에서 표지판을 확인하고 적당히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낮은 담장의 한적한 주택가를 통과한다. 스즈키, 다나카, 나카무라 같은 문패를 지나친다. 하교 시간은 진작에 지나서 그런지 조용하다. 센도와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은 전혀 없다.
목적지가 보인다. 벽돌 담장에 길쭉한 현판.
카나가와 현립 쇼호쿠 고등학교.
다가서면 센도의 어깨 아래로 오는 낮은 담장 너머로 흘끗. 아스팔트 안뜰을 한 번 들여다보고.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본다. 하교 시간이 40분 정도 지났다. 진학처가 해외로 정해진 학생의 상담이라면 그다지 오래 끌진 않을 것이다. 담장 앞에 빽빽하게 늘어선 자전거 중에 낯익은 것이 있나 살펴본다. 저건가? 파란색... 센도의 눈이 맞다면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다. 센도치고는 흔치 않은 행운이다.
센도는 충동적으로 주머니에서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꺼냈다. 이걸 가져온 건 충동이 아니고 계획이었지만. 사각형에 눈을 대고 낯선 쇼호쿠 정문 풍경을 네 모서리만 표시된 사각형 안에 이리저리 맞춰 보는 순간.
누군가가 건물을 나온다.
오후의 진한 햇살이 반사되는 까만 머리와 큰 키.
기다리던 사람이 아무것도 없던 풍경으로 걸어 들어와 주인공이 된다.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쪽을 보는 순간 손가락에 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찰칵.
인사는 그 다음이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다니던 모교를 찾았다.
교문이 따로 없는 카나가와 현립 쇼호쿠 고등학교의 정문을 통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버릇처럼 자전거 거치대를 힐끗 본다. 오늘은 천천히 걸어왔다. 의사가 웬만하면 자전거는 타지 말라고 했다.
방학이 시작된 학교 안은 고요하다. 특수 교실과 동아리 부실이 있는 별관 교실에서만 목소리가 좀 들린다. 교실이 줄지어 있는 본관에는 아무도 없다. 서태웅은 천천히 걸어서 1학년 10반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낯선 뒷모습에 인사한다.
"안자이 선생님."
돌아보는 은사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주름지고 여전히 인자하다.
"잘 돌아왔어요."
안자이 선생님은 날씬해지셨다. 다이어트 때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항암치료 때문이라는 말에 루카와는 깜짝 놀랐다. 이 나이에 큰 수술을 치른 것치고는 예후가 좋은 편이라며 손을 내저으신다. 그래도 과거에 운동 좀 했던 보상을 지금 받는 것 같다고. 겸손한 선생님 답지 않은 자랑스러운 말투에 루카와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이 나왔다.
목재 건물이 아닌데도 교실에서는 언제나 나무 냄새가 났다. 창틀이나 책상이나 걸상 같은 것들 때문일까. 성능이 나쁜 쿨러가 꺼져서 미적지근한 여름의 실내 공기 사이로 피어오르는 익숙한 학교 냄새.
루카와는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지난 10년간 안자이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한 달이 될까 말까 하는 귀국 기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고 가족들 얼굴을 보기도 빠듯했다. 고국에서 시작된 프로 농구 리그에서 감독을 맡은 미츠이 히사시 선배가 쇼호쿠 농구부 동창회를 빙자한 술자리를 소집하면 일단 시간이 맞을 때는 참석했지만 안자이 선생님이 오신 적은 없다. 그래도 매년 연하장은 꼬박꼬박 보냈다. 선생님도 답장을 주셨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 항상 쓰여 있었다.
근황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안자이 선생님은 길에서 보면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마르셨지만 혈색은 좋아 보였고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묻는다.
"쇼호쿠 친구들은 자주 만나나요?"
루카와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1년에 한 번을 자주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할 수 있는 타인은 결국 그들뿐이었다. 농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올해 여름도 이미 약속이 잡혔다. 그래서 루카와는 나직하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론 자주 볼 것 같아요."
안자이 선생님의 얼굴이 밝아졌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만족하시는 모습이다.
"미야기 군은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에 자주 봐요. 아기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기도 했답니다. 루카와 군도 만났나요?"
"주말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정말 귀여워요. 아야코 군을 꼭 닮았답니다."
루카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말 약속은 기대하고 있다. 내일 백화점에서 아기 선물을 살 예정이다.
"사쿠라기 군은 미국에서도 뜬금없이 전화를 하죠. 그때 루카와 군의 근황도 많이 알려 주었어요."
루카와의 얼굴이 심드렁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예전 별명.
"멍청이가..."
"하하! 여전하네요. 보기 좋아요."
루카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은사 앞에서 보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약간 얼굴이 달아오른다.
서른이 되어도 어떤 관계는 그대로다. 한 번도 팀을 바꾼 적 없는 루카와 카에데와 달리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저니맨에 가까웠다. 그만큼 괜찮은 센터를 원하는 팀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도 컨퍼런스가 겹친 적은 없다. 두 사람이 코트 위에서 맞붙기 위해서는 챔피언십에 나가야 했다. 사쿠라기는 10년 내내 루카와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고 루카와는 콧방귀로 넘겼지만 내심 챔피언십에서 저 멍청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매 경기를 뛰었다. 그래도 데뷔 시즌 루키 오브 더 이어는 내 거였어. 루카와는 항상 한 발, 못해도 반 발은 사쿠라기보다 앞섰다. 악착같이. 결국은 사쿠라기가 있어서 그렇게 달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농구하는 내내 앞에도 뒤에도 누군가 있었다.
앞에 있던 누군가는 언제부턴가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환상이어도 좋았다. 어차피 떨쳐낼 수 없다면.
노을이 시작되기 전. 햇살이 마지막으로 강렬해지는 시간이 왔다. 유난히 짙은 금빛이 되어 가로로 내리쬔다. 그만큼 짙어진 그림자가 안자이 선생님의 얼굴에 깊게 팬 곡선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분적인 그늘 속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농구는 즐거웠나요?"
루카와가 대답을 망설인 적이 없는 질문이다.
"네."
안자이 선생님이 웃었다. 얼굴 위에 그늘보다 햇빛의 영역이 늘어난다.
"다행이네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멀리서 부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자전거 스탠드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운동장을 달려간다. 같이 가. 그렇게 외쳤다.
안자이 선생님이 한 번 더 물었다.
