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일의 여름
교녕(@kyokn0)
카나가와도 여름 축제가 한창이었다, 대협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푼 채로 요란하게 터지는 불꽃을 등지고 해안 도로 갓길을 따라 멀리 더 멀리를 향해 걷는다. 해안선이 완만하게 넓은 덕에 사람이 끊이는 일이 별로 없는 능남고등학교 앞 해변을 떠나 예전에 지내던 자취방 쪽에 가까워지자 인적이 점점 줄어들었다, 주택가라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오늘은 축제가 있는 쪽으로 사람이 몰려서 더 조용한 것일 테다.
여기까지 온 것도 꽤 오래간만이었다, 윤대협은 10여년 전 자신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3년간 살던 집 앞에 서서 기억보다 훨씬 낡아버린 건물을 올려다본다. 지난 번에 이정환을 만났을 때 들은 얘기로는 건물을 소유한 부동산 업체가 지난 해에 바뀌었는데, 세입자를 새로 받지 않고 남은 세입자도 계약 종류 후에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천천히 건물을 비워서 재건축에 들어갈 것 같다고 했다. 관련업계에서 일하는 그의 말이니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협이 살 때도 신축은 아닌 물건이었으니 확실히 오래 되긴 했다.
이미 사람이 많이 빠졌다더니 불 켜진 창은 두 개 뿐이었다, 정환이 말한 재건축까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도 없어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은 게 없겠구나…, 생각하다가 대협은 쓰게 웃었다. 건물이 남아있다 한들 예전의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 봐야 자신이 살던 때와 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립고 애틋한 건 이곳이 아니다, 여기에 함께 있던 사람이고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지. 윤대협은 자신이 어설픈 감상에 젖어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 여름밤의 공기 탓이겠거니 한다.
대협은 자신이 오래 전 살았던 집을 등지고 앞 쪽의 해변을 향해 걸었다, 멀리서부터 날아든 화약 냄새와 야키소바 냄새와 함께 소금기를 머금은 눅진한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간다. 여기에 살 때는 늘 머리카락을 바짝 세우고 다녔었지, 학교에 지각을 할지언정 머리 손질을 빼먹는 일은 없었고 땀에 절도록 농구 연습을 하고 나서도 샤워 후에 다시 머리를 세운 후에야 락커룸을 나오곤 했었다. 덕분에 풀어진 머리를 본 사람은 연습 후에 같이 씻었던 농구부원들, 그리고 종종 집까지 와서 함께 밤을 보내고 갔던 한 사람 뿐이다.
서태웅.
만나지 못한 건 이미 10년도 더 넘었지만 오늘도 그의 얼굴을 봤다, 여기에 차를 몰고 오는 길가에 걸려 있던 커다란 광고판에서. 대협은 하필 그 순간 누가 안배라도 한 것처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벤 폴즈의 노랫말을 떠올린다. If you want to see me check your papers and your TV. 그 가사대로다, 예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보던 그의 얼굴은 이제 화면이나 지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서태웅은 미국에 있고 자신은 여기에 있어서, 그 이전에,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 ‘관계’를 이어가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예전에 살던 집 앞의 해변은 축제가 벌어진 곳에서 한참 거리가 있는 터라 평소처럼 조용했다, 멀리서 펑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지지 않고 가까운 파도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도로의 가로등에서도 멀리 떨어진 해변은 이따금 터지는 색색의 불꽃이 퍼뜨리는 빛 외에는 아무런 광원이 없어 어둡기만 했고, 낮에는 반짝이는 옥색이었을 바다는 먹물을 퍼뜨린 듯이 검푸른 빛이었다. 불꽃놀이를 빼면 대협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프로가 되어서도 마음이 답답할 때면 굳이 도쿄에서 카나가와까지 와서 몇 시간이고 이 자리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듣다가 돌아가곤 했으니까.
카나가와가 고향도 아니면서 종종 다니러 온 덕분에 대협은 고등학교 시절 알게 된 몇 사람들과 여전히 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황태산이나 안영수, 변덕규는 물론이고 이정환과도 가끔 만나 술자리를 가지곤 했다. 어쩌다 한 번씩이지만 모교에도 들러서 유감독을 만나기도 했고 후배들을 지도한 적도 있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대협과 같은 대학으로 진학해 프로 입단까지 한 능남고의 후배도 있었다.
그래서 태웅과 원온원을 하던 야외 코트가 작년에 새로 정비된 것도, 서태웅이 누나 몫의 계절한정 음료를 사곤 했던 골목 끝자락의 자판기 옆에 담배 자판기 하나가 추가로 더 자리한 것도, 집에 오는 길에 콘돔을 사곤 했던 편의점의 간판이 바뀐 것도, 둘이서 곧잘 가던 우동집이 아직 남아 있고 이제는 아들이 대를 이은 것도 윤대협은 알고 있었다, 카나가와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대협이 오늘 여기 온 것은 마음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올해 초부터 준비했던 일이 확정되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각오를 다져두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하고 싶은 것도 충분히 했으며 앞으로 갈 길도 정해졌다. 섣부른 결정이 아닌가 주위의 걱정을 듣기는 했지만 대협은 하하 웃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충분히 납득한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거나 이해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부모님께도 상담한 게 아니라 마음을 정한 후 결정만 알렸다, 만류를 당하더라도 강행할 각오였으나, 부모로서 당연히 따라오는 걱정은 있었을지언정 다행히도 반대는 없었다.
