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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in the Summer

 공맹도(@basketman_kmd)

 *BGM이 따로 있습니다. 우측의 BGM을 눌러주세요.

 

 

  윤대협은 바다 곁을 달리는 전철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7월, 오전 10시를 넘긴 전철은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차창 너머로 연신 바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나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몇몇이 드문드문 객석을 채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윤대협 또한 회사를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평일 이 시간이 전철을 탈 일이 없었을 것이다. 뺨에 닿는 햇살마저도 낯설게 느껴진다.

  카나가와에 향하는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도쿄에서 내내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유 감독님 은퇴식에도 얼굴을 안 비추냐며 덕규 선배로부터 핀잔과 걱정 섞인 전화를 받은 게 재작년이었다. ‘요즘 일이 바빠서 그랬다.’라며 둘러댄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일이야 노상 바쁘지만 시간을 내려면 못 낼 것도 없었다. 오늘처럼, 정 뭣하면 사직서라도 던지고 뛰쳐나오면 되는 일이니까. 윤대협은 얼굴에 사직서 봉투를 맞고 어안이 벙벙해진 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웃었다. 몇 달 전부터 그만 두니 어쩌니 실갱이를 벌인 게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그 일을 떠올리니 자연히 꼬리를 물고 현실적인 고민들, 앞으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자질구레한 걱정이 딸려나오려는 걸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으로 억눌렀다. 카나가와는 윤대협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것들, 가장 빛났던 것들만 있던 곳이었다. 그 투명하고 맑은 바다에 지저분한 홍진 따위는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간 카나가와를 찾지 못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이제 자신은 고등학생 시절과는 너무 멀리 오고 말았다. 윤대협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출범된 프로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면 달랐을까? 하지만 이미 대학 농구 리그에서 카나가와에서 보냈던 여름을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였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윤 대협은 그 해, 단 한 번뿐이었던 여름을 좇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대학생이 되어 새로 만난 팀원, 새로 만난 적수들 모두 좋았지만 마음은 자꾸만 파도 소리가 들리던 카나가와를 떠올리고 만다. 나는 농구만큼이나 카나가와에서 보냈던 여름을 사랑했구나. 더 정확히는, 카나가와의 바다만큼이나 투명하고 깨끗한 투지를 비치던 그를……. 그러나 언제나 깨달음은 뒤늦은 때에야 찾아오고,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고 계속 농구를 하느니 이제 그만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곧 프로 리그가 출범한다는 소문이 있어.’

  대학 팀에서 은퇴식을 마치고 며칠 뒤, 번듯한 정장을 입은 정환이 형이 작은 잔에 술을 따라주며 넌지시 이야기를 꺼낼 때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제 충분해요.’

  이정환은 얼핏 담담해 보이는 윤대협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납득하고 떠났다. 윤대협은 좁은 술집의 의자에 구겨앉아 혼자 몇 잔이고 더 비워냈다. 이미 몇 년 전에 떠나보냈어야 하는 마음을 뒤늦게 송별한 탓이었을까. 그날 윤대협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능남 고교 앞, 능남 고교 앞 역입니다.〉바닷가 근처의 전철역엔 윤대협을 포함해서 관광객들 몇이 같이 내렸다. 마지막으로 떠났을 때가 10년은 족히 넘은 일이었으나 학교로로 가는 길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자판기 몇 개가 바뀌었다거나 하는 것을 빼면 10년 전 그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 정도였다. 내리쬐는 여름의 열기도, 멀리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그대로다. 변한 건 오로지 그 안에 있는 사람뿐인 듯했다.

  어젯밤, 퇴근하고 나니 집 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하나 찍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저, 안영수라고 하는데… 윤대협 씨네 전화 맞나요?’

  ‘영수라고? 안영수?’

  ‘……윤대협. 야, 너 맞지?’