"후회하나요?"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린 반쪽의 눈매는 너그러우면서도 서늘했다. 항상 진실을 보고 있는 눈. 동시에 선생님은 항상 철없는 제자들보다 겁이 많았고. 걱정도 많았다. 아마 이 질문의 의도는 애제자가 후회하지 않기를, 더 나아가 후회하더라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지만.
루카와는 잠깐 그 눈으로부터 시선을 피해 책상의 나뭇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번쯤은 정직하게 묻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후회.
좁은 책상 아래 간신히 구겨져 들어 간 두 개의 다리. 두 개의 무릎. 그때보다 커졌고 그때보다 낡았다.
루카와는 미국에 간 이후 매 경기 매 순간 아낌없이 몸을 던졌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10년이었다. 한계까지 밀어붙이면 한계를 넘었고 또 다른 한계가 찾아왔다. 무한히 앞으로만 돌진하는 에너지 그 자체였다. 무엇에 마찰하든 부딪히든 깎여 나가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다소 멍들고 넘어지고 상처 입더라도 결코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밖에 살 줄 몰랐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루키 오브 더 이어. 탑 스코어러. NBA 챔피언. 닳고 찢어지고 고장 난 무릎. 다시는 그런 식으로 농구할 수 없는 몸. 좋아하던 자전거도 이제는 자유롭게 탈 수 없는.
루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자이 선생님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본다. 루카와의 눈도 한쪽은 짙어진 황금색 저녁 햇살 속에, 다른 한쪽은 오똑한 콧대가 드리운 그늘 속에 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봄을 시작이라 부르고 여름을 절정이라 한다면 루카와의 농구는 여름에서 끝났다.
여름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하나. 아직은 잘 모르겠다.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안자이 선생님의 제안을 루카와는 한사코 거절했다. 체육관이나 다른 곳을 혼자 둘러보고 싶다고 했더니 이해해 주셨다. 그러나 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교문이 없는 담장을 빠져나와 현판 앞에 선다. 어깨에도 미치지 않는 낮은 담장 너머로 교정을 바라본다. 주머니에 고이 넣어 놨던 사진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눈앞의 풍경과 맞춘다. 휴대폰을 꺼낸다.
찰칵.
#Third shot
센도 아키라는 점심시간에 컴퓨터 스크린세이버를 노려 보며 열여덟 살을 회상한다.
모니터 성능을 과시하는 듯 알록달록 총천연색 바닷속 풍경 사진이 네모난 모니터를 위아래 대각선으로 둥둥 떠다닌다. 가끔 프레임에 부딪히면 느리게 튕겨 나온다. 센도는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해 본 적이 있다. 실제 바닷속은 이것보다도 더 색채가 다양하고 선명했다. 육지에서 본 적도 없는 낯선 질감과 패턴이 가득했다. 바다는 언제나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
가령 열여덟 살의 어느 여름날.
그때도 바다를 봐야만 했다.
센도는 진로 상담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 루카와를 납치했다. 루카와의 첫 마디는 오늘 농구공 없는데. 였다. 센도에게 가지 않고 집에 가려고 했으니까. 주머니에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도로 집어넣으며 센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농구하자고 온 거 아닌데."
오늘의 일정을 혼자서 알고 있는 센도에게도 농구공은 없었다. 루카와는 좋다 싫다 말도 없이,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센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센도는 오른손 주먹을 자신도 모르게 꾹 쥐면서 그 말을 꺼냈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이번에는 루카와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눈이 약간 커지고. 직선의 속눈썹이 평소보다 훨씬 높은 각도로 솟는다. 잠깐 그렇게 센도를 보다가. 입술을 일자로 꾹 물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루카와는 자전거를 두고 걸어서 교문이 없는 담장 사이를 지나쳐 센도의 옆에 나란히 선다.
함께 걸었다. 바닷가로.
바다를 향해 골목을 걸을 때. 센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카와도 재촉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말없이 옆을 걸었다. 나란히 흔들리는 손등이 닿을지도 몰라서 센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면 누구나 일단 걸음을 멈추게 된다. 크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다시 내려놓게 된다. 언제든 그렇다. 매일매일 바다를 보던 고등학생 때에도. 한 호흡을 공유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녕. 나 왔어.
옆에서도 조용히 빠져나가는 날숨이 느껴진다. 바닷바람이 루카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한숨 내려놓은 듯이 편안해져 있다. 루카와도 바다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까. 안녕. 나 왔어.
바다가 가진 무한한 습기 때문에 밀도가 진해진 바람이 제법 무시할 수 없는 속도로 몸을 감싼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시원하다.
한참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센도가 모래사장을 걸어 나간다. 다섯 발자국 뒤에서 루카와도 따라왔다. 백사장은 저절로 걸음을 느리게 한다. 바다로 가려면 언제나 그렇다. 서두르지 말고 오라는 듯이.
파도에 발이 젖지 않을 지점에 멈춰 섰다. 솨아아 철썩하는 물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서 들린다. 그런데도 아직 멀리에서 들린다. 대다수의 파도는 이리로 오다가 흩어지고 딱 한 개씩만 모래사장에 도착해 발 앞에 부서지고 다시 부서진다.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단일 물질의 가장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흩어지는 조그마한 물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라본다. 투명한 바닷물을 조각조각 퍼즐처럼 나누는 하얀 거품.
이런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그러면 명료한 무언가가 떠오르고. 대다수의 꼬인 것은 정리된다. 그래서 여기로 온 건데.
오늘은 아니구나. 센도는 착잡한 한숨을 쉬었다. 바다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는 루카와를 흘끗 곁눈질한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하고 깊은 상념에 잠긴 듯도 한 담담한 무표정. 발 앞의 파도보다는 멀리 수평선을 보고 있다. 낮아진 햇살이 물결에 반사되어 눈부신지 약간 찡그리고 있다. 그래도 눈을 감거나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본다...
갑자기 루카와가 허리를 숙였다. 신발과 양말을 벗는다. 신발 끈을 서로 묶어 맨 팔뚝에 감는다. 교복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고. 가방끈을 확 조이더니 센도를 쳐다본다.
"좀 뛸까."
"엥?"
"승부하자."
그러더니 냅다 모래사장을 박차고 뛰어간다.
센도는 소리 내어 웃으며 그 뒤를 전속력으로 쫓아갔다.