조용한 모래밭을 가로질러 바다에 가까워지던 대협은 누군가 해변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여기 없던 바위를 그 사이에 누가 갖다 놨나 싶을 만큼 덩치가 큰 사람이 어깨를 말고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저렇게 바다 가까이 앉아 있다가 파도가 세게 치기라도 하면 다 젖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 순간 발이 멈췄다. 설마…하는 생각이 머리에 채 떠오르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서 사람을 착각하는 게 아닐까, 대협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착각이었으면 ‘설마’ 생각한 순간 ’역시’ 하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헷갈리자마자 제 착각인 걸 알아채고 실망한 일이 여태껏 몇 번이나 있었다.
이제 서태웅이 정말 어떤 모습이었는지 잊어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엉뚱한 사람을 보고도 순간적으로 착각하는 건가. 스스로 몇 번이나 의심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진짜 서태웅을 보자마자 대협은 자신이 그의 뒤통수와 목덜미와 어깨의 곡선 어느 것도 잊었던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충분히 운동 선수에 걸맞은 체격인데도 묘하게 선이 가늘어 늘씬하게만 보이는 등은 서태웅이 맞았다, 이제는 낯설어야 맞을 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뒷모습은 녀석의 것이었다.
서태웅은 미국에 있을 텐데, 다음 시즌까지 시간이 있어서 들어온 건가. 아니면 혹시 지난 시즌 막바지에 당한 부상이 생각보다 깊어서 본국에 돌아올 필요가 있었던 건가? 서포터를 하고 있는지라도 볼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리 밤이라 낮보다 시원하다고는 하지만 서태웅은 이 한여름에도 반팔 티셔츠 위에 얇은 점퍼를 한 장 더 걸치고 있어서 어슴푸레한 빛 정도로는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대협은 자신이 10년이 지나도록 미처 잊지 못한 등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갔다, 발소리를 냈다가는 상대가 놀라서 도망가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듯이 모래를 스치는 발소리 조차도 죽이고서, 이게 혹시 꿈이라고 해도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참 이상하지.”
이윽고 태웅의 옆에 서서 불쑥 말을 건네자, 정물처럼 앉아있던 녀석의 어깨가 깜짝 놀란 것처럼 움찔하더니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기세로 고개가 위로 휙 움직였다. 올이 가늘어 민들레 홀씨처럼 뻗친 머리카락이 마치 놀라서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의 꼬리 같다고 대협은 생각한다, 덩치로 따지자면야 고양이과라고 해도 표범 정도는 되겠으나 묘하게도 대협의 눈에 서태웅은 늘 어린 짐승처럼 보였다. 이제 이 녀석도 서른인데 말이지…, 대협은 속으로 쓴웃음을 흘린다.
“카나가와에서 지낸 건 3년 뿐인데…, 매년 여름만 되면 여기가 그리워.”
“…….”
“부상 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냥 미국에서 치료 받지 그랬어.”
사실은 다 나았냐고 묻고 싶었다, 나무라는 말투이긴 했지만 내심으로는 어깨를 다쳤는데 미국에서 여기까지 비행 시간을 견디는 것도 무리인 건 아니냐는 걱정이었다. 서태웅은 돌려 말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표현으로 서태웅에게 자신의 마음이 전해질 리 없다는 걸 대협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솔직해져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가 짜두었던 시나리오와 무엇 하나 같은 게 없어서다. 자신이 준비가 된 후에 만날 것만 생각했지 여기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미처 몰랐다, 제 얘기를 잘못하면 태웅에게 부담을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아끼게 된다.
“…부상 당한 거…어떻게 알았어.”
“네 기사는 국내에서도 크게 나오거든, 굳이 찾아보려고 할 것조차도 없을 정도야.”
NBA에 진출한 몇 안 되는 자국 선수 중 하나이니 태웅의 활동은 작은 것이라도 뉴스 거리가 된다, 출전 소식부터 경기 스코어와 활약상이며 부상까지, 일부러 공들이지 않아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스포츠 지면 뿐이 아니다, 연예면에는 태웅의 사생활에 대한 가십이 곧잘 실렸다. 서태웅은 의외로 끊이지 않고 연애를 하는 모양인데다 애인도 자주 바뀌었다, 상대는 일반인이라 얼굴이 흐릿하게 가공되어서 확실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스타일이나 인종이 제각각인 걸 보면 선호하는 타입 같은 것도 딱히 없는 듯했다. 대협은 흐릿하게 뭉게진 얼굴 대신 볼캡을 눌러 쓴 태웅의 얼굴을 더 유심히 보면서, 상대보다 태웅이 틀림없이 더 예쁠 거라는 실없는 생각이나 하곤 했다. 질투는 들지 않았다, 다만 ‘여성 편력’이라는 단어가 서태웅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쉬려고…잠깐 들어온 거야. 곧…다시 나가.”
“…그렇구나.”
서태웅이 거짓말을 잘 하는 녀석도 아니고, 굳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사실일 거다.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들어왔다가 며칠 만에 다시 미국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면 부상은 정말 심하지 않은 거겠지, 대협은 마음이 놓였다. 하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귀국하지 않았으니 한 번 집에 들를 때도 되었나보지, 재계약 걱정이 없는 틈에 귀국해서 재충전이라도 하고 돌아갈 셈인 모양이다. 태웅이 요 1년 안에 구단을 옮길 예정이 없다는 건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경태에게 전해들었다, 미국 구단 소식에도 정통하다고 자신하더니 믿을 만한 정보가 맞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네가, …관심 가지기에 적당한 컨디션의…상대가 아니야.”
