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Purple Rainy Night

라렛 (@lapiscarlet)

   톡, 토옥-.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투명한 유리창을 쉼 없이 두드렸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유리에 닿은 비 그림자를 방 안 가득 드리웠다. 지루할 새 없이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서태웅은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온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분명 보송보송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는데, 몸은 저 창 밖의 비를 맞는 것만 같았다. 태웅은 늘어진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그제야 태웅은 제 가슴께에 묵직한 팔 하나가 올라와 있던 것을 알았다.

   “깼어?”

   “…….”

   “괜찮아? 열이 좀 나던데….”

  처음부터 옆에 엎드려 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 태웅의 이마를 짚었다. 커다란 그의 손은 서늘한 것이 기분 좋았다. 그는 제법 피곤한지 쌍꺼풀이 짙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하품을 했다.

   “아직도 뜨겁긴 하네.”

  그의 손이 떨어지자 이마의 열감이 새삼 느껴졌다. 태웅은 제 손으로 조금 전 그가 짚어주었던 이마를 만져보았다. 기분 좋게 시원하던 그와 달리 미적지근한 제 손 때문에 열이 더 오르는 것만 같았다.

   “버스나 전차 다니려면 아직 멀었어. 그때까지 더 자.”

  침대 옆 작은 협탁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그는 태웅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여전히 태웅의 몸 위로 올린 제 팔을 치울 생각이 없는지 그는 그대로 다시 엎드려 누웠다. 베개도 없이 맨 침대 위에 기댄 머리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딱 하나 있던 베개는 서태웅의 자리에 놓여있었다. 태웅은 그 베개를 그의 머리 밑으로 밀어주었다.

   “왜? 그냥 가게?”

   “…….”

   “갈 수 있겠어?”

   “……어디로 가요?”

  연신 몰려들던 잠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어디로 가냐는 서태웅의 말에 윤대협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분명 녀석은 지금 존댓말을 썼다.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면 정말 존댓말이었다. 초여름의 무더위에 반나절동안 이유 없이 1on1을 해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던 당돌한 후배가, 늘 이기겠다는 집념으로 부딪쳐오던 그 서태웅이, 어제는 무려 비까지 맞아가며 상대해줘도 반말만 찍찍하던 녀석이! 지금 존댓말을 했다. 정말 서태웅이 맞는 것일까, 의심마저 들었다. 어슴푸레한 방 안, 그것도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더 어두워서 녀석의 얼굴이 좀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저기, 서태웅?”

   “…….”

   “…태웅아?”

   “그거 나예요?”

  이유 없이 밀려드는 깊은 한숨을 가득 내쉬며 윤대협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이거 기억상실이라든가 그런 것일까? 믿을 수 없는 마음에 대협은 헛헛한 웃음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태웅이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보다 존댓말을 쓰는 현실이 더 믿기지 않았다. 혹시 이 녀석 장난치는 거 아닐까, 그 서태웅이 장난 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협은 확인하고 싶었다.

  “어제 내가 너 바다에서 주웠는데… 정말 기억 안나?”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바닷가의 야외 코트에서 서태웅을 만나서 또 1on1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너 바다 너머에서 온 것 같던데?”

  약간의 과장이랄까? 어제 서태웅은 전국 대회에서 막 돌아왔다고 했다.

   “진짜 아무것도 생각 안나?”

  까만 앞머리를 살랑 흔들며 태웅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인지 좀처럼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녀석이 가만히 윤대협을 주시했다. 마주한 그 시선에 대협은 괜스레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거 설마 진짜 믿는 걸까? 의심 하나 없이?

 “너 몸은 어때?”

  겨우 언어는 기억하지만 제가 누군지 조차 잊어버린 녀석의 운동신경을 확인해야겠다. 대협은 태웅의 팔을 잡아 끌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비틀, 바로 걷지 못하는 서태웅의 몸이 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하아… 서태웅. 네가 인어냐?”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인어가 처음 제 두 다리로 걷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쪽으로 두 다리를 접은 채 주저앉은 녀석에게 손을 내밀자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대협은 다시 밀려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 허리를 굽혀 태웅의 손을 잡아 당겼다. 거의 윤대협의 품에 안기다 시피 일어선 태웅은 두 다리가 미미하게 저릿한 것을 느꼈다. 꼭 남의 것 같은 느낌에 다시 주저앉고만 싶었다.

   “걷는 게 힘들어?”

   “이상해요.”

   “뭐가?”

   “잘 모르겠어요.”

  서태웅의 양 손을 맞잡고 대협은 한 걸음, 한 걸음 녀석이 걷는 것을 도와주었다. 움직이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어 보였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맞잡은 팔도 조금 떨리는 것이 그냥 근육통인 것 같다. 솔직히 윤대협도 조금 몸이 뻐근했다. 아프게 몸을 때리던 거센 비를 맞으며 녀석이 쓰러질 때 까지 농구한 것이 잘못이었다. 서태웅의 스태미나가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녀석과의 승부에 재미 들려서 끝을 낼 줄 몰랐다. 그 자업자득으로 빗속에서 서태웅은 쓰러져 기억을 잃었고, 윤대협은 지금 미칠 듯 곤란했다.

  “진짜 인어 같네.”

  난생 처음 제 다리로 걷는 인어처럼 어설프게 따라오는 서태웅과 그런 녀석을 잡아주는 자신의 기구함에 윤대협은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눈물 한 방울 안 나오겠지만.

  “내가 인어예요?”

  웃음을 참느라 진짜 눈물이 날 뻔 했다. 서태웅 입에서 인어란 소리가 나올 줄이야. 그러고 보면 제법 어울렸다. 서태웅이 인어라… 낚시 갔다가 정말 인어를 낚아오면 이런 느낌일까? 옛날부터 인어는 그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홀린다던데, 서태웅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다리 저리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웅을 보며 대협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가득 걸렸다.

  “너 인어라 그래. 네 다리 원래 꼬리였잖아.”