  처음엔 어색해 하던 안영수는 금세 적응해서는 윤대협에게 온갖 잔소리를 쏟아냈다. 대체 뭘 하고 살길래 연락 한 번이 없느냐, 동창회는 왜 안 나오느냐, 네 번호 알아내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윤대협은 반가움 반 얼떨떨함 반으로 고스란히 그 모든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쁜 건데?’

  ‘그냥 이래저래……. 일이 다 그렇지.’

  아마 덕규 선배로부터 귀뜸을 들은 듯했다. 윤대협은 머슥하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한번 시간 내서 학교 와.’

  ‘능남에?’

  ‘우리한테 학교가 능남뿐이지, 그럼 또 다른 학교라도 있어? ……나, 얼마 전부터 농구부를 맡았거든.’

  농구부, 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귓속을 울린다. 그 말을 곱씹어 보는 잠깐 새에 마치 10년 전의 영수와 통화를 하는 기분이 되었다가, 다시 현실로 곤두박질친다.

  ‘감독이라도 된 거야?’

  ‘그건 아니고. 농구부 고문이야.’

  안영수는 고등학교에 졸업한 이후 순조롭게 선생님이 되어, 어쩌다보니 올해 능남에 부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전에 고문 자리에 앉아 있던 선생님은 나이도 나이인데다, 농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새로 부임한 젊은 남자 선생님인 그에게 거의 고문 자리를 떠맡기듯 하고 도망쳤다고. 이제 능남고에서 농구부의 위상이란 예전만 못한 모양이었다. 윤대협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능남 고교는 부진한 농구부래도 꽤 돈을 들여주던 축이었던지라 요즈음의 푸대접이 낯설었다. 유 감독님이 은퇴하고 난 뒤에 학교는 굳이 감독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 이미 시대는 바뀌었다. 체육 특기생으로 해외 유학생들까지 동원하는 다른 강호교에 비하면 능남의 약소 농구부가 설 자리는 더이상 없었다.

  ‘아마 농구부도 올해까지일 것 같아. 3학년들이 졸업하고 나면…….’

  ‘그렇구나.’

 

제가 듣기에도 퍽 무감정하게 들릴 법한 대꾸였다. 안영수는 한 소리 하려다가 푹 한숨을 내쉬고는 ‘그러니까 언제 한번 와라.’ 했다.

  ‘음, 그럴까.’

  ‘덕규 선배도 보고 가고.’

  별 기대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수화기를 든 윤대협은 어느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 내일 갈게.’

  ‘……뭐?’

  ‘내일 한…… 점심 때쯤 가도 돼?’

  ‘내일? 내일 평일이야!’

  ‘영수 너만 상관없으면 되는데.’

  ‘나야 내일도 나가지. 요즘 농구부실을 정리하고 있어서…….’

  ‘그럼 됐네, 내일 보자.’

  수화기 너머로 놀란 영수가 몇 마디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른 것도 같았으나, 윤대협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남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표정이 지워진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뻐근한 몸을 그대로 침대 위로 내던졌다. 부드러운 이불 위에 엎드려 있자니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직서가 버걱버걱 거슬린다. 옷도 갈아입지 못했지만 도저히 아무런 의욕이 나지 않았다.

  ‘능남…….’

  따갑게 내려쬐는 햇볕 아래 손차양을 하고서 멀리 교문을 바라본다. 십 오 년, 십 사 년만에 등굣길을 따라 걸으려니 어딘지 꼴이 우스웠다. 느긋하게 교문 앞으로 다가가니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교문 앞에 그러고 서 있자니 교문 옆 경비 초소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반쯤 연 경비원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윤대협을 훑어보고 있었다. 윤대협은 괜히 한 번 씩 웃어 보였다.

자켓은 대충 구겨서 옆구리에 끼고 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덜렁거리는 데다 셔츠 단추도 두 세 개쯤 풀어헤치고 있으니 외부인 출입증을 쓰게 하는 경비의 눈초리가 곱지 못했다. 결국 연락을 받은 안영수가 학교 안에서 나오고 나서야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바로 온 거야? 그런데 시간이…….”