언제 다시 나가냐고 물어볼 셈이었는데, 태웅은 시선을 밤바다로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대협은 입이 막혔다. 이런 상황에 컨디션 같은 단어를 쓰는 구나, 10년 넘게 미국에 있으면서 영어에 익숙해진 모양이지,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 곁가지로 흘렸다.
잠깐 귀국한 것 뿐이고 나는 또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거니까 너하고는 만날 수 없어, 지금 한 말을 쉽게 풀자면 그런 얘기겠지. 태웅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대협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태웅이 미국으로 떠나는 게 확정된 후 대협은 웃는 낯으로 이제 그만 두자고 했다. 나는 롱디 같은 건 무리니까 그만 하자, 대협이 그렇게 잘라 말했을 때 태웅은 침묵했다. 태웅에게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알겠어.’였다, 마지막까지 시선을 돌리는 일도 없이 대협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선 태웅은 그 후로 다시 대협을 찾아오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
대협은 태웅이 출국하는 날짜를 알고 있었다, 그 날도 공항에 배웅하러 가는 대신 이 해변에 앉아서 파도나 보고 있었더랬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또 몇 년이나 그 날을 꿈에서 다시 보았는지, 그래도 태웅에게는 그렇게 확실히 매듭을 짓고 떠난 게 나았을 거라고 위안을 삼았었는지 모른다.
“그런…식의 관심이 아니라도 걱정은 할 수 있잖아.”
“…….”
“걱정도, 안 되나?”
예전에 서태웅을 상대로 흔히 했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묻자 그런 대협을 흘끗 곁눈질한 태웅은 대답이 없다, 그리고 그의 이런 무언無言은 대개 느슨한 승낙의 표지였다. 둘이 늘상 붙어 지내던 10년도 더 전의 어린 시절, 태웅은 대협이 ‘태웅아아-’ 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부탁하면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결국은 못 이기는 척 대협의 뜻에 따라주었었다.
여전히 그 때의 습관이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그 때의 마음이 남아있는 걸까. 하지만…, 그러기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로 염치 없다는 자각은 있었다. 좀 더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가다듬고 할 말을 정해둔 후에 만날 생각이었는데, 자신의 예상과 예측을 벗어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걸 비교적 즐겁게 여기는 대협이지만 오늘의 우연은 마음이 복잡해서 대응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만나버린 것이 한 편으로는 기쁘다,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벗어나서 이렇게 만났다는 것이, 신이든 운명이든 태웅과 자신의 인연을 인정해준다는 증거 같아서.
“배 고프지 않아?”
“…….”
“야식 먹으러 갈래? 그 우동집, 아직 안 닫았을 거야.”
태웅은 대협이 알려준 그 우동집을 꽤나 좋아했다,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원온원 후에 나란히 씻고 나와서 대협이 ‘우동?’하고 물으면 ‘응.’하고 대답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 무려 대답을 했다는 말이다. 이번에도 거기라면 같이 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협은 한 번 더 권하지 않고 ‘가자.’ 말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혹시 제 말을 무시하면, 오지 않거나 그냥 가버리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태웅은 묵묵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협의 뒤를 따랐다, 대협의 입꼬리가 가볍게 위로 향한다.
그 우동집, 이제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맛은 안 변했어. 가끔 아저씨도 나오시니까 운 좋으면 볼 수 있을 거야. 대협이 뒤를 돌아보고 말을 건넸지만 태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협의 말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는 듯 걸음을 좀 빨리 옮겨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다. 눈은 마주치려 하지 않았지만 저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거의 나란히 걷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10년도 넘게 못 봤으니까- 대협은 생각한다.
우동집은 예전에 태웅과 함께 오곤 했던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식사 시간이 꽤 지난 데다 축제가 있어서인지 카운터 석에 손님 두어명이 있는 걸 빼면 가게는 조용했다. 대협은 태웅과 곧잘 않던 구석의 테이블 석으로 들어가면서 예전에 태웅이 먹던 대로 더블 사이즈의 따뜻한 우동에 우엉 튀김과 양파 튀김을 주문해주고 제 몫으로는 사라다 우동 더블과 초생강 튀김을 주문했다.
태웅을 먼저 테이블로 들여보내고 선불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셀프 바에서 물을 가져와 태웅의 앞에 놓아준 후에야 대협은 제가 태웅에게 뭘 먹을지 묻지도 않고 멋대로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10년도 더 지났으니 취향이 바뀔 수도 있는 건데 주문 전에 한 번 물어봤어야 했다, 대협은 태웅의 앞에 물컵을 놓아주고 뒷목을 긁적이며 멋쩍게 물었다.
“내가 주문한 대로 괜찮아? 아직 그거 좋아해?”
대협이 주문하는 동안 묵묵히 뒤에 서있기만 하던 태웅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티슈를 빼어다 테이블을 닦고는 나무 젓가락을 꺼내서 대협의 앞에 놓아주었다. 예전에도 둘이 오면 이랬었지, 제가 주문하고 물을 가져오는 동안 태웅은 테이블을 한 번 더 닦고 젓가락을 꺼고 앞접시에다 절임 반찬도 덜어서 준비해줬다. 줄곧 운동부 생활을 해서 이렇게 각이 잡힌 건지 집에서 막내라서 이런 습관이 든 건지 물었더니 태웅은 잠깐 생각하고 둘 다인 것 같다고 했었다, 반은 농담으로 물은 건데도 제 질문에 나름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뽀얀 얼굴이 말랑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볼을 쿡 찌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는 게 귀여웠다.
“나는 원래…한 번 좋아하면 잘 안 변해.”
“…그래.”