  침대에 태웅을 앉혀놓고 대협은 녀석의 허벅지를 양 손으로 감쌌다. 잠시 움찔 하던 허벅지는 긴장된 근육 그대로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익숙한 이 느낌은 근육통이 분명했다. 대협은 커다란 양 손 안에 넉넉히 잡히는 태웅의 허벅지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서태웅은 역시 평소와 달랐다.

  “그쪽은 내 꼬리 어떻게 봤어요?”

  야, 너, 윤대협, 선배도 아닌 그쪽이라는 생소한 호칭에 대협은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꼬리를 어떻게 봤냐니, 본적도, 존재하지도 않는 꼬리를 믿는 서태웅의 순수함은 원래 제 것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은 여파인지 잘 모르겠다.

  “나 취미가 바다낚시거든… 근데 어느 날 네가 놀아달라고 찾아왔었어.”

  “내가요?”

  “응. 서태웅 네가 먼저.”

  이번에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약간 각색했을 뿐. 다리를 풀어주느라 고개 숙인 윤대협의 얼굴이 세팅 안한 앞 머리칼로 슬며시 가려졌다. 확실히 익숙하면서 낯선 생소함에 태웅은 저도 모르게 대협의 얼굴을 덮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왜?”

  “그쪽이 궁금해서요.”

  “형이라고 부를래?”

  “…….”

  “대협이형.”

  진짜 서태웅이라면 절대 불러주지 않을 호칭을 일부러 붙였다. 지금이라도 서태웅이 장난친 것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두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형은 무슨 형이냐고, 인어라고 거짓말이나 시켰다고 따진다면 그러는 너도 기억을 잃은 척 장난치지 않았냐고 맞받아칠 심산이었다. 작게 달싹거리는 태웅의 입술을 바라보며 윤대협은 녀석에게 받아칠 변명들을 생각했다.

  “…대협이형.”

  아무래도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대협이형.”

  서태웅이 진짜 기억을 잃었다. 입 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리며 웃는 녀석의 얼굴은 윤대협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가득했다. 평소의 서태웅이라면 이렇게 웃지 않겠지, 싶다가도 겨우 비 좀 많이 맞고 열이 나서 쓰러졌다고 사람이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나? 혹시라도 이 녀석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대협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웅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풍성한 머리칼에 숨겨진 녀석의 머리통이 생각보다 작았다. 여기 저기 살펴보는데 딱히 부어오르거나 아파하는 곳은 없었다. 다행히 머리를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병원을 데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는 없을 테니까.

 

  비에 젖고 잔뜩 모래가 묻은 태웅의 옷가지들을 다시 입혀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잠시 욕실 바닥에 엉망으로 섞여있는 태웅과 자신의 옷을 쳐다보던 대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귀찮아도 빨래를 돌렸어야 했다. 결국 대협은 제 옷장에서 능남 농구 부 티셔츠 두 장을 꺼냈다.

  “태웅아, 이걸로 갈아입자.”

  손에 받아 든 티셔츠를 말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 서태웅 앞에서 대협은 제가 먼저 입고 있던 셔츠를 훌렁 벗어버렸다. 잘 접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는 모습까지 유심히 지켜보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 더 편하고 빨랐다. 태웅은 윤대협이 옷을 벗었던 동작을 똑같이 따라하며 셔츠를 갈아입었다. 셔츠는 커도 상관없었는데 바지는 아무래도 달랐다. 허리가 맞지 않자 골반으로 걸린 바지의 기장은 서태웅의 발을 반이나 가려버렸다. 이러다 넘어지지 싶은 마음에 윤대협은 녀석의 아래 무릎을 꿇고 바지를 접어주었다.

  “그냥 서있으면 넘어져. 내 어깨 짚어.”

  어깨 위로 끌어당긴 태웅의 손이 어설프게 어깨를 쥐었다. 힘을 뺀 채 잡고 있는 느낌이 대협의 어깨를 가만히 간질였다. 어쩐지 어린 아이를 돌보는 느낌이었다.

 윤대협과 대화하면서도 그 의미 자체까지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일상생활, 그리고 간단히 준비한 아침식사까지. 태웅은 일단 대협의 말을 듣고, 그가 하는 행동을 본 뒤에야 제 몸을 움직였다. 막상 행동을 해보면 십여 년간 몸에 밴 일상의 행동은 거리낌 없이 이어졌다. 다만, 윤대협의 자취방이라는 낯선 공간이 태웅에게 이질감을 남겨주었고 자신이 인어라는 말을 믿게 만들었다.

  얌전히 제 말을 따라주는 백지 같은 녀석에게 윤대협은 본의 아니게 가스라이팅을 해버리고 말았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머리를 세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웅과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이것도 따라하려나? 조금 전 세수를 하다가 아무생각 없이 쉐이빙폼을 바르던 자신을 따라 뽀송뽀송한 턱에 거품 수염을 찍던 서태웅이 떠올랐다. 넌 필요 없다며 아직 부드러운 솜털이 남아있는 턱을 닦아주자 녀석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것도 형아만 하는 거야.”

  또 삐죽, 작은 입술이 불만을 내뱉었다. 거울 너머로 태웅을 바라보며 윤대협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윤대협이 하는 건 다 따라 하려는 게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왜 너만 하냐고 되묻지 않는 것조차 서태웅답다. 창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대협은 머리를 천천히 제 머리를 매만졌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머리손질에 지루해진 태웅이 침대에 기대앉아 잠들었다. 이렇게 보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드라이기를 잡던 손을 놓아버리고 윤대협은 커다란 제 손으로 앞머리를 쓱쓱 올려 세웠다.

  “태웅아, 태웅아?”

  무겁게 감기는 눈을 겨우 들어 올리자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윤대협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역시 시원한 그의 손에 기분이 좋아졌다. 태웅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으로 제 뺨을 기대었다. 그러나 대협은 제게 기대오는 녀석을 눈치 채지 못하고 얼른 손을 빼버렸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허전하게 남았다.

  “슬슬 나가자. 오전 연습 끝나기 전에.”