운동화가 모래에 푹푹 빠진다. 앞서가는 루카와의 맨발은 날렵하게 모래를 차올리며 발자국을 찍고 있다. 치사하네. 그래도 스태미너는 내가 아직 위일걸.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귀 뒤쪽부터 관자놀이 둘레쯤이 화악 각성한다. 심장이 거칠게 펌프질한 피가 사지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광배와 대퇴의 큰 근육이 활성화된다. 센도는 가장 익숙한 감각에 둘러싸인다. 문자 그대로 피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기분. 루카와의 불타는 두 눈을 코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던.
이렇게 뛰고 있으면 머릿속에 어떤 말도 쌓일 수가 없다.
있잖아 루카와. 아무래도 말이야...
결승선을 정해 놓지 않은 달리기였던 점이 결정적이었다. 루카와는 결국 센도에게 따라잡혔다. 한참을 제치고 달려가던 센도가 멈춰 섰다. 루카와도 그제야 멈췄다. 무릎을 짚고 헉헉거린다. 센도는 가던 길을 돌아왔다. 엉망이 된 호흡을 후우 한 번 크게 내쉬면서 고른다. 루카와가 무릎을 모래사장에 꿇고 캑캑 기침을 한다. 이런.
"괜찮아?"
센도가 루카와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루카와가 그 손을 탁 쳐냈다. 져서 열받았구나. 솔직한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센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참 모래사장에 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는 루카와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센도도 힘들다. 이렇게까지 전력으로 달린 건 오랜만이다. 루카와는 항상 100%를 쏟게 만든다.
앉아서 보는 바다는 더 예쁘다. 그새 해가 많이 낮아졌다. 부드럽고 눅진한 황금빛이 바다 위로 쏟아져서 물결친다. 빛으로 그린 그림 같다. 넋을 놓고 보게 된다. 옆에서 루카와도 자세를 바꾼다. 엉덩이를 깔고 한 쪽 무릎을 올려 팔꿈치를 걸친다. 그새 숨이 잦아든 턱을 가만히 괴고 있다.
센도는 어느 틈엔가 빛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바다 대신 루카와를 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곳 없이 매끈한 옆얼굴이 황금색 햇빛에 싸여 윤광을 낸다. 전력 질주의 여파로 아직 살짝 달아 오른뺨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콧대 옆으로 짙은 그늘이 진다.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린 미간에도 조그맣게 그늘이 졌다.
센도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걸 들킬까 봐 주머니에서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꺼냈다.
찰칵.
루카와가 항의하듯이 이쪽을 바라본다.
"뭐야. 어제부터."
센도는 진짜 기분을 감추고 싶어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가끔은... 좋잖아."
이제 마지막이잖아.
그런 단어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너무 강력하다. 이상하게 감성적이 되어 버린 자신을 더욱 주체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잠깐 지나가는 아름다운 별똥별이나 희미하게 반짝이는 반딧불. 찰나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존재. 무심코 소원을 빌고 싶어질 정도로. 그런 빛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고. 무언가에 새겨서라도. 조각이나마 붙잡고 싶은... 어리석은 충동을 들킬 것 같았다.
"신발에 모래 다 들어갔네. 이것 좀 봐."
운동화를 벗어서 뒤집었더니 솨아아 모래가 떨어진다. 옆에 앉아 있는 루카와는 의기양양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보란 듯이 맨 발가락을 모래 속에 파묻고 꼼지락거린다. 얄미운 녀석. 본인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뛰었다. 그래도 내가 이겼지만.
짭짤하고 습한 바다 냄새에 섞여 있는 달콤한 냄새는 루카와의 땀 냄새일까?
해가 정말 지려나 보다. 바다색 하늘에 핑크색이 섞여 들어간다. 경계선은 보라색으로 물든다. 어디부터 무슨 색인지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럽다. 바다는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투명하다. 강한 빛은 강하게 반사하며 아름답게 빛난다.
센도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루카와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루카와는 쓰다듬을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얌전히 눈을 감았다. 바닷바람이 촉촉해진 이마를 스치고 지나갈 땐 노을에 물든 뺨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런 순간에는 정말 말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처럼 아프다.
마음속으로도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면 정말 입에 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빌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끝내 토해 놓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일까? 가지 말라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이...
"내일은..."
센도가 퍼뜩 놀랐다. 루카와가 눈을 감은 채로 먼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에 아무렇게나 흔들리던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간다. 노을을 담은 눈동자가 센도를 쳐다본다. 아직 발그레한 열기가 남은 건지 핑크색으로 물든 하늘이 내려온 건지 모를 빛의 뺨을 하고서.
"네가 좋아하는 걸 하자."
마치 오늘은 센도가 좋아하는 걸 했던 것처럼.
그게 아니야. 루카와. 오늘도 내가 너를 데려온 건데. 할 말이 있다면서 한 마디도 못하고. 센도는 자기 자신이 바보 같아서 포기하듯 웃었다. 힘없는 한숨이 마구 섞여 나왔다.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그러자."
내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달리던 해변가를 찾았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면 누구나 일단 걸음을 멈추게 된다. 들고 있는 줄도 몰랐던 숨을 조용히 내려놓게 된다. 바닷바람이 루카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어느 때에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마음으로 속삭인다. 안녕. 나 왔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면 바다가 더 가까워진다. 언제든 그대로다. 14년이 지나도. 바다는 변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낡고. 닳고. 약해진다.
그래도 된다고 바다는 말해 준다.
이제 루카와는 모래사장을 달릴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오래 서 있기만 해도 돌아가는 길이 괴로울 것이다.
열여섯 때와는 달리 천천히 모래사장을 따라 걷는다. 거칠지 않은 초여름의 상쾌한 바닷바람이 함께 걸어준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외롭지 않게.
귀국 기자회견 때 아이다 히코이치가 있었다. 스포츠 기자가 된 건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몇 번 인터뷰를 했다. 답을 아는 질문을 던져서까지 기어코 제 입에서 그 이름을 꺼낸 건 얄미웠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니까.
그 긴 세월 동안 농구하는 내내 14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어떤 등을 보고 있었다. 7번 센도 아키라. 이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선수다.
처음은 너무 강력하다.
한 번도 넘었다는 느낌이 시원하게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꺼이 발을 대라고 두 손을 모아서 내밀었으니까... 그런 건 넘었다고 하지 않는다. 넘겨줬다고 한다. 그렇게 영원으로 남아 버렸다. 치사하게.