옛날 일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 있던 대협은 기습처럼 들어온 태웅의 말에 웃지도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한다는 게 우동 얘기라는 걸 모르지도 않는데 가슴 한 쪽이 찡하게 울렸다, 나한테도 그래줄 거냐고 묻고 싶어진다. 네가 집 근처도 아니고 굳이 이 동네의 해변까지 와있었던 건 내 생각을 해서냐고, 나도 한 번 좋아한 후로 그동안 내내 변하지 않았냐고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전 아슬아슬하게 이 녀석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대협은 자신이 겨우 일주일 전에 봤던 태웅의 기사에 실려있던 흐릿한 사진을 떠올린다. 열애 3개월째, 세 살 연하, 일본 이민 2세대로 같은 대학 출신의 광고 기획자, 업무 관계로 만났다가 연인으로 발전,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설마…, 부모님께 결혼 보고라도 하려고 귀국한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아…참, 지금 애인도 우리 나라 사람 아니었나? 이번에 같이 들어왔어?”
“…헤어졌어.”
“또…?”
“…그런 것도 신문에서 봤어?”
“응, 뭐…그렇지.”
이런 소식까지 알고 있는 건 자신이 서태웅에 관한 얘기가 실린 건 가십지까지 찾아보기 때문이지만, 그런 설명은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어서 대협은 대충 얼버무린다. 헤어졌구나, 다행이네. …나한테는 다행이지, 일단은.
마침 주문한 우동이 나와서 어색한 침묵은 길지 않았다, 우동과 튀김이 담긴 쟁반을 앞에 둔 태웅은 늘 그랬듯 ‘잘 먹겠습니다’하고 손을 모은 후 젓가락을 든다, 외국에서 10년 넘게 살고도 이 습관은 그대로인 게 귀여웠다. 잘 먹겠습니다 손을 모으고 인사하고, 뜨거운 걸 잘 못 먹으면서도 냉우동보다 따뜻한 우동을 좋아하는 서태웅, 그가 자신이 알던 것과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게 대협은 좀 기뻤다.
대협은 사라다 우동을 먹는 데 집중하는 척하면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태웅을 찬찬히 뜯어본다, 서포터를 하고 있지 않은 걸 보면 부상은 심하지 않았던 게 맞나보다. 신문이나 기사의 사진으로 늘상 보던 얼굴인데, 지면이며 화면으로 봤을 때는 아는 얼굴인데도 생경하더니 지금 눈앞의 서태웅은 10여년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종이 너머의 현실이 아니라 대협이 알고 있던 과거에서 갑자기 여기로 튀어나온 것 같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 이상이 지났으니 이 녀석 역시 한참 변했을 텐데도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 그야 머리 모양도 바뀌었고 키도 좀 컸고 볼살도 조금 빠졌다. 얼굴은 말랐는데 팔은 더 단단해진 걸 보면 근육으로 증량을 한 걸 텐데, 미국에서 뛰기에 유리한 피지컬이 아니니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었으리라. 헤어질 때만 해도 어린 티가 약간 남아있던 턱선이 예리하리만치 날렵해진데다 쭉 뻗은 콧날까지 더해지니 인상이 훨씬 차가워 보였다. 예전에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멍해 보여서 귀여웠는데(실제로 멍하게 있는 것이기도 했고), 지금은 서태웅이라는 녀석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사실은 별 생각 없는 타입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먼저 말을 걸기도 힘들 것처럼 날카로운 얼굴이 됐다.
그런데도 대협은 서태웅이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얼굴의 문제가 아니라 속이 그대로인것 같아서다. 서태웅은 얼굴도 예쁘고 몸도 아름다운 게 사실이고 대협은 그 부분도 물론 좋아했지만, 정작 태웅에게 빠졌던 건 이 녀석의 알맹이 때문이었다. 조용하지만 맹렬하게 타오르는 열정, 올곧은 시선과 물러설 줄 모르는 강인함, 자신의 전부를 걸고 부딪히는 것에도 망설이지 않는 대담함. 코트 위에서는 그렇게 맹수같으면서, 코트를 벗어나 있을 때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서툴고 어리숙한 구석이 있는, 나의 청춘, 나의 수퍼 루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일생을 앓을 사랑을 만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조차도 몰랐었다. 서태웅을 떠나 보내고 난 뒤 혼자 그 해변에 앉아서 대협은 생각했었다, 어쩌면 서태웅이 승부하자며 찾아왔던 그 날 나는 이미 사랑에 빠진 건지도 모르겠다고. 앞으로 열 번이 아니라 몇 번의 여름을 또 맞게 되더라도, 서태웅을 만났던 때처럼 선명한 계절은 저의 생에 다시는 없으리라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석양을 마주하고 앉아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듯 생생하게, 그 날의 여명에 어우러진 서태웅의 얼굴이 생각났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서태웅이 또 원온원을 하자고 청한다면, 그 때도 여전히 쉽게 밀리지 않는 상대가 되고 싶다고 대협은 생각했다. 고등학교까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농구를 대학에서도 계속하고 결국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건, 물론 자신이 원해서이기도 했으나 서태웅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의 일부로서 영원히 남고 싶었다, 이 녀석이 미워할수는 있어도 평생 끝내 싫어하지는 못할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대협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그래서 그동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두 잊어버린 채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의 애송이 시절로 저를 되돌려버리는 듯한 서태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이고 우동에만 집중하고 있던 서태웅이 눈을 들어 대협과 시선을 마주해왔다, 형광등 아래서는 진한 커피색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햇빛을 받으면 홍찻빛으로 빛난다는 걸 대협은 알고 있다. 눈을 두어번 깜빡인 태웅이 이내 미끄러뜨리듯 다시 눈길을 돌린다, 제 손을 뻗어 태웅의 턱을 쥐고 다시 고개를 들게 해서 마주보고 싶다는 충동이 대협의 손가락 끝까지 채 이르기도 전에, 눈을 피한 채로 태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기하게…, 다들 진심이 아닌 걸…알더라.”