  1인 청소년 가구 윤대협은 본의 아닌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장을 뒤져도 작은 우산은커녕 우비조차 없었다. 서태웅은 처음부터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결국 남은 우산은 현관에 기대놓은 것이 유일했다. 나가자마자 보이는 첫 번째 편의점에서 우산부터 사야겠다. 그다지 작은 우산은 아니었는데 문짝만한 사내 녀석 둘이 같이 쓰다 보니 윤대협은 몸의 반절 가량이 비에 흠뻑 젖었다. 차갑게 달라붙는 옷을 느낄 때 마다 대협은 태웅의 어깨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크게 젖어있지는 않았다. 아직 열이 다 떨어지지 않았는데 괜히 무리 시키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녀석을 살폈다.

  “걷는 거 힘들지 않아?”

  “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태웅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윤대협은 우산을 조금 더 녀석의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한 우산을 같이 쓰는 것의 유일한 이점을 찾았다. 빗속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윤대협은 편의점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연실색한 송태섭의 옆에서 정대만이 손 안에 쥐고 있던 농구공을 놓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공이 통통 튕기며 서태웅 쪽으로 굴러갔다. 태웅은 제게 굴러온 공을 피해 윤대협의 팔을 잡고 그의 뒤로 숨었다.

  “야, 송태섭 지금 봤냐? 이거 서태웅 진짜 맞아?”

  “윤대협 너 우리 애한테 무슨 짓 했냐?”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 달려드는 태섭을 피해 한걸음 뒤로 물러서던 대협은 제 뒤에 서있던 태웅의 발을 살짝 밟아버렸다. 짧게 미안하다는 대협에게 괜찮아요 라며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녀석은 아무래도 자신들이 아는 서태웅이 아니었다. 아니, 서태웅은 서태웅이었는데 거푸집만 서태웅이었다.

  “서태웅, 이리 와.”

  손가락을 까닥이며 오라는 정대만의 말에 태웅은 대협의 팔을 더욱 세게 부여잡았다. 고개를 가만히 흔드는 부드러운 까만 머리카락이 윤대협의 등을 어렴풋이 간질였다.

  “얼. 른. 와.”

  한 글자씩 힘주어 말하는 정대만의 협박조에 태웅은 제 몸을 완전히 윤대협의 등 뒤로 숨겼다. 늘 제 잘난 맛에 사는 마이페이스 서태웅이었지만 그래도 선후배가 무엇인지는 아는 녀석이었다. 선배 말도 무시한 채 윤대협의 등 뒤로 숨어버린 태웅을 보며 대만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하하, 태웅아. 이리 와. 괜찮아. 선배들이잖아.”

  등 뒤로 숨어버린 녀석의 손을 잡아 끌자 잔뜩 경계하는 듯 눈을 날카롭게 치켜 뜬 태웅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야. 송태섭.”

  “야, 이 새끼야. 말로 설명을 해. 이렇게 된 게 어떤 건데?”


  이상해진 서태웅한테 능남 티셔츠를 입혀 와서 이렇게 됐다는 말로 퉁 치려는 윤대협한테 박치기 정도는 날려도 되지 않을까?

  “그게 좀….”

  힐끔 태웅을 향한 대협의 시선에 태섭은 겨우 화를 삭였다. 반절이 폭삭 젖은 윤대협을 잡아 끌며 체육관 밖으로 향했다.

  “윤대협, 너만 따라 나와. 대만선배, 서태웅 좀 봐줘요.”

  “알았어. 잠깐만.”

  대협은 송태섭에게 잡힌 팔을 빼내고 태웅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치켜뜬 태웅의 시선이 윤대협과 마주치자 아주 살짝 풀어졌다. 대놓고 안심하는 그 시선에 대협은 어딘지 모를 마음속이 간질간질한 것을 느꼈다.

  “금방 다녀올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태웅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대협은 태섭의 뒤를 따라갔다.

  정리하자면 전국 대회에서 막 돌아온 어제, 서태웅은 능남 근처 야외 코트에 갔고 기록적인 집중호우라고 난리치는 와중에 두 사람은 장대비를 맞으며 농구를 하다가 서태웅이 쓰러졌다.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비도 오는데다 시간이 늦어서 윤대협은 녀석을 제 자취방으로 데려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여기까지 데려왔다.

  “기억을 잃었다고?”

  “봤잖아. 내 뒤에 숨는 거. 서태웅이 그럴 녀석은 아니지.”

  “맞아. 그것도 하필이면 네 뒤에 숨다니.”

  한쪽 눈썹만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린 송태섭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연신 두드렸다. 장난이라고 치부해버리자니 윤대협은 몰라도 서태웅은 그럴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아직 전국 대회의 피로가 덜 풀려서일까? 머리가 지끈 아팠다.

  “일단은 알았어. 데려와 줘서 고맙다.”

  “그럼 간다.”

  “어? 야, 그냥 가면 어떻게 해?”

  그대로 미련 없이 돌아가려는 대협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태섭 혼자서는 힘들었다. 일단 학교에 말하고, 서태웅 네 집에도 말을 해야 했고….

  “끝까지 책임져라. 윤대협.”

  윤대협이 한다며 기대를 모으던 능남의 마음을 지금 송태섭은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엄지를 치켜세운 태섭을 보며 윤대협은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의 송태섭에게 떠밀리다 시피 다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려온 서태웅이 다가왔다.

  “대협이형, 우리 돌아가요.”

  “야! 서태웅 너 이리 안 와!”

  체육관 가운데서 소리치는 정대만을 아랑곳 하지도 않은 채 태웅은 윤대협의 티셔츠 밑자락을 움켜쥐었다. 마치 자신을 두고 가버릴 것을 알아챈 어린아이처럼 녀석은 윤대협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 대만선배 좀 조용히 해요.”

  서태웅 때문에 성질을 부리는 정대만에게 뛰어간 태섭은 조금 전 윤대협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잔뜩 인상 쓰고 있던 대만의 미간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또 다시 떨어뜨렸다. 다시 한 번 태웅 쪽으로 농구공이 굴러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서태웅은 공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윤대협만 바라보았다.

  “대협이형.”