한계를 만날 때마다 그 등이 나타났다. 깨지거나 깨거나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게 보이면. 마치 혼자가 아닌 것처럼.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손을 꼭 쥐고 에너지를 받은 것처럼.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서. 이겨내 왔다.
강렬하고 흔들리지 않는 두 눈동자를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이 번쩍 뜨였다. 안개가 걷히고. 불꽃만 남았다.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처럼.
혼란이나 번뇌를 쩍 소리 내며 가르는 태양빛. 그의 기억은 한 번도 루카와에게 다그치는 채찍이었던 적이 없다. 인간에게 태양빛이 그런 것처럼. 그대로 따라가면 위로 상승시켜 줄 것 같은 강력한 믿음이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선수인데도.
아이다 히코이치에게 물어봤다면... 분명히 근황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소재지나 연락처까지도. 그러나 루카와는 인터뷰가 끝나고 아이다를 따로 만나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조만간 밥은 한 번 사야겠지. 미국까지 인터뷰하러 와준 게 고마우니까. 그건 오직 아이다와의 관계를 돌보고 가꾸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끼우지 않고.
물론 아이다를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센도에 대해 묻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럼 왜였을까.
침묵과 함께 바닷가를 걸으며 루카와는 지금까지 마주하지 못했던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잡힐 듯 말 듯 도망치고 싶은 어렴풋한 마음. 너무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한 것 같기도 하고. 나와 내 마음의 술래잡기. 미국에서 이런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센도에 대해 차분히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루카와는 결론 비슷한 것을 내렸다. 지금까지 센도 아키라를 찾지 않았던 이유는...
놀랍게도 무서워서인 것 같다고.
루카와는 태어나서 그 무엇도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 특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절은 거절하고 사양은 사양하고 저 자신의 한계를 찢어발겨 서고 싶은 위치에 섰고 갖고 싶은 걸 손에 넣었고 되고 싶었던 선수가 됐다.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도 끝내 한 걸음을 내딛고 한 번 더 점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거절한 적 없는 곧고 따스한 태양빛. 먼저 손을 뻗어 다시 만나는 게 왜 무서웠을까.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북한 질문에도 거리낌 없이 답할 수 있도록 응원해 준다.
아마도 피하고 싶은 건... 거절이겠지.
그리고 연락할 수단을 손에 넣으면 그때부터 끝없이 찾아올 망설임. 루카와는 망설이는 데 재능이 없었다. 수단이 있으면 저지를 게 분명하다. 그랬다가 아마도 마땅한 결론을 듣게 되겠지. 농구 선수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원년부터 프로 감독인 미츠이 선배나 2년 전에 국내 리그로 온 미야기 선배가 한 번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적 없으니까. 그보다 한 발 더 사적인 걸 알게 되겠지. 결혼을 했다거나 아이가 있다거나. 자신과 농구가 없는 세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서른 살, 아니 서른두 살의 센도 아키라. 생각만 해도 온몸의 털이 쭈뼛 솟는다.
이런 것들은 대체 언제부터 느꼈던 두려움일까. 서른이 돼서일까. 아니면 열여섯, 아니 열다섯부터?
자문자답을 하며 외면해 왔던 스스로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는 사이. 목적지 근처에 온 것 같다. 루카와는 주변을 둘러보다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풍경과 맞춘다. 여기가 맞다. 아마도.
얌전히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무릎을 세워서 팔로 끌어안는다. 발가락으로 따뜻한 모래를 파고들던 감각이 그립지만. 양말까지 벗었다가 다시 신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만두기로 할까. 이런 때 조금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마음이 너무 커져서 무서울 때는 다짜고짜 달릴 수 있었던 시절이 조금 그립다.
그때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를 수 있었다. 튼튼한 무릎을 믿고. 지금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 버린 하루하루에 휩쓸려.
그날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루카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재촉하기보다 기다리기를 택했기 때문에. 그게 성미에 맞았다. 아무리 농구를 좋아해도 먼저 농구장을 차지한 사람이 있으면 묵묵하게 차례를 기다리듯이.
후회는 없다. 센도가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 마음 역시 존중해야 한다. 그쪽에서 할 말이 있다면서 불러냈다 할지라도. 어차피 그날 루카와는 손해를 본 게 없다. 좋아하는 사람과 바다를 보고. 달리고. 바람을 맞고.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었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어떤 말을 했대도. 어떤 말을 참았대도.
루카와는 정면의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옆자리의 모래사장을 괜히 쓸어 본다. 첫사랑이 앉았던 위치라고 생각하면서. 겁쟁이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수밖에. 어떤 좌표도 확실하게 특정하기 어려운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어가다 대충 비슷한 곳에 주저앉을지라도. 마음이 여기라면 여기인 거다. 어차피 기억은 사진보다도 애매한걸. 지금 가진 가장 선명한 것인데도.
상체를 반대 방향으로 휙 돌린다. 사진을 눈앞으로 내밀어 풍경과 맞춘다. 휴대폰을 꺼낸다.
찰칵.
#Fourth shot
센도 아키라는 주말에 낚싯대를 손질하며 열여덟 살을 회상한다.
주말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된 이후로 센도는 전국의 낚시터를 섭렵했다. 다른 취미도 많았다. 스킨스쿠버 다이빙. 캠핑. 등산. 아저씨 같은 취미라고 모두 웃었지만.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아저씨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아웃도어가 좋았다. 센도는 자연을 사랑했다.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경계심이 없지만 선을 넘으면 순식간에 도망치는 야생의 존재들. 그 안에 녹아드는 게 좋았다. 도시에 밀집한 사람 사이의 선을 민감하게 가늠하고 필요하면 당기거나 밀거나 넘으면서 성과를 올리다가. 자연스러운 존재들에 둘러싸이면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스스로도 자연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어서.
혼자는 중요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여럿이 있으면 끝내 자연스럽기 어렵다. 적어도 혼자만큼은.
이 조건을 지킬 수 있게 된 건 얼마 안 됐다. 5년... 아니 이제 6년인가. 센도는 가끔 시간의 흐름을 잘 가늠하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사귀던 연인은 6년째에 결혼 얘기를 꺼냈다.