“…….”
“나는 네가 나한테 해준 대로 다 했는데, …그런데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는 듯, 자신이 상대에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들켰다는 게’ 퍽이나 이상하고 조금 억울하기까지 한 듯한 말투였다. 태웅이 별 것도 아닌 듯 흘려낸 몇 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있는지 순간 읽어낸 대협은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답답해지는지 모를 감각에 휘말렸다, 현기증이 일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을 누르며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네가 내게 했던 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해서 한 행동들이었다, 내가 나를 좋아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니, ‘좋아하는 사람의 위치에 있는 상대’에게는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가 해준 것밖에 모르니까, 네가 내게 해준 것들이 좋았으니까. 그러니 설령 상대를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네가 내게 했듯이 대하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실은 내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알아차리더라. 왜 통하지 않는 걸까, 뭐가 부족했을까. 그 온갖 말을 다 꾹꾹 눌러 담아둔 하소연을 이해할 유일한 상대가 자신인 건 맞지만, 이 투정이 네가 가르쳐준 것 외의 사랑은 모른다는 고백에 가깝다는 것도 이 녀석은 자각 하지 못한다.
“…어떻게 했는데?”
대협의 질문은 네가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느냐는 물음인 것과 동시에, 내가 네게 어떻게 했던가를 묻는 것이기도 했다. 태웅은 잠시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꼽아가며 대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문자하고, 뭐 먹었는지 물어보고 나는 뭐 먹었다고 얘기하고, 훈련 잘 하고 있다는 말도 하고 평소랑 다른 일이 있으면 작은 거라도 알려주고, 자기 전에는 잘 자라고 인사하고, 경기 잘 한 날은 네 덕분이라고 해주고…. 태웅이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내가 그랬던가, 그런 유난스러운 짓을 잘도 했네,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협은 대학 시절부터 자신이 했던 몇 번의 연애를 돌이켜본다, 마지막에 만났던 상대는 대협에게 ‘종잡을 수가 없다’고 했었다. 둘이 같이 있을 때는 자기한테 극진하게 잘하는 게 맞는데, 인사하고 헤어지고 나면 도무지 연락도 안 되고 답이 돌아와도 성의라곤 없으니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미안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래서 매번 비슷한 이유로 헤어지자는 말을 들을 때면 변명 없이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대협이 그러는 걸 더 분하게 여기고 황당해하는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윤대협이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줄 수 있는 최대였다.
눈 앞에 상대가 있으면 내가 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니까 성의를 다할 수 있다, 하지만 시야에서 멀어지면 곧장 상대의 존재가 희미해지곤 했다. 10분 전까지 몸을 겹치고 있다가도, 씻고 나와서 돌아서는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건 바다 건너 어딘가에 있을 다른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프로가 되고 부터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구단 관계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꺼릴 수밖에 없고 팬을 만났다가는 더 큰 일이 생길 테니 피해야 했다. 농구와 관계 없는 사람을 만나면 공감대를 찾기가 어렵고,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만나도 얼마 안 돼서 안 좋게 헤어지니 소개한 사람을 볼 낯이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나니 연애 자체가 피곤해져서 어느덧 그런 류의 교제를 하지 않은 게 2년쯤 됐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차라리 편했다. 따지고 보니 서태웅에게 또 헤어졌냐고 물을 수 있는 자격은 없겠다, 저 역시도 그 사이 누구를 오래 만나지는 못했으니까.
서태웅도 나와 같았을까,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마음을 주는 것은 별개였을까. 너도 혹시…, 어쩌면 계속, 마음에서 비워내는 건 고사하고 덜어낼 수도 없는 사람이 있었을까. 자신이 먼저 거절하고 끊어내고 밀어냈으니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대협은 기대에 가까운 의문을 떠올린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런 얘기는?”
“그건….”
…안 했군, 대협은 대답을 예상하고는 우습게도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서태웅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같은 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건 상상도 안 되긴 한다, 대협과 만날 때도 서태웅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애정을 실감하게 해주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도’ 정도의 대답은 해줄 것 같았는데 설마 그 조차도 안 해서 차인 걸까, 이 녀석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 서태웅이 그런 녀석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누구와도 잘 풀리지 않은 것에 안심하면서도, 아직 제 스탠스를 확실히 정하지 못한 대협은 도무지 진심일 수 없는 말을 농담을 섞은 조언인 것처럼 가장하여 태웅에게 던진다.
“말 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태웅아.”
“하지만….”
“…응?”
“거짓말을…할 수는 없으니까….”
사랑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태웅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대협은 멍하니 입을 벌린다, 누가 제 머리통을 후려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농담으로 싸서 던진 자신의 말에 되려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찡하게 울린다.
음, 그래서 들켰나 본데. 가까스로 그렇게 말하고 대협은 하하 웃었다, 웃어 넘기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먼지처럼 떨어져 대협과 태웅의 사이에 내려앉았다, 우동집에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ゆず유즈의 夏色나츠이로가 흘러나와 그 위로 쌓인다. 고양이, 무심한 표정, 자전거, 여름…, 제 귀를 두드리는 노래의 가사가 그 시절의 서태웅과 잘 어울린다고 대협은 생각한다.