  언제나 후배들에게 들어온 대협이형이란 말이 이렇게 가슴을 저릿하게 조이는 것인지 몰랐다. 윤대협은 찡하게 제 가슴을 울리는 서태웅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이대로 녀석을 두고 혼자 돌아가기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곤란한데.”

  말과 달리 대협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서렸다.

 

   이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예보대로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비 덕분에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비 때문에 창문을 열 수 없었던 작은 자취방은 덥고 꿉꿉했다. 대협은 에어컨에서 냉방 외에 송풍이란 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더위를 타는 윤대협과 추운 게 싫은 서태웅의 합의점이었다. 별 생각 없이 켰던 냉방 때문에 입술까지 새파래진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서태웅을 본 순간, 대협은 바로 에어컨 코드를 뽑아버렸다. 녀석은 정말 물고기라도 되는 것처럼 집안 온도에 예민했다. 덕분에 대협은 땀이 났다 싶으면 하루에도 몇 차례 찬물로 샤워를 하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에어컨 온도를 최대한 낮추고 속옷 하나 달랑 입은 채 방 안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능남에 입학한 이후로 익숙해진 혼자의 생활에 서태웅 하나 더해졌다고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선 침대, 윤대협의 키에 맞추느라 가능한 큰 것을 들여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도 자다가 문뜩 뻗은 팔이 태웅의 말랑한 뺨에 닿고 뒤척거리던 다리가 녀석의 다리를 감는데, 작은 싱글 침대였다면 대협과 태웅 중 한 사람은-아마도 높은 확률로 윤대협이- 바닥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다음은 식사, 배가 고프면 대충 바깥음식을 사먹거나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니가 채워주신 냉장고를 털어 먹던 윤대협이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그래봤자 오므라이스나 카레 같이 학교에서 한번쯤은 만들어본 음식 뿐 이었지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한 숟갈 가득 머금고 작은 입술로 열심히 오물거리는 서태웅을 보며 대협은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리고 농구.

  -윤대협 오늘도 연습 안 나오면 내가 진짜 너 찾아간다.

  “집이 물에 잠겨서…”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냐!
  “진짜야. 우리 집 지금 물바다야”

  -확인한다. 윤대협.

  “영수야, 정리되면 바로 나갈게.”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윤대협을 찾는 안영수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차피 오늘도 대협은 연습 갈 마음 없었고, 언제까지 영수의 잔소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서태웅을 다시 데려오고 오늘로 닷새째, 윤대협은 무단으로 연습을 빠졌다. 비가 많이 와서…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여름 장마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태풍이 불어도 실내체육인 농구에 문제되지 않았다. 물론 비 때문에 꿉꿉하다든지, 체력적으로 늘어지는 것처럼 소소한 불편은 있었지만 연습을 쉬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연습을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오로지 서태웅 때문이었다. 서태웅의 상태를 능남에까지 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녀석만 두고 혼자 학교에 다녀오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아직 못 다한 안영수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대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서태웅은 어때?

  이번에는 송태섭이었다. 북산에 다녀온 이후 송태섭은 하루에 한 번씩 확인 전화를 해왔다. 이 전화만큼은 윤대협도 귀찮은 마음을 버리고 받았다. 서태웅의 집에 합숙의 핑계를, 그리고 학교에는 전국 대회의 후유증을 만들어 녀석의 부재를 커버해준 송태섭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서태웅이 제 집에 있는 상황이 100% 떳떳하지 못한 윤대협에게 태섭은 고마운 조력자였다.

  “똑같아.”

  -하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섭의 깊은 한숨에 대협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날 장난 말고 북산으로 녀석을 돌려보냈어야 했던 걸까. 침대에 기대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태웅이 대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태웅의 날카로운 눈가가 살짝 풀어졌다. 지금 보고 있는 방송은 제법 마음에 들었나보다. 녀석의 작은 반응으로 이제 기분까지 알 수 있는 윤대협이었다.

  “태웅아, 뭘 그렇게 봐?”

  전화를 끊고 태웅의 옆에 다가가자 녀석은 쓱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어주었다. 어차피 커다란 침대에 기대앉으면 그 자리가 그 자리인데도 태웅은 항상 자신의 자리를 내어줬다. 꼭 제 옆에 다가와 앉으라는 듯이. 대협은 피식 웃으며 태웅의 옆자리에 기대앉았다. 슬쩍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대협은 제 옆에서 느껴지는 태웅의 존재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텔레비전의 네모난 화면 안에서는 NBA 경기가 한창이었다. 대협은 순간 태웅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까만 두 눈을 반짝이며 NBA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서 윤대협은 가슴이 아릿하게 저린 것을 느꼈다. 서태웅은 자기 자신은 잊어버릴지언정 농구까지 완벽하게 잊어버리지는 않았나 보다. 기억을 잃었어도 이 녀석은 지독히도 서태웅이었다.

  “대협이형도 저거 해요?”

  침대 끄트머리에 놓아둔 공을 가리키며 태웅은 여전히 두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농구가 하고 싶어졌나보다. 몸을 일으켜 공을 줍던 대협은 창밖의 하늘이 잠시 갠 것을 보았다. 며칠 만에 보는 푸른 하늘인지 모르겠다. 지금 나가면 더위와 습기의 찜통 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쉴 것만 같다. 그런데… 그래도…….

  “태웅아, 우리 나갈까?”

  태웅의 앞으로 농구공을 던지자 녀석이 가슴 앞에서 공을 안정적으로 받았다. 역시 몸으로 익힌 것들은 머리의 기억과 달리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대협은 기지개를 켜서 찌뿌듯한 제 몸을 움직였다. 사실은 윤대협도 농구가 하고 싶었다.

  생각보다는 쾌청한 날씨였다. 며칠째 비에 젖은 코트는 여전히 물기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드리블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협은 물기가 없는 바닥을 찾아 몇 번 공을 튕기다가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익숙한 손목의 스냅과 농구공의 무게에 대협은 기분이 좋아졌다. 가볍게 몸을 풀며 태웅을 바라보자 녀석이 어느새 그를 따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할 마음 가득히 따라 움직이는 녀석을 보면서 대협은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처럼 서태웅에게 농구는 역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저기 골대 안으로 공을 더 많이 집어넣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태웅은 림을 통과하고 바닥으로 굴러온 공을 잡아들었다. 조금 전 윤대협이 했던 것처럼 물기 없는 바닥을 찾아 공을 한번 튕겼다. 생각보다 거친 반동에 움찔거린 태웅은 잠시 멈칫 하더니 몇 번 더 공을 튕기다가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교과서처럼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슈팅 자세는 여전했다.