세간에서 보기에는 오히려 늦은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인은 직업이 있었고 쉽게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창업 초기 센도의 미친 업무시간도 이해해 주었고. 어쩌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센도의 회사가 자리 잡기를 기다려줬는지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갑작스럽다고 느꼈다. 조금 당황한 티가 났던 것 같다. 가까이 보낸 세월이 긴 만큼 그런 날것의 반응을 연인에게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연상이었던 연인은 솔직하게 말하면 대다수를 용서해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살다 보니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고 고백하자 납득했다. 센도가 시간 개념이 얼마나 없는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짜증이나 서운함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 아마 그런 것이 처음부터 조금씩 쌓였을 것이다. 머리로는 납득해도 가슴에는 자국이 남는 일들. 잘잘못을 따져 보면 대체로 센도가 죄인이리라.
결정적인 파탄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터졌다. 상견례를 마치고 날짜를 잡고 식장을 잡고. 신혼집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할 때였다. 신축을 살 것인지 주문 제작을 할 것인지. 가능한 대출 규모를 맞춰 보느라 서로의 재산을 공개했다. 예금이나 스톡옵션이나 학자금 대출 같은 부분에서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부동산에서 발생했다.
연인은 센도에게 숨겨진 집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센도는 숨긴 적이 없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을 뿐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부터 의아했다. 센도는 언제나처럼 있는 그대로 말했다. 고등학교 때 살던 카나가와의 맨션이라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연인은 순식간에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했던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낯설었다. 센도는 연인에게 그런 통속적인 가능성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런 이유로 간직한 공간이 아니다.
연인은 애써 떨림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그 맨션은 처분하면 얼마 정도냐고 물었다.
센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처분할 생각이 없다고.
거기서 끝내 좁혀지지 못했다. 연인은 폭발했다가. 침묵했다가. 애원했다가. 협박했다가. 잠시 시간을 갖자고 하고. 울기도 하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센도는 이 모든 과정을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남 일처럼. 실제로 남 일이었다. 센도의 눈에는 상대방이 6년을 만났던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연인이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인 적이 없었다. 아마 피차 마찬가지였겠지.
약혼은 깨졌다. 청첩장을 뽑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 정도가 내막을 알았다. 센도는 향후 10년 정도는 소개팅을 거절하기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소문이 날 만큼 나면 제안 자체가 사라지겠지만. 6년 관계를 정리하기에는 지나치게 냉정한 사고방식이었다.
그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센도가 선명하게 깨달은 한 가지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포기할 수 없는 우선순위. 열여섯에서 열여덟까지의 카나가와를 간직하는 것과 스물하나에서 스물여섯까지의 관계에 영원을 맹세하는 것. 만약 공존할 수 있었다면 그대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센도에게는 비교할 수 없었다. 미래는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혼자라도 적당히 행복하다.
과거는 다르다. 두 번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살고 있다면. 어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결코 빼앗길 리 없다. 그게 누구라도 해도.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는 소중한 것.
센도는 그걸 깨달았던 것이다.
가령 열여덟 살의 어느 여름날.
내일은 네가 좋아하는 걸 하자. 그 말 한마디로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낚시 포인트까지 기꺼이 와 줬던 사람.
이상하게 물고기가 잘 잡히는 곳일수록 그늘이 없다. 마치 수중생물들이 육지 포식자의 약점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땡볕에 한참을 앉아 있어야 할 텐데도 불만 없이 제자리에 쪼그리는 루카와를 일으켜서 캠핑 의자 하나를 깔아줬다. 루카와가 등을 푹 기대면서 주저앉자 턱없이 긴 다리가 예각으로 솟아오른다.
살짝 떠올라서 푹신푹신 매끄러운 머리카락에 벙거지 모자를 푹 씌워 주었다. 새까만 정수리는 보기만 해도 금방 여름 햇살을 흡수해서 달궈질 것 같다. 정작 센도는 모자를 안 쓴다. 머리 눌리니까. 이 모자도 중학교 때 쓰던 걸 옷장 구석에서 겨우 찾았다. 루카와는 모자로 눈썹이 가려지면 훨씬 순해 보인다. 사나운 눈매가 그늘에 덮이고 동그란 뺨이나 조그마한 입술에 시선이 꽂힌다.
낚싯대 끝보다 오밀조밀한 옆얼굴을 더 열심히 쳐다보았던 것 같다. 찌가 움직이는지 열심히 보고 있는 건 오히려 루카와다. 센도 쪽은 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왜."
"그냥."
센도는 루카와가 이쪽을 보지 않는 걸 십분 활용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생글생글 웃는다. 아예 턱을 괴고 구경한다. 루카와의 보이지 않는 눈썹이 살짝 굳어지는 걸 느낀다. 그래도 보지 말라고는 안 한다. 다정하기도 해라.
그 정도는 허락해 줘야지. 곧 떠날 사람인데.
그리고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걸 하기로 했으니까.
아 맞다. 센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카와가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킨다. 따라오지 말라고 손을 내젓는다. 나 잠시만. 앉아서 낚싯대 좀 봐줘. 고기 걸리면 저거 바다에 떨어진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방파제 뒤쪽으로 걷는다.
적당히 떨어지자 항상 보던 풍경 전체가 보였다. 항상 보던 풍경 가운데 앉아 있는 뒤통수도. 센도가 중학교 때 쓰던 모자도.
센도는 주머니에서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꺼내서 눈에 가져다 댔다. 셔터에 손을 댄 채로 크게 외친다.
"루카와!"
루카와가 돌아본다. 센도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루카와는 그 모습을 묵묵히 쳐다보다가. 움직인다. 낚싯대 쪽으로 가더니.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포즈를 취한다. 제법 낚시하는 사람처럼.
센도는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었다. 아마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게 센도가 마지막으로 찍은 루카와의 사진이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딱 한 번 가 본 낚시터를 찾았다.
미야기 부부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미야기 부부는 2년 전부터 도쿄에 살고 있다. 미야기 료타는 루카와와 같은 해에 미국에 갔고 한 해 늦게 NBA로 드래프트됐다. 키 때문에 언제나 평가 절하 당했지만 스피드와 드리블에선 이견의 여지가 없는 톱 수준이었던 미야기는 사쿠라기보다도 더 여러 팀을 경험했다. 스카우터들은 스피드를 불어 넣어 팀 컬러를 바꾸는 실험을 하고 싶을 때 미야기 료타를 찾았다. 필연적으로 지금까지 뛰었던 모든 팀의 중심이자 열쇠였다.