  “음, 그만 두고 왔지. 그나저나 오늘은 농구부 연습이 없나 봐?”

  “뭐?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아니다, 그래……. 없지. 한참 전에 지역 예선에서 떨어졌는데. 이 날씨에 굳이 왜 부르겠어.”

  안영수는 윤대협의 뜬금없는 말에 더 캐물으려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윤대협이 졸업한 뒤로 학교는 몇 번 증축을 거쳤는지 신 교사니 구교사니 하는 구분이 생겨 있었다. 영 낯선 신교사 건물을 지나니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제라도 된 듯이 기억 속 그대로인 교정이 나온다. 이제는 이곳을 구교사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농구부실도 구교사에 있었다. 안영수를 따라 복도를 걷는 윤대협은 이상야릇한 기분이 사로잡혔다. 몇 번 추억과 현실 속을 자맥질하고 있자니 금세 농구부실 앞에 도착했다.

  “윈터컵 생각도 없는 것 같더라고. 3학년들은 이제 입시 준비를 하겠다고 하고, 다른 학년 애들은 있지도 않아.”

  “그래?”

  윤대협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영수를 따라 농구부실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구조는 윤대협이 기억하는 것과 꽤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정리 중이었다는 안영수의 말마따나 안은 난장판이었다. 캐비닛은 제 빈 속을 활짝 열어 보여주고 있었고, 종이 박스 몇 개에 나뉘어 잡동사니가 처박혀 있었다.

  “2학기부턴 아예 농구부실을 비워 버리게?”

  “그건 아닌데, 미리미리 정리하려는 거지.”

  상패 따위가 간단히 장식되어 있던 장소 또한 텅 비어 있었다. 윤대협이 설렁설렁 농구부실을 돌아보는 동안, 안영수는 종이 박스 몇 개를 뒤지더니 작은 상패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가지고 가.”

  “응?”

  무심결에 받아 살펴보니 카나가와 현 우승 상패였다. 제대로 관리는 안 되었던 듯 먼지가 가득 앉아 있다. 셔츠 자락이 지저분해 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패를 문질러 닦자 글자가 드러난다. 1994년, 윤대협은 상패에 새겨진 날짜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그가 3학년이 된 해, 그가 주장으로서 능남을 이끌었던 해, 능남이 현을 제패했던 때……. 이번에는 정말로 속절없이, 마음이 과거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코트와 벤치가 모두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던 게 귓가에 쟁쟁히 울리는 듯했다. 와하하 파안대소를 내뱉던 유 감독이 갑자기 제 어깨를 두들기다가 어린애마냥 엉엉 울기 시작했을 땐 농구부원 모두가 당황했더랬다. 윤대협이 유 감독을 달래면서 주변 다른 부원들에게 눈짓하자, 다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감독님을 들어올려 행가레를 쳤던 손의 감각. 처음엔 좋다고 환호성을 지르던 감독님이 나중엔 제발 내려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 제 목청을 시원하게 울리던 웃음소리……. 그 모든 감각이 굳어서 이 상패가 되었던 듯이, 잠깐 들고 있던 것만으로도 10년 전 여름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 난다. 윤대협은 상패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안영수에게 건넸다.

  “학교 물건인데 왜 날 주려고 그래.”

  “그걸 여기 사람들이 신경이나 쓰겠냐? 너 안 가지면 나중에 버릴 게 뻔하니까 그냥 가져가.”

  “됐어.”

  한참 서로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하다, 안영수가 벌컥 소리를 지르고는 윤대협의 가슴팍에 상패를 콱 들이박았다.

  “가져가라니까! 네 거라고!”

  “이게 왜 내 거야.”

  어색하게 상패를 받아들면서도 꼭 한 마디를 덧붙이고 만다. 윤대협은 도끼눈을 뜨고서 저를 노려보는 영수의 눈빛에 이크, 하고 짐짓 겁먹은 척을 했다. 안영수는 더 화를 낼 기운도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윤대협을 바라봤다.