  “역시 잘하네.”

  대협은 림을 통과한 공을 바로 잡아챘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할지라도 서태웅과의 농구는 역시 윤대협을 즐겁게 했다.

  “갖고 싶으면 뺏어봐. 서태웅.”

  가볍게 공을 튕기던 윤대협에게서 공을 낚아채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자신의 등 뒤로 공을 빠르게 빼버렸다. 충분히 공을 가져갈 줄 알았는지 공에 손 한번 못 댄 태웅이 제 뺨을 부풀리고 입술을 삐죽했다.

  “하하, 태웅아. 공은 여기 있어.”

  놀리는 것처럼 공을 내보이는 대협에게서 다시 한 번 공을 뺏으려 하자 그는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서태웅은 농구공이 림의 그물을 통과하는 순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바닷가의 습기까지 머금은 더위가 숨통을 옥죄었다. 잊고 잊어버리다 이번에는 숨을 쉬는 것 마저 잊어버린 것 같다. 지금 서태웅의 머릿속에는 농구공과 림, 그리고 윤대협뿐이었다.

  윤대협이 먼저 움직이면 다음번에는 서태웅의 차례였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윤대협을 따라 똑같이 플레이하는 서태웅의 놀이는 1 on 1보다 농구 교습에 가까웠다. 대협은 실제 승부 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복잡한 드리블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심 서태웅이 몸에 밴 습관으로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녀석은 윤대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역시 녀석과의 농구는 즐거웠다.

  물방울이 어깨에 떨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땀이 흐른 것 인줄 알았다. 그러나 뺨을 시작으로 농구공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순식간에 늘어갔다. 대협은 순간 비를 맞다 쓰러진 그날의 서태웅이 떠올랐다. 잡고 있던 공을 버리듯 놓아버린 윤대협이 제 앞을 가로막고 수비하던 태웅의 손목을 잡아챘다.

  “…대협……형?”

  “그만하자. 비 온다.”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윤대협의 손안에서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가라앉은 그의 그늘진 얼굴에 태웅은 윤대협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아니 여느 때와 다른 윤대협의 서늘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 떨어졌어, 요. 저것도 가져가요.”

  그제야 대협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공은 어느새 코트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속으로 빠졌다. 대협은 성큼성큼 걸어가 공을 집어 들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 대협은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가자. 태웅아.”

  손목에 남은 손자국에 윤대협의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남았다. 붉어진 그 손자국 위로 떨어지는 빗물이 열기를 식히며 차갑게 스며들었다. 태웅은 제 손목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온 윤대협에게 등 떠밀린 태웅이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 피어나는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대협은 따뜻한 레몬차를 쥐어주었다.

  “그거 마시고 있어. 얼른 나와서 마사지 해줄게.”

  “…괜찮아, 요.”

  “다리 많이 썼잖아. 또 아플지도 몰라.”

  꽤 단호하게 말하는 윤대협에게 또 다시 괜찮다는 말을 더 할 수 없었다. 태웅은 제게 쥐어준 따뜻한 레몬차를 내려 보았다. 침샘을 자극하는 상큼한 레몬 향에 온몸이 노근해졌다. 입 안을 자극하는 신 맛은 싫었지만 두 손 안에 쥐어진 따스함은 놓고 싶지 않았다.

  차가워진 머리를 비어내듯 윤대협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연신 맞았다. 이제야 정신이 제대로 들었다. 순진하게 웃는 서태웅도 좋았지만 역시 녀석은 농구공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는 것이 더 어울렸다. 바보 같은 제 장난 때문에 하마터면 서태웅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을 뻔 했다. 그 녀석이 있어야 할 곳은 덥고 습한 이 작은 방 안이 아니었다.

  대협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태웅은 기다렸다는 듯 레몬 찻잔을 내밀었다.

  “나 주는 거야?”

  조금 전 자신이 해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놀란 윤대협에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제야 겨우 그가 웃어주었다. 쌍꺼풀 깊은 눈가에 편안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대협은 아직 덜 마른 태웅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익숙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커다란 손은 여전히 기분 좋았다.

  “머리 말리고 있지.”

  “그냥 두면 마르잖아, 요.”

  “안 돼.”

  가는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기는 촉감을 즐기던 대협은 슬그머니 녀석의 이마를 짚었다. 이제 다시 열이 나지는 않았다. 대협은 안심한 듯 녀석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태웅아, 너 이제 가야해.”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태웅은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웃음 가득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가 다시 태웅의 앞머리를 잔뜩 흐트러뜨렸다. 그 바람에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새 손을 뗀 윤대협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있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

  “우린 서로 사는 곳이 다르니까.”

  “…내가 인어라서?”

  순간 대협의 눈가가 잔뜩 찌푸려졌다. 인어. 그게 문제였다. 하필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버려서 지금껏 녀석을 곁에 두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태웅의 믿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쌓아온 그 믿음을.

  “원래 인어는 거품이 돼서 바다로 돌아가는 거더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되돌릴 수 있다면. 이렇게 씁쓸한 감정 따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협은 녀석을 향해 겨우 웃어 보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나 언제 돌아가요?”

  “…비가 그치면…….”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

  혼자서 끝을 고한 윤대협에게 서태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머리부터 말리자.”

  톡, 토옥-.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투명한 유리창을 쉼 없이 두드렸다. 노을 진 하늘의 보랏빛 비가 방 안을 보랏빛 그림자로 가득 채웠다. 창문에 닿았다가 금세 사라지며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가 두 사람을 감쌌다. 어느새 익숙해진 시트러스 향의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을 느끼며 태웅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윤대협… 왜 거짓말 했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이 목구멍을 아프게 스쳤다. 손 안에 잡힌 농구공 특유의 반동으로 태웅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느낌은 림의 그물을 깨끗이 통과하는 공을 보는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비 오는 날 윤대협과 했던 1 on 1, 그리고 비가 내리는 동안 윤대협과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너 인어라 그래.’