마지막 단기 계약이 끝났을 때 미야기가 국내 리그를 선택한 건 뛸 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야코와 아이 때문이었다. 이동거리가 살인적인 NBA 시즌 중에는 가족을 거의 볼 수 없다. 미야기는 아야코가 임신했을 때 귀국을 결정했다. 타지에서 출산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그리고 미야기 료타는 첫아이의 출산 순간을 놓치고도 견딜 수 있는 종류의 아빠가 아니었다.
물론 국내 리그도 원정을 가면 며칠 못 볼 때가 있지만 미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3월이면 시즌이 끝난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연봉 상승률 유지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번 것만으로도 아이 셋은 무난하다며 미야기는 킥킥 웃었다. 아야코가 김칫국 마시지 말라며 옆구리를 찔렀다.
20개월 아기는 순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루카와의 품에 금방 안겼다. 낯가림은 잠깐이었다. 저기로 가자, 여기로 가자고 적극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내려놓으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걷는 데에 재미를 붙였는지. 한 발 한 발 열심히도 디뎠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저 걷는 게 좋아서.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눕거나 기는 게 전부였던 세상이 엄청나게 넓어졌겠지.
"너 잘 웃네."
"그래요?"
미야기가 툭 던진 말에 루카와는 조금 놀랐다. 아야코가 맞장구를 쳤다. 오늘 아기를 보면서 내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모나리자처럼 알 듯 말 듯 했지만. 내가 그랬나. 루카와는 서른인데 아직도 말랑한 자기 볼을 무심코 만져 본다.
커다란 손등에 조그마한 아기 손이 겹쳐졌다.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저도 따라서 루카와의 볼을 만졌다. 말랑말랑. 쫀득쫀득. 루카와는 다소간의 아픔을 참고 생각보다 센 아기의 악력에 얼굴을 맡겼다. 미야기와 아야코가 닮은 얼굴로 킬킬 웃었다.
이 가족은 셋 다 얼굴이 똑같다. 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특히 웃을 때 비슷하다. 그게 보기 좋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루카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지금도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카나가와로 돌아가는 기차역까지 미야기가 차로 데려다줬다.
"아기도 있는데 오래 머물러서 죄송해요."
"너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저 서른 살인데요."
"하이고. 늙었네."
"캡틴이 더."
"이런 건 그대로고."
미야기가 킥킥 웃었다. 루카와는 미야기 료타를 아직도 캡틴이라고 부른다. 쇼호쿠 농구부 루카와 카에데의 마지막 캡틴이었기 때문이다. 아카기 타케노리는 본인의 졸업 전 마지막 윈터컵 예선부터 고리...가 아니고 아카기 선배가 됐다.
미야기와는 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자주 만났다. 주로 미츠이 히사시가 소집하는 술자리에서. 사쿠라기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너무 넓고 모두 바빴다.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부상 없이 잘 버티고 있다는 존재 정도면 충분했다.
"루카와."
"네."
미야기가 조금 뜸 들이다가 핸들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랑 살고 싶냐?"
루카와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대답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무시했다는 오해를 주기 싫어서 일단 아무 말이나 한다.
"저 가족이랑 살아요. 카나가와에서."
"그건 알아. 그게 아니고."
미야기가 한 쪽 손으로 제 곱슬머리를 마구 헝클듯이 긁적인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미야기는 왁스로 머리를 세팅하지 않는다. 아기가 머리카락 만지고 당기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손이 입에 들어간다고.
"나는... 아야코가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귀국했어. 그건 집이 아니더라고. 나한텐 그래."
긴 하루가 끝났을 때.
넌 누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번에야말로 루카와는 완전히 침묵했다.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루카와는 그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미야기도 재촉하지 않았다. 생각해 봐. 간다. 또 보자고. 그렇게 툭 작별했을 뿐이다.
그래서 루카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진을 한 장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열여섯 살 때 딱 한 번 가 본 낚시터를 찾았다. 낚싯대도 미끼도 아이스박스도 아무것도 없이.
남들은 그냥 방파제라고 생각하는 이곳을 루카와는 낚시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무도 낚시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루카와는 굳이 방파제 끝까지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 방파제가 시작되는 도로 끝에 주차 시 충돌 방지를 위해 반으로 잘려 심어진 폐타이어 위로 걸터앉았다.
이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저 끝에. 누군가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
내일은 네가 좋아하는 걸 하자. 그렇게 말했을 때 센도는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다.
그날 센도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다짜고짜 학교 앞으로 찾아와 바닷가로 데려갔을 때완 달랐다.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대신 평소보다 루카와의 얼굴을 자주... 오래... 뚫어져라 쳐다봤다. 낚시를 하고 싶다더니. 사람을 낚으려는 것일까. 루카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절대 그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고 낚싯대 끝이랑 눈싸움만 했다. 나 한 사람이라도 낚시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듯이.
어쩌면 혼자 하던 일에 동행이 있는 게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센도 아키라 같은 사람도 외로움을 탄다면... 혼자 있어도 그토록 완전해 보이는 사람조차도... 가끔은 그런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그때 옆자리를 차지한 게 자신이라면. 감사할 만한 행운이다.
루카와는 혼자 있는 것도 여럿이 있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혼자 있는 건 조용해서 좋았고. 다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센도와는 함께 있어도 조용했다. 그러면서도 심심하지 않았다. 최고였다. 이제 생각해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긴 하루가 끝났을 때.
긴 여름이 끝났을 때...
누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생각할수록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질문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입에 올릴 수 없으니까. 가슴을 꽉 채운 다섯 글자 이름 대신에 아무것도 아닌 공기만 뱉는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만 생각한 30년 인생이었다.
일말의 후회도 없다. 많은 것을 얻었고 어떤 것은 잃었다. 단 한순간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돌아올 정도는 재능과 행운을 타고난 덕분에. 그게 재능이고 행운이었다는 것도 비교적 최근에야 깨달았다. 주변을 볼 틈도 없이 앞으로만 달릴 때는 잘 몰랐다.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걸.
어떤 건 아무리 좋아해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가치 있다. 아마도 영원히?
그렇다면 나는 이미 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루카와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눈높이로 들어 올려 눈앞의 풍경과 맞추었다. 바닷바람에 사진 모서리가 휘어진다. 휴대폰을 꺼낸다.
찰칵.
#Last shot
월요일. 마케팅 부서에서 센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새 광고 기획을 맡을 대행사 경쟁 PT가 끝났고.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이 예산을 좀 세게 불러서 재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긴급한 건이었다.