  “그때 능남이 현 우승에, 전국 진출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분인 거 누가 모른다 그래? 응? 주장?”

  “이럴 때만 주장이지?”

  하지만 영수의 입에서 나오는 ‘주장’이라는 말에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윤대협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상패를 받아들었다. 안영수는 꽤나 흡족해진 얼굴로 그걸 지켜보았다.

  “점심이나 먹자.”

  “음.”

  “덕규 선배네 가게 가까워. 오랜만에 가자고.”

  “그럴까?”

  “그거 덕규 선배는 절대 안 받을테니까 헛짓거리 하지 말고.”

  속내를 다 들킨 윤대협은 가볍게 웃었다. “왜, 가게에 장식하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안영수는 십 사 년 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듣고 지었던 표정을 구태여 한 번 더 지어냈다.

  “그 소리 예전에도 했잖아.”

  “그랬나?”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 뒤로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다같이 찾아가서 현 우승 상패를 내밀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던 덕규 선배였지만, 우승의 주역은 너희들이라며 한사코 거절했었다. 하지만 윤대협은 변덕규와도 전국에 가고 싶었다. 조금 오만했던 1학년 시절엔 2학년이 되어서 반드시 덕규 선배를 전국에 진출하게 해 주리라 결심하기도 했더랬다. 몇 번 상상도 했었다. 눈물을 흘리는 덕규 선배에게 트로피를 안긴다든지, 아니면 행가레는 어떨까? 2미터가 넘는 덕규 선배지만 농구부원 모두가 달려든다면 해 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윤대협이 2학년이 되었을 때 결국 능남은 전국으로 가는 문턱에서 북 산에 발목을 잡혔고, 변덕규는 가업을 잇겠다며 농구부를 은퇴했다. 그 후 주장의 자리를 이어받은 윤대협이 북산을 꺾고 현 우승을 차지했을 때, 윤대협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은 변덕규가 아니었다. 이미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사라진 서태웅이었다.

  안영수가 변덕규의 가게로 윤대협을 끌고 들어가자마자 변덕규는 아예 점심 장사를 통째로 포기하고서 두 사람을 먹이기 바빴다. 중간에 영수와 대협이 합심하여 그를 자리에 앉히지 않았더라면 메뉴판에도 없는 웬갖 요리를 다 먹을 뻔했다. 내심 윤대협은 이대로 밤새 술잔을 기울이게 될까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어울렸으나, 술이 약한 영수가 먼저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것을 끝으로 꽤 일찍 자리를 파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변덕규는 요즘 영수가 얻어 지내는 작은 빌라 방이 어딘지 알고 있었으므로 윤대협이 무사히 바래다 줄 수 있었다. 다다미 넉 장 반 정도 되는 영수의 방이 알코올 냄새로 가득 찼기 때문에, 윤대협은 그가 바닥에 쓰러져 자는 걸 내버려두고서 그의 집을 나섰다.

  “…….”

  사실 카나가와로 가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윤대협은 늦은 오후의 누그러진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마 안영수가 능남에 부임하면서 얻었을 방은 당연히 능남 고교에 가까웠고, 윤대협이 고등학생 시절 자주 찾아가던 야외 농구 코트와도 가까웠다.

  “여기도 여전하네.”

  낡은 쇠문을 열면 보이는, 온통 흙바닥에 림에 매달린 그물이 다 삭아빠진 텅 빈 코트는 기억 속보다 더 낡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열악한 곳에서 농구를 할 녀석들은 더는 없는 모양이다. 윤대협은 아무도 없는 코트에 서서 림 너머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등학생일 적에도 연습을 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런 낭만이 마음에 들어 종종 찾곤 했다. 윤대협은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트 자켓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상패를 만지작거렸다.