기억을 잃은 동안 인어라고 속인 윤대협에게 솔직히 화도 났다. 그러나 그 화를 누를 만큼 그는 다정했고 조심스러웠다. 아무 기억도 못하는 낯선 환경이 두렵지 않게, 서태웅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그렇게 윤대협은 진심을 다해 보호해주었다. 그래서 차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먼저 깰 수 없었다. 차라리 정말 인어였다면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태웅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살포시 걸렸다.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

 

  “윤대협! 문 안 열어!”

  있는 힘껏 현관문을 두드리는 안영수의 목소리가 집 안까지 크게 울렸다. 윤대협은 제 품에 안고 있던 태웅을 조심스레 놓아주고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찾아온다던 말을 약속처럼 지킨 안영수 때문에 곤란하다는 혼잣말을 흘리며 대협은 제 옆에 잠든 서태웅의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하여튼 잘 자는 녀석이다. 시끄러운 안영수의 외침에도 꿈쩍도 않는 태웅을 보며 윤대협은 피식 웃었다.

  “야! 윤대….”

  “왔어? 근데 좀 시끄럽네.”

  굳게 닫혔던 현관문을 조금 열고 헤실헤실 웃는 윤대협에게 안영수는 무슨 욕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주장님, 딱 5분 줄게. 튀어 나와라.”

  “아직 집 안이 물바다라….”

  “거짓말도 작작 해라. 비 다 그친 거 안보여?”


  확 잡아당기는 영수의 순간적인 힘에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밤 까지만 해도 가득하던 비구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아지랑이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여름 하늘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았다.

  “아…….”

  비가 그쳤다. 대협은 저도 모르게 방 안을 돌아보았다. 현관을 지난 햇빛이 침대의 끄트머리까지 닿아있었다. 대협은 얼른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뭐야, 왜 문을 닫아?”

  “5분이랬지?”

  “뭐?”

  “5분, 그래 5분만 기다려줘. 영수야.”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그대로 문에 기대앉았다. 잔뜩 그림자진 윤대협의 얼굴에서 피식,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비가 바로 그칠 줄 알았으면 여름이 끝나고, 라고 말할 것을 그랬다. 서태웅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가슴이 보낼 수 없다고 무겁게 짓눌러왔다. 대협은 조심스럽게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태웅아…. 태웅아?”

 

  나직한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곤히 자고 있는 것을 깨우자니 미안한 감이 들었다.

 

  “태웅아, 형 잠깐만 다녀올게.”

 

  잠시 달싹거리던 입술을 꾹 다물고 태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가슴을 콕콕 간질였다. 눈을 뜨면 당장이라도 윤대협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급하게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현관을 나서는 그의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겨우 적막만이 남은 방 안에서 태웅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자 정말 비가 그쳐있었다. 어제 잠시 비가 그치긴 했지만 이렇게 깨끗하게 푸른 하늘을 다시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제 인어는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거품이 되어 바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간만의 부 활동에 나간 윤대협은 하루 종일 감독의 집중 마크와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일찍 빠져나오려던 계획은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가했다. 앞쪽에는 감독이, 뒤쪽에는 안영수가, 그리고 좌우로 황태산과 박경태까지… 솔직히 이 디펜스를 뚫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 간 부 활동을 버려놓은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대협도 따끔따끔 느끼고 있었다. 하필이면 여름이라 태양이 한참 긴 것도 한몫을 했다. 비 갠 하늘은 오늘따라 더 시간을 잊은 듯 밝았다. 중간 중간 창밖을 봐도 여전히 밝은 하늘 덕분에 도무지 연습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배고플 텐데….”

 

  혼자 집에 남겨진 녀석이 밥을 제대로 챙겨먹었을지 연신 그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냉장고를 한번 열어봤다면, 아니 냉장고까지 열지 않아도 식탁 위에 있던 모닝 롤이라도 챙겨 먹었으면 좋겠다. 자신에게는 한입꺼리이던 작은 모닝 롤을 세 번에 나눠서 오물 오물거리던 태웅을 떠올리며 대협은 웃음 서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야, 왜 기분 나쁘게 쪼개?”

  “영수야, 나 더는 안 될 것 같아.”

  “뭐가?”

  “미안하다. 나중에 꼭 벌충할게.”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윤대협은 낚아채려는 안영수를 뒤로한 채 체육관을 뛰쳐나갔다.

 

  체육관에서 내내 땀 흘린 것 보다 더 많은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며칠 동안 비구름에 가려있던 태양이 존재를 과시하듯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였다. 아스팔트 위를 뛰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익을 것처럼 뜨거웠다. 한참을 달리던 대협은 자취방 근처 편의점에 다다르자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바람이 단숨에 열기를 식혔다. 얼른 샌드위치와 삼각 김밥, 푸딩, 그리고 컵라면을 양팔 가득 안아들고 계산대를 향했다. 무슨 땀을 그렇게 많이 흘리느냐고 좀 쉬었다 가라는 편의점 주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밖으로 나오자 이번엔 더위가 턱까지 차올랐다.

 

  “하아… 가볼까.”

 

  망설일 틈 없이 대협은 편의점 봉투를 들고 다시 녀석이 기다리는 제 방을 향해 뛰었다.

 

 문짝만한 운동부 남고생이 혼자 사는 자취방에 도둑이 가져갈 만한 물건이 있을 리 만무했다. 딱히 물건에 대한 집착도 없었던 대협은 현관문 단속에 조금 무딘 편이었다. 평소처럼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거리낌 없이 열리는 현관문에 대협은 이거 잘 잠그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생전 처음으로 했다. 도둑이 들어도 아쉽거나 무서울 것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서태웅 그녀석이 있다는 것 하나가 윤대협에게 조심성을 일깨워줬다.