숫자만으로 판단할 수도 있었지만. 센도는 잠깐 고민한 뒤에 기획안을 요약해서 비교해 달라고 했다. 수익 대비 적절한 마케팅 예산은 어차피 정해져 있고 전담 부서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따로 부탁해서까지 예외를 만들고 싶은 가치가 있나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금방 미팅이 꾸려졌다. 역시 마케팅. 재빠르다. 핵심 비주얼을 중심으로 기획의 차이를 알려 주는데.
레퍼런스 사진을 보고 숨이 멎었다.
"유명한 농구선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이라고 해요. 14년 전 날짜가 찍힌 사진을 같은 장소에서 디지털로 다시 찍은 건데. 사진 속엔 본인이 있고 실제 풍경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찍어 준 사진을 가져가서 본인이 다시 찍고 있는 것 같아요.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련하죠. 추억을 암시하고요."
아날로그와 스마트폰이 만나는 지점을 강조하기에 딱이에요. 돌이킬 수 없는 혁신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도 잘 붙고. 지금 카메라 달린 휴대폰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중이라 곧 유행할 것 같다는 감이 와요. 아직 기사가 나올 정도로 유명하진 않은데. 빨리 선점할수록 효과가 커질 거예요.
침묵으로 그 사진을 응시하는 센도를 보고 마케팅 팀장은 됐다 싶었는지 밝게 덧붙인다.
"사진 느낌 있죠? 이 선수 페이스북에 딱 이 사진 네 장만 있대요. 솔직히 비주얼에서 이만한 퀄리티를 뽑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에요. 뭐 원본만큼은 못하더라도 워낙 컨셉이 좋으니까. 선점이 우선일 것 같고. 돈 들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고."
사실 센도는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
혹시 그게 첫사랑이었나 싶었던 순간들이 거기 다 있었다.
한참 뒤에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디테일. 캡처 속 하트 숫자가 몇백 단위다. 매너 위반 아닌가. 찍은 사람 허락도 안 받고. 센도는 피식 웃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자 마케팅 팀장이 깜짝 놀랐다. 센도는 보통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상대방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190cm가 갑자기 눈앞에 서면 대부분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런 센도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기립하는 기세에 그 장소의 모든 사람이 흠칫했다.
그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센도는 팀장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것도 드문 일이다. 센도는 퍼스널 스페이스가 아주 넓다.
"진행하세요. 마케팅 판단에 맡길게요."
센도는 그대로 나왔다. 등 뒤의 회의실에서 다급하고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어쩌면 센도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다음에 올라올 사진이 어딘지 안다.
센도는 그 길로 대표실로 갔다. 다짜고짜 일주일 휴가를 쓰겠다고 말했다. 센도는 회사에서 연차가 가장 많이 쌓인 사람 중 하나다. 대표는 센도의 기세에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금방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주 바쁜 거 없으면 뭐. 어디 여행이라도 가게? 낚시? 캠핑?"
센도가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었다.
"고향에 가 보려고요."
대표는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즉시 부서 인수인계를 가다듬고 반차를 쓴 뒤 회사를 뒤로했다. 나는 듯이 빠져나가는 센도의 뒷모습에는 아무리 대표라도 당황했다. 더 놀란 부하 직원들에게 집안에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캐묻지 말라고 수습했다.
거짓말이다. 센도는 도쿄 출신이다. 사람들이 그리운 것을 두고 온 장소에 갈 때 으레 하는 말을 따라 해 봤을 뿐이다.
운전대를 잡고 그 길로 카나가와로 향한다.
센도는 다음에 올라올 사진이 어딘지 안다.
그리고 루카와는 센도가 그걸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깜찍한 서프라이즈를 갚아 줄 때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좋아했던 사람이 살던 집 앞에 섰다.
평범한 맨션이다. 그때보다는 훨씬 낡았다. 당연하다. 중학생 나이만큼 축년 수가 더 붙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하얗고. 깔끔하고. 딱 한 번밖에 안 와 봤는데 기억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본다. 이불 위에 누워 있는 옆얼굴. 감은 눈에 드리워진 속눈썹 위로 얌전하게 그늘을 씌우는 짙은 눈썹 뼈. 베개와 이마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앞머리. 평소처럼 바짝 서 있지 않아서 낯설고 편안하다. 잘생긴 광대가 뻗어 있고. 그 아래 약간 눌려서 벌어진 모양 좋은 입술.
지금도 가만한 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을 찍던 순간을 회상한다.
낚시에는 정해진 끝이 없었다. 그러니까 농구 시합보다는 일 대 일에 가까운 취미였다. 루카와의 하품 주기가 짧아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배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센도는 킥킥 웃었고 기어이 루카와한테 한 대 맞았다. 아픈 척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을 했다.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을래?"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는 종류의.
짝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가는 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가망이 없다면 후자일지도. 아니 오히려 지금 이렇게 사진 한 장이라도 손에 남은 건 결과적으로 전자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열여섯의 루카와는 아직 센도가 자신에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다만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이 자랑도 아니고 공치사도 감사도 아니고 마치 이별처럼 제 귀에 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 이후로 센도가 끝이 다가오는 경기에서 지고 있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고.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웃고. 잊지 않고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가져와서 사진을 찍을 때. 그 모든 것을 특별함의 범주에 넣고 의식하게 됐을 때...
아무리 루카와라도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저 이름을 붙일 줄 몰랐을 뿐이다.
서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첫사랑이었다는걸.
가망도 없는 짝사랑.
그날 센도는 집에서 무려 손 요리를 해 줬다. 딱히 준비한 건 없었는지 냉장고 안을 보고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장을 봤다. 같이 사는 사람처럼.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낯부끄러운 짓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을까.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는 고로케를 산더미처럼 샀고. 반찬 코너에서 루카와가 좋아하는 걸 몇 가지 고르고. 결국 센도가 만든 건 두부 우엉이 들어 간 된장국과 샐러드뿐이었다. 밥은 냉동실에 얼려 둔 걸 데웠다. 주말에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둔다고 했다. 매번 하기 귀찮다고.
배를 채우고 나니 언제나처럼 잠이 왔다. 그렇지만 애써 쫓아내며 설거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밥을 얻어먹은 자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열받게도 센도는 드러내 놓고 못 미더워했다. 오기가 생겨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비누 칠만 해 줘. 내가 헹궈서 넣을게. 너는 위치를 모르니까...