  이 코트에서 서태웅과 어울렸던 건 그 해의 여름, 단 한 번뿐이었다. 능남의 전국 대회 진출이 좌절되고, 윤대협이 쓴 입맛으로 3학년 선배들의 은퇴를 받아들인 어느 날. 서태웅은 다짜고짜 “승부하자.”며 불쑥 찾아왔다. 다른 이였다면 내심 짜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윤대협은 흔쾌히 서태웅을 이 코트로 이끌었고, 티셔츠까지 빌려 주면서 하루 종일 서태웅과 어울리다 작은 조언 몇 마디를 던져주기까지 했다.

그 후 북산은 전국 대회에서 최강 산왕을 꺾었다. 경태에게서 소식을 들은 능남 농구부원들이 여러 가지 소회를 내놓을 무렵, 윤대협은 두 사람만이 아는 그 날의 1대 1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지었더랬다. 서태웅의 성장이 궁금했다. 그와 다시 겨루게 될 겨울이, 이듬해의 여름이 궁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별안간 서태웅은 미국으로 떠났다. 카나가와 현 내에서는 라이벌로 불리는 사이였지만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친분은 없었기 때문에,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작별인사조차 받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난 이후에야 “서태웅은 미국 유학을 갔다지?”하는 세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 한 자리를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궁금했어.”

  윤대협은 농구 코트 근처 벤치에 앉아 94년의 현 우승 상패를 꺼내 들었다. 서태웅이 없는 북산을 꺾고 이 상패를 들었을 때, 윤대협은 문득 서태웅에게 제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사는 동안 대부분의 날에는 서태웅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문득 서태웅에 대한 생각이 치밀곤 했다. 나를 기억은 할까? 네게는 나와의 기억이 한 때의 추억으로만 남았을까? 이제 NBA 스타 선수가 된 너에게 카나가와는 그저 고향일 뿐일까? 두 손으로 상패를 쥐고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여어.”

  어쩌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미지근한 상패에 이마를 대고서, 속없이 서태웅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제가 싫어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윤대협.”

  이번에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마구 뛴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온통 검은 나이키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서태웅이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윤대협은 얼빠진 표정이 되어 한참을 서태웅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기억 속보다 더 선이 굵어지고 단단해진 얼굴을 한 서태웅은 꽤나 담담하게 옆구리에 낀 농구공을 휙 던졌다.

  “윽……?!”

  반사적으로 농구공을 받은 손목이 얼얼할 정도로 힘이 실린 패스였다. 그 바람에 상패가 흙바닥을 구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윤대협을 빤히 보던 서태웅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승부하자.”고만 말하고는 먼저 코트로 가볍게 뛰어갔다.

  “그…… 나 농구 안 한 지 한참 됐어, 태웅아.”

  공을 들고 엉거주춤 쫓아가는 제 입이 뱉은 ‘태웅아’하는 호칭에 윤대협 본인이 더 놀라고 말았다. 그가 멀거니 서 있는 동안, 서태웅은 아무 말도 없이 자세를 낮추고는 어서 덤비라는 듯이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윤대협은 난처한 표정으로 잠깐 웃다가 몇 번 농구공을 바닥에 튀겨 보았다. 탕, 타앙, 탕, 농구공 소리에 맞춰 심장이 더 거세게 뛴다. 몸은 여전히 농구를 기억한다. 윤대협이 불안한 눈빛으로 한 번 더 서태웅을 돌아보았을 때도 그는 여전히 단단한 눈빛으로 윤대협이 기억을 끌어올리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윤대협은 한 여름, 태양이 낮 내내 달궈놓은 야외 농구 코트에서 양복과 구두 차림으로 서태웅과의 승부에 응했다. 분명 10년 간 서태웅은 윤대협이 알지 못하는 까마득한 수준에 올라, 전국에, 세계에 더 나은 수많은 선수와 겨루었을테면서 제게 다가오는 윤대협을 보고는 씩 웃었다.

  “헉, 잠깐…… 좀만 쉬자.”

  서태웅은 흙먼지 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 앉은 윤대협을 빤히 보았다. 자켓은 이미 골대 밑에 잔뜩 구겨져서 버려졌고, 넥타이