 

  “태웅아, 배 많이 고프지? 늦어서 미안.”

 

  아직 바깥은 밝았지만 방 안은 조금 어둠이 내려앉았다. 태양 아래 바싹 마른 바깥과 달리 어두운 방 안은 조금 습하고 조용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처럼….

 

  “태웅아?”

 

  현관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방 안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욕실을 열어보았지만 여기도 비어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바닥에 떨어뜨린 편의점 봉투에서 컵라면과 푸딩이 빠져나왔다. 지난번에 서태웅이 잘 먹어서 사온 푸딩은 주인을 잃은 채 바닥에 버려졌다. 지금 떨어진 푸딩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서태웅?”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대협은 쉽사리 제 눈을 믿지 못하고 연신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더 찾아볼 곳도 없으면서 대협은 제 방을 여기 저기 돌아보았다. 이 며칠간이 모두 환상인 것처럼 서태웅 본인도, 녀석의 옷과 가방도 모조리 사라져있었다. 물거품이 바다로 부서지듯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가 그쳤으니까… 안녕. 윤대협]

 

  이제는 서태웅 자리가 되어버린 침대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메모가 현실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대협이형이 아닌 윤대협.

 

  기억이 돌아온 것일까? 언제부터?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차라리 환상이면 좋겠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저릿한 가슴과 미칠 것 같은 감정 모두 거짓이 되도록. 그러나 서태웅은 분명 제 곁에 함께 있었고… 비와 함께 떠나갔다.

 

  “서태웅….”

 

  윤대협은 녀석이 남긴 메모를 손안에서 그러쥐었다. 정말 서태웅의 기억이 돌아왔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송태섭이 연락처를 물어봤을 때 녀석의 것도 물어볼 걸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 북산의 연락처 하나를 얻기 위해 아직 연습중일 박경태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대협은 그대로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만에 하나 아직 서태웅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길을 잃고 어딘가에서 헤매거나 다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자꾸만 나쁜 쪽으로 쏠리는 생각에 불안함만 깊어졌다.

 

  전국 대회 끝나자마자 무슨 합숙을 그렇게 했냐며, 매정하게 연락 한번 안하면 어떻게 하냐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서태웅은 잘못했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비 맞고 농구하다가 정신을 잃고 며칠간 기억까지 잃었었다고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겨우 잔소리에서 풀려난 태웅은 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풀썩 누웠다. 태어나서 한 평생을 자라온 이 방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 곳은 조금 더 춥고 레몬향이 났었는데… 지그시 눈을 감자 윤대협의 방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커다란 침대와 텔레비전, 그리고 윤대협이 직접 만들어주던 음식들. 모두 다 기억에 남아있었다. 윤대협과의 모든 시간들과 아직 그 방에 멈춰있는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까지 모두 다 선명했다. 다 털어놓지 못한 마음들이 가슴 속을 불편하게 지근거렸다.

 

  “후우…….”

 

  답답함을 한숨과 함께 내뱉어 보지만 한번 자리 잡은 마음은 쉽사리 뱉어낼 수 없었다. 결국 태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태웅! 너 또 어디 나가!”

  “운동 좀 하고 올게요.”

  “합숙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운동 하러 나간다고?”

  “금방 올게요.”

 

  농구공 하나 달랑 가방에 넣고 나가려는 태웅의 뒤로 따라온 어머니가 현관에 세워두었던 우산 하나를 건네주었다.

 

  “저녁때부터 비 또 온다고 했어. 비 맞지 말고 다녀.”

 

  비가 다시 내린다는 말에 태웅은 윤대협이 떠올랐다. 윤대협도 우산 없이 나간 것 같던데… 태웅은 그제야 제 심장이 울컥거릴 만큼 아프게 뛰고 있던 것을 느꼈다. 풀타임 경기를 뛴 것 보다 더 빠르고 더 아프게 뛰는 심장이 윤대협을 원하고 있었다.

 

  이미 불이 꺼진 능남의 체육관 앞에서 태웅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바다를 향해 늘어진 노을 위로 먹구름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은 한순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낮의 찌는 더위를 식히듯 빗방울이 태웅의 얼굴 위로 토옥- 떨어졌다. 빗물을 닦는 제 손길에서 윤대협의 커다란 손이 생각났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습관처럼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언제나 태웅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태웅은 지금껏 윤대협에게 받은 것 밖에 없었다. 걱정과 돌봄, 그리고 어느새 그로 가득한 마음까지. 지금도 윤대협은 자신을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태웅도 생각했다. 윤대협이 이 비를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번 떠오른 윤대협은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태웅은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대협이형… 비 아직 안 그쳤네, 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함께 노을 진 보랏빛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서태웅은 정말 인어가 되어도 좋았다. 조금 더 윤대협의 곁에 있고 싶었다.

 

  북산까지 가서 송태섭을 다시 만나고서야 윤대협은 서태웅이 정말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 문제 없이 집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녀석의 기억은 이제 완전히 돌아 왔나보다. 이제 정말 거짓말은 끝났다. 끝없이 이어진 방파제를 걸으며 대협은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아니, 솔직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이제 모두 다 제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서태웅은 평범하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윤대협은 에어컨 온도를 최대로 낮춰놓고 속옷만 입은 채 편하게 쉬는 혼자만의 생활을 되찾았다. 아무 말 없이 돌아간 것을 보면 녀석은 거짓말을 한 윤대협에게 왜 그랬냐고 따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행이면서도 아쉬웠다. 이 며칠이 서태웅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에 속이 울컥거렸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은 결국 서태웅 하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먼 바다에서 밀려온 먹구름이 빗방울을 하나 둘,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 비가 서태웅을 데려다 주었었다. 그리고 이 비가 서태웅을 다시 데려갔다. 윤대협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에 반사된 먹구름의 빗방울이 보랏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졌다.

 

  이 비가 다시 서태웅을 데려다 주었으면.