우동을 다 먹고 가게 밖으로 나와서 대협은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하고 먼저 한 걸음을 뗐다, 뒤를 돌아보자 서태웅이 가게 문 앞에 서서 대협을 마주 보았다. 여기까지 그냥 따라온 걸 보면 자전거로 온 것 같지는 않고, 집에도 전차로 돌아갈 생각인 거겠지. 대협은 시계를 확인했다, 에노덴은 11시 넘어서까지 운행하니 아직 시간이 있다. 조금 더 같이 있자고 하면 따라와 줄까, 따라와 준다면 어디까지? 오늘 집에 돌아가지 말고 내 호텔 방으로 같이 가자고 하면, 너는 거기도 응해줄까.
“나 다시 바다 갈 건데, 같이 갈래?”
“…왜?”
“음…, 불꽃놀이 하면서 맥주 마시고 싶어서?”
아마 서태웅이 물은 건 ‘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느냐’였겠지만, 대협은 알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척 딴청을 피운다. 가자, 고개를 까딱이며 한 번 더 말하고 앞장서자 태웅은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뒤를 따라왔다. 오늘은 종일 흐리더니 내일은 맑으려는지 손 안을 훑고 지나는 바람의 질감이 실크처럼 가볍고 매끄러웠다, 맑으면 태웅이가 좋아하겠네- 생각했다가 이 녀석이 아직도 맑은 날을 좋아할지 궁금해진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전부 알고 싶다고 하면, 그 모두를 알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네 옆에 있고 싶다고 하면 너는 화를 낼까, 어이없어할까. 어이없어서 화를 내더라도 결국은 허락할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간판은 바뀌었지만 위치는 그대로인, 예전에 콘돔이나 도시락을 사던 편의점에 둘이 나란히 들어선다. 간판이 바뀌면서 매장도 좀 넓어져서 아마도 10년만에 왔을 태웅에게는 낯설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두 달에 한 번은 여기 들렀던 대협은 어느 위치에 뭐가 있는지 대충은 꿰고 있었다. 누가 채어갈세라 입구 쪽에 놓여있는 센코하나비線香花火부터 한 팩 집어들고 태웅에게 고개짓을 해서 냉장 매대로 향했다, 오래 된 주택가에 있는 편의점치고 수입 맥주도 제법 여러 종류가 구비돼있어서 선택지가 많다. 대협은 이번에는 멋대로 고르지 않고 태웅의 취향을 물었다-태웅이 성년이 되고는 처음 보는 것이니 마음대로 고르려야 녀석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도 했고.
“맥주는 뭐 좋아하나…, 이걸로 돼?”
“…나는 호로요이, …허니 레몬.”
“그럼 나도 호로요이…엇, 계절 한정이네. 라임 진토닉…난 이걸로.”
맥주는 안 좋아하나보구나, 호로요이 허니 레몬이라니 귀엽네. 해변으로 돌아갈 핑계가 필요했던 거지 술이 마시고 싶거나 취하려던 건 아니었으니 사실 술이 아니라 포카리스웨트를 산대도 상관 없었다, 대협은 태웅이 고른 것과 제가 고른 것을 한 캔씩 꺼내어 집어든다. 십 몇 년 내내 이 편의점에 올 때마다 혼자였는데 태웅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들뜨는 게 우습다, 10대였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대협이 계산하는 동안 예전처럼 조용히 뒤에 서있기만 하던 태웅은, 걸어오는 내내 대협의 손에 들린 비닐 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해변에 도착하자 불쑥 입을 열었다.
“…계절 한정을 사?”
“응?”
“너 예전에는 안 그랬던 거 같아서…. ”
“아아, 뭐어….”
그야 서태웅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따지자면 이건 이 녀석 때문에 생긴 습관이니까. 계절 한정 음료를 사는 건 예전에 태웅이 하던 일이었다, 외국 출장이 잦은 누나가 국내에 없는 사이에 나온 신상 음료를 사두는 게 중학교 때부터 제가 맡은 임무라고 했었다. 그럼 사다 주기만 하고 네가 마시지는 않냐고 물었더니, 맛이 궁금할 때는 제 것까지 가끔 두 개를 사기도 한다고 대답했었다.
태웅이 미국으로 떠난 어느 여름 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다가 대협은 새로운 자취방 앞의 자판기에서 계절 한정 앵두 아이스티를 발견했다. 아, 지금은 태웅이도 미국에 있으니까 이건 못 사겠구나, 그럼 내가 사둬야지. 마침 주머니에서 짤랑대던 동전도 딱 110엔, 대협은 기분 좋게 페트를 뽑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취할 때마다 그 주사를 벌인 게 열 손가락을 넘긴 건 그 해가 다 가기 전이었다.
한 번 그러고 나니 마트에 갈 때나 자판기 앞에서 ‘계절 한정’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태웅이 생각나서, 대협은 나중에는 취하지 않았을 때도 계절 한정 음료를 발견하고 태웅이 좋아할 것 같으면 하나씩 사는 게 습관이 됐다. 몇 년 전 이사하면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료를 열 몇 개나 버리고 해가 바뀔 때마다 또 몇 개를 처분하면서도 대협은 그 ‘수집’을 멈추지 못했다, 도쿄의 집에는 스무 개가 넘는 계절 한정 음료가 박스에 담겨 붙박이장 한 쪽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태웅이 그랬듯 대협도 맛이 궁금할 때는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마시고 하나는 남겨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음료 코너를 확인하는 게 대협의 습관이자 소박한 취미가 됐다.
“…이리 와서 앉아. 너도 할 거지? 불꽃놀이.”