단신자용 맨션의 좁은 주방에서 거구의 청년 둘이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설거지를 했다. 쌓인 게 없는 싱크대엔 방금 먹은 그릇 몇 개뿐이라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흐르는 물속에 있어서 차가워진 센도의 손등과 닿았을 때. 자신의 손등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해야 할 일을 다 해내자 뿌듯함과 함께 미뤄뒀던 잠이 몰려왔다. 루카와의 눈에 졸음이 가득 찬 걸 보고 센도는 다정하게 웃었다.
센도는 루카와에게 여분의 칫솔과 잘 때 입을 편한 옷, 수건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욕실로 보내줬다. 혼자 사는 센도의 화장실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았다. 적어도 루카와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누나들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쉐이빙 크림. 면도기. 헤어 왁스. 샤워 코롱 같은 낯선 것이 늘어선 세면대를 보면 왠지 센도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말리기 귀찮아하는 루카와를 선풍기 앞에 붙잡아 놓은 것도 센도였다. 어릴 때 엄마가 해 주던 것처럼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줬다. 물론 힘은 훨씬 셌다. 아프잖아. 툴툴거리자 그럼 얌전히 드라이어로 말리라고 손에 쥐여줬다. 틀어 놓고 졸았더니 그러다 머리카락 다 탄다고 결국 손수 말려줬다. 지금 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짝사랑 상대 앞에서 엄청난 추태였다. 멋진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란데 효도를 받고 말았다. 이러니까 가망이 없었던 거겠지. 놀랍지가 않다.
축축함이 사라져 개운해지자 더 이상은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센도의 침대 위였다. 새벽이었다. 시계가 보이지 않는다. 낯선 집이라 위치를 잘 모르겠다. 창밖이 어스름히 밝아지고 있었다. 여름 해는 일찍 뜬다. 센도가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센도를 발견했다.
이쪽을 향한 옆얼굴이 바보 같았고.
아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두고 가기 아까울 만큼.
루카와는 그때도 그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한참 동안 센도의 옆얼굴과 흐트러진 앞머리가 아무렇게나 가로지르는 곧은 콧대 같은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대로는 잠들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조심히 손을 뻗어 센도가 책상 위에 던져둔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잡았다.
센도가 했던 것처럼 사각형의 플라스틱에 눈을 맞대고. 네 모서리만 표시된 사각형 안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광경을 한가득 맞춘 뒤에. 한밤중에 보석을 훔치러 온 도둑처럼 살금살금 셔터를 눌렀다.
찰칵.
생각보다 소리가 너무 컸다.
센도가 움찔거렸다. 루카와는 카메라를 한 손에 꼭 쥔 채로 얼른 침대에 누웠다. 끝내주게 자는 연기를 하다가 그대로 자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한 밤일 수도 있었는데... 어른이 된 루카와는 어설프고 서툴렀던 열여섯 살의 자신이 우습다. 이제 와서는 불쌍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귀엽기도 하고. 어쨌든 잘 모르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루카와는 다음 날 아침 손에 쥐고 있던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들키지 않으려고 냅다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대로 집에 왔고.
그게 정말 끝이었다. 센도와는 그 해 인터하이 카나가와 예선 료난 대 쇼호쿠 경기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다. 쇼호쿠가 승리했고 골 득실로 카이난을 누르고 료난과 나란히 본선에 진출했다. 료난에게는 첫 전국 대회 진출이었다.
정신없는 인터하이 일정 속에서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는 금방 잊혔다. 14년 뒤 책상 서랍 구석에서 발견될 때까지.
맨션 앞에서 한참 사진을 바라보며 추억하고 있었더니 보안으로 잠긴 공동 현관문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허둥지둥 길을 비켜주다 얼떨결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루카와는 조금 망설이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 앞까지만 가 볼 생각이었다. 센도라고 쓰여 있던 문패가 이제는 무엇으로 바뀌어 있을지 조금은 관음증에 가까운 호기심이 들었다. 부디 주민을 마주쳐서 수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않기를 바라면서.
층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알던 문 앞에 섰다.
놀랍게도 문패가 그대로였다.
루카와는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괜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손안의 사진과 문패를 번갈아 보게 된다. 바꾸는 걸 깜빡했나? 그 후에 아무도 이사를 오지 않았나?
하긴 카나가와가 그렇게 인구가 증가하는 현이라고 볼 순 없지. 거기다 이런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이라면. 루카와는 혼자서 금방 납득했다. 손끝으로 문패를 쓸어 본다. 센 도. 오랜만에 활자로 된 이름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나 기억 속이 아니라 외부에 물성으로 존재하는 이름이 감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얀 문에는 외시경이 하나 덜렁 있다. 루카와의 키보다 훨씬 낮은 위치다. 이 문패가 여기 그대로 있다는 건 이 집에 아무도 안 산다는 거의 확실한 증거다.
그러면 잠깐 안을 봐도 되지 않을까?
루카와는 손안의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이 사진은 기억 속의 현장과 겹쳐 찍거나 그걸 어딘가에 올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어차피 들어가 볼 수도 없고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야외 농구장이 주차장이 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변화겠지만. 혹시라도 그때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파편이라도 볼 수 있다면...
루카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정했다.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 나쁜 짓이 아니야. 이런 다짐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쁜 짓 같지만.
언젠가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에 눈을 맞댔던 것처럼.
가만히 눈동자를 외시경에 가져다 댄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있었다.
루카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바닥을 치고 올라왔는지 가슴팍의 티셔츠 자락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뛰고 있다. 귓가에서 엄청나게 시끄럽게 울린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간다.
루카와는 머릿속으로 필사적인 사과부터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나 범죄자가 아닙니다. 저는...
문을 열고 나온 건...
센도 아키라였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마주한 두 얼굴 사이에 찬란한 여름이 멈춰 있다.
먼저 입을 연 건 루카와였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14년의 세월을 넘어서 만난 사람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다녀왔어."
오랫동안 멈춰 있던 여름이 다시 흐른다.
센도가 그리움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눈썹 끝은 아래로, 입꼬리는 위로. 파도같이 일렁이는 곡선을 그린다.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을 틈도 없었다. 14년의 세월을 넘어서 만난 사람이라도. 기다렸던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어서 와."
안에서 자꾸자꾸 끓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도저히 누를 수가 없어서 루카와는 웃었다.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서른이 가기 전에.
여름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하나.
루카와는 이제 알 것 같다.
다음 여름을 기다린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