 

  방파제가 끝나는 곳에 맞닿아 있는 야외 코트에 다다른 대협은 문뜩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농구 골대 앞에서 우산을 쓰고 등진 채 서있는 것이 서태웅일 것 같아서, 하도 바라고 원한 녀석의 환상일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질까봐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윤대협을 생각하는 동안 태웅은 어느새 야외 코트에 다다랐다. 여기 저기 물웅덩이가 생긴 코트는 한동안 쓰기 힘들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처음 윤대협과 1 on 1을 하고 다시 만나 또  1 on 1을 하고 또 하고… 오롯이 윤대협과 농구 그 두 가지만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한 가지 더, 하염없이 내리던 비. 태웅은 쓰고 있던 우산을 옆으로 치우고 내리는 비를 맞았다.

 

  “무슨 짓이야!”


  우산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 윤대협이 다가와 다시 우산을 씌어주었다. 자신은 또 내리는 비를 혼자 다 맞으면서 윤대협은 고집스럽게 서태웅에게 우산을 씌웠다.

 

  “진짜 윤대협이다.”

  “서태웅, 왜 여기 있는데?”

 

  조금 화가 난 듯 다그치는 대협을 보며 태웅은 제 뺨을 살짝 부풀렸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그 선수를 빼앗긴 것만 같다. 태웅은 우산대를 든 윤대협의 손을 맞잡고 기울어진 우산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밀었다.  

 

  “비가 오니까….”

  “그러니까 왜!”

  “비가 오면 인어도 땅 위에서 숨 쉴 수 있거든. 윤대협이랑 같이.”

 

  자신 쪽으로 넘어온 우산을 다시 서태웅에게 씌우려던 대협의 움직임이 멈췄다. 우산 속에서 마주 친 시선이 눈을 깜빡거리는 것조차 잊은 채 서로를 담았다. 어느새 태웅의 날카로운 눈가에 힘이 풀렸다. 언제나 윤대협이 눈웃음 짓던 그 모습처럼 서태웅이 웃었다.

 

  “나한테 왜 거짓말 했어? 윤대협?”

  

  빗물에 잔뜩 젖은 것처럼 물기 먹은 태웅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대협은 순식간에 녀석을 제 품 가득 그러안았다. 이렇게 안아 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가늘게 떨린 녀석에 가슴이 너무 아려서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혹시 녀석에게 상처가 될까봐. 이렇게 먼저 다가와 준 녀석이 힘들어질까 봐. 윤대협은 조심스레 끌어안은 녀석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제 품안에 가득 들어온 서태웅은 조금 단단했지만 그 느낌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이 품에 있는 녀석은 진짜 서태웅이었다.

 

  “네가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알고 싶었어. 어쩌면 날 잊어버린 너한테 심술을 부린 건지도 모르겠다.”

  “…….”

  “서태웅.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으며 대협은 태웅의 어깨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우산은 버려지고 비는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떨어져 내렸다.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어.”

 

  어깨에 닿은 윤대협의 숨결이 빗방울로 차갑게 식어버린 몸에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태웅은 가슴 속 깊이 울컥거리는 것을 간신히 삼켜냈다.

 

  윤대협과 서태웅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침대에 기대앉아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집안에 드리워진 보라색 비 그림자를 함께 바라보는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고 싶었다. 1 on 1을 하기에 너무 더운 날씨를 탓하며 은근슬쩍 붙어 앉아서 서로 다른 NBA 팀을 응원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잠들면 어느새 윤대협의 품에 안겨있는 그런 일상의 비 일상을 함께 하고 싶다.

 

  “아직도 비가 올 때만 난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거야?”

  “…….”

  “윤대협… 나한테 거짓말해도 좋아.”

  “태웅아.”

  “나는 네가 좋으니까, 내게 무얼 해도 다 좋아.”

 

  여전히 물기를 머금은 서태웅의 목소리가 윤대협의 심장 바로 위에 속삭였다. 다시는 지워내지 못할 만큼 깊고 또 절실하게 윤대협의 심장을 고스란히 울렸다.

 

  “너 정말…,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사실인데…”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상관없어. 윤대협 너는.”

  “하아… 서태웅.”

 

  슬며시 고개를 든 서태웅의 단호한 시선이 오로지 윤대협만을 향했다. 윤대협에게 받은 것들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태웅이 그에게 무엇이든 해줄 차례였다.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태웅의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대협은 입 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

 

  “인어 다음에는 고양이 어때?”

  “왜 다 동물이야?”

 

  입술을 삐죽이며 뺨을 부풀리는 태웅을 보며 대협은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풀었다. 작게 성내는 모습이 꼭 고양이 같다는 것을 서태웅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대협은 태웅의 뺨을 살며시 감싸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떨어뜨린 우산을 주워 태웅에게 얼른 씌워주었다. 젖은 녀석의 앞머리를 매만지고 이마를 짚어보았다. 조금 낮아진 체온에 대협은 다시 서태웅을 제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서태웅을 내 방으로 데려가고 싶으니까.”

 

  귓가를 속삭이는 윤대협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태웅은 금세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녀석이 비를 맞지 않도록 대협은 우산을 고쳐 들었다.

 

  “태웅아. 비가 그칠 때 까지만 함께 있자.”

  “…….”

  “비가 그치면, 그때 다시 승부하자. 여기서.”

 

  승부라는 말에 서태웅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이제야 모두 다 제 자리를 찾았다. 서태웅은 농구를 되찾고 더하여 윤대협을 얻었다. 물거품이 되어도 잊지 않아 줄, 다시 기억을 잃어도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줄 단 하나의 사람. 이미 폭삭 젖은 윤대협의 반쪽이 고스란히 비를 맞는 것을 본 태웅은 우산대를 슬그머니 밀었다. 윤대협이 제게 해준 것처럼.

 

   지독히도 더운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태웅은 슬그머니 윤대협의 어깨 위로 제 머리를 기대었다. 따스한 레몬차 두 잔과 빗소리. 그리고 창 밖에서 스민 보랏빛 비의 그림자가 윤대협과 서태웅 두 사람의 위로 잔뜩 드리워졌다. 이 비가 그칠 때 까지, 지금은 잠시 쉴 수 있도록.

  Purple Rainy Night,

  두 사람은 함께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2023 by SENRU_IN_SUMM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