대협이 자리를 잡고 앉아 손짓하자 태웅도 순순히 옆에 와서 앉았다, 사이에 농구공 하나쯤 놓으면 딱 맞을 정도의 거리다. 음, 나쁘지 않다, 처음 원온원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이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았던 것 같은데. 제가 태웅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이며 10여년의 공백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한없이 관대한 거리다. 속으로 생각하며 대협은 비닐 봉투를 열어 태웅이 고른 허니 레몬을 건네고 제 몫의 호로요이 캔을 꺼내 뜯었다, 계절 한정의 라임 진 토닉은 달콤하고 맛있었다.
태웅은 늘 그렇듯 조용했고 대협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앉은 거리가 좀 전보다 가깝고 그 사이로 파도 소리가 스며들어준 덕분인지 아까처럼 침묵이 무겁지는 않았다. 이제 축제도 끝난지 한참이라 어둡고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센코하나비를 뜯어 들고 불을 붙이려다가 대협은 그제서야 뭔가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편의점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사는 걸 깜빡했다, 불을 붙일 방법이 없다. 둘이 같이 센코하나비 한 묶음을 나눠 태울 생각이었는데, 술보다 그게 더 중요했는데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대협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숨을 들었는지 태웅이 옆을 돌아본다.
“왜…?”
“라이터를 안 샀네, …불을 못 붙이겠어.”
“아….”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가지 마, 그냥 있어.”
“…….”
“…꼭…안 해도 되잖아, 이건.”
다시 편의점에 안 가도 된다는 뜻이면서, 가지 말라는 말을 퍽이나 간절하게 하는 통에 당장이라도 일어나려던 다리에 힘이 빠졌다. 왜 그렇게 서럽게 말해, 떠난 건 너잖아. 대협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떠올렸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았다. 물리적으로야 태웅이 멀리 간 게 맞지만, 그 이전에 마음에서 떠나보내기로 결정한 건 자신이 먼저였으니까.
자신이 원거리 연애 같은 건 못할 타입인 걸 대협은 잘 알았다, 그 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몇 년을 간신히 이어져만 있다가 마음이 닳고 나서야 국제전화로 이별을 고하게 됐을 거다. 태웅 역시도 관계가 정리된 덕에 돌아볼 필요도 없이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을 테니 저를 위해서도 태웅을 위해서도 그 쪽이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저와 태웅의 성격과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장 최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인데도 후회하게 되는 건 아마도,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서도 태웅을 잊는 데에 실패했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 역시 그런 것 같아서다.
“미국엔 언제 돌아가?”
대협이 묻자 태웅은 대답하지 않고 대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뭔가를 찾는 듯이 골똘한 눈이었다. 네가 잃어버린 걸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너는 나한테서 뭘 구하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오늘 너에게서 내내 찾던 것과 같은 건가, 너도 오늘 나와 만나고서 계속 알고 싶었던 거겠지. 아직 내가 너에게 마음이 있는지, 우리에게 다음이나 다시 같은 가능성이 남아있는지, 그런 것들.
늘 무감하고 무심한 얼굴인 것 같아도 사실 태웅은 은근히 표정이 많았다, 미간이나 입꼬리나 뺨의 움직임을 찬찬히 관찰하면 태웅의 기분이 어떤지 대협에게는 곧 보였었다. 하지만 그건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태웅이 제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던 시절의 일이다. 제가 읽어낸 것이 맞는지 대협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제 바람과 기대가 눈을 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대협 너는…. 거리가 얼마나 가까워야…, 네 생각에, 적당해?”
“…….”
“만약 네가 도쿄에 있고 내가 여기 있었으면, 그건 괜찮았어?”
“……글쎄, 모르겠네, 겪어보질 않아서.”
“…….”
“…너는 어떤데. 멀어도 상관 없었어?”
“상관없어, 그런 거.”
“…….”
“…거리든 시간이든, 나는…상관이 없나 봐.”
상관이 없나 봐, 스스로도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말투였다. 태웅은 다시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린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데 그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눈치였다. 무심하고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대협은 그 안에서 태웅의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어쩌면 이미 나를 잊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 나는 녀석에게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둘이 종종 앉던 그 자리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태웅의 등을 봤을 때 바로 알았어야 했다, 서태웅이 거기서 자신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건 이 녀석도 마찬가지라, 태웅 역시도 유일하게 제가 아는 장소에서 언제 올지 오기는 할지도 알 수 없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걸.
“윤대협.”
“…응, 태웅아.”
“그런데 너도 말 안 했잖아. …좋아한다고.”
“…그래, 그랬네.”
그랬었다, 서태웅에게 한 번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다, 너를 아끼고 걱정한다고도 한 적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는 게 쑥스러울 정도로 어렸던 거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제 첫사랑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깊이를 깨닫기에는 형편없이 경험이 부족했다. 태웅을 사랑한다는 건 알았지만, 사랑은 다 그럴 줄 알았고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대가 또 없을 것도 몰랐다. 그 때는 제가 이렇게 깊이 태웅을 그리워 할 거라고도, 서태웅이 이렇게 오래 자신을 잊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모른 적 없었거든, …네가 말 안 했어도.”
“…….”
“너는…몰랐어? 내가 말 안 해서….”
아아…, 태웅아. 대협은 탄식한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몰라서 나하고는 이제 그만 두자고 한 거였냐고, 태웅은 그렇게 묻고 있는 거였다. 서태웅은 이런 녀석이었지, 자신이 믿기로 한 일은 의심하지 않고 회의하지도 않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에 대한 원망을 담아두는 일도 없다. 배신 당해도 그걸 제 탓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뭘 잃었든 제 힘으로 회복 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일 테다. 대협은 태웅의 그런 강함을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좋아한다.
“…아니. …알았어, 나도. …알고 있었어.”
“…응.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데, 대협은 울컥 치받는 기분을 꾹 눌러 삼켰다. 시나리오고 계획이고 서프라이즈고 다 집어치우라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아무 말도 없이 또 너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여기서 다시 너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다. 대협은 다음 달에 미국에 가서, 태웅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 하려던 말을 지금 하기로 결심했다, 더는 태웅을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싫었다.
“…태웅아, 나 말이야. …우리 팀이 우승했어, 지난 시즌.”
“어…. 잘 됐다, …축하해.”
“응, 고마워.”
“…몰랐어. …나는 네 소식…잘 못 들었어.”
서태웅은 부루퉁한 얼굴로, 신문이고 잡지고 미국에서는 구하기가 힘들어서 이쪽 소식을 좀처럼 듣기 힘들었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보내달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렇다고 누구를 콕 찝어서 얘 나오면 보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고 투덜대는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있는 것이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대협도 그 답답한 기분은 잘 알았다, 태웅이 지금 같은 스타가 된 건 다섯 해가 채 안 됐으니까. 태웅이 미국으로 떠난 후의 3년간은 아무런 소식도 정보도 없었다, 대학 졸업반이 되어서야 지역 교민 신문에 사진도 없는 몇 줄의 기사가 처음으로 나왔고, 프로 데뷔 후에도 태웅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서너 번이 전부였었다. 그나마 미국에 있었으니 국내에서 기사라도 접할 수 있는 거지, 외국에 있는 태웅은 직접 손을 써서 구하지 않으면 제 소식을 들을 방법이라곤 없었을 게 뻔했다.
“사실 우승 결정된 순간부터 너한테 자랑하고 싶었어. 그런데 번호도 모르고…연락할 방법이 없더라.”
“…….”
“아무튼 이제…선수로서 하고 싶은 건 다 했거든. …그래서 은퇴하려고.”
대협이 후련하게 뱉어낸 말에 서태웅의 낯빛이 확 변한다, 대협을 덥쳐 누르기라도 할 기세로 몸을 돌려 앉은 태웅이 놀란 얼굴로 대협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왜, 은퇴해? 벌써? 부상 때문이야? 더듬거리며 다급히 묻는 음성에서 두려움마저 느껴져 대협은 태웅의 팔을 토닥토닥 쓸어 진정시켰다, 저도 태웅의 부상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애가 탔으니 이 기분이 어떤지 너무도 잘 안다.
“…부상 아니야. 유학 가려고, 이제.”
“무슨 ….”
“…농구에 더 오래 엮여있고 싶어서 결정한 일이야 ”
지금 은퇴하는 건 너무 이르다는 말을 구단에서도, 에이전시에서도 들었다. 프로가 없던 예전이야 대학 졸업 후에 실업팀으로 가지 않고 대학원을 거쳐서 일찌감치 코치가 되는 일이 많았다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적어도 5년은 더 뛰고 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주위에서 하나같이 얘기했다. 하지만 윤대협은 서른을 막 넘긴 지금이 딱 좋다고 생각했다, 선수로서 하고 싶었던 일은 원없이 했으니 이제 다른 방법으로 농구를 계속 하고 싶었다.
“다음 학기부터 지도자 과정 들어가기로 했어. …우리 드디어 동문이 될 거 같은데.”
“…윤대협, 너….”
“은퇴는 너 때문에 하는 게 아닌데, …학교는 네가 있는 지역으로 고른 게 맞아.”
“…….”
“나는 롱디는 못하니까, …가까이 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희게 질렸던 태웅의 얼굴이 대협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태웅은 이렇게 울음을 참는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태웅아, …울 거야? 달랠 생각으로 일부러 놀리듯 묻자 안타깝게 쳐졌던 태웅의 눈썹이 위로 삐죽 솟았다. 놀리면 발끈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는지 금세 거짓말처럼 사나워진 얼굴조차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귀여워서, 하하 웃은 대협은 태웅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딛쳤다. 잠시 움찔한 태웅은 이내 대협을 와락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저를 힘주어 안는 팔이 저의 기억보다 크고 단단했다. 이렇게 힘을 줘도 되는 걸 보면 어깨 부상은 정말 별 것 아니었던 것 같다, 다행이었다.
“…멍청이.”
“하하, 나 멍청해?”
“…아니야, …안 멍청해.”
고작 멍청이 같은 걸 욕이라고 해놓고 그마저도 금세 취소하다니, 한 번 밀어내지도 않고 저를 받아주는 것도 그렇고 정말이지 모질지 못한 녀석이다. 기억보다 조금 커진,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과 같이 따뜻한 태웅의 두 팔 안에서 대협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대협은 팔을 들어 태웅을 마주 안았다, 전보다 더 커졌는데도 변함없이 제 품에는 꼭 맞게 들어오는 단호하고도 유연한 몸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었어, 태웅아.”
“……나도.”
예전이었다면 대답하지 않거나 응, 하고 말았을 것 같은데,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제 얘기에 태웅이 마음을 쓰는 것 같아 애틋하고 귀엽다. 지금의 이 녀석과 제 기억 속의 태웅에게서 달라진 게 무엇이고 여전한 건 어떤 것인지, 앞으로 하나하나 알아갈 시간이 저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대협은 안도했다. 길고 오랜, 내내 멈춰만 있던 여름이 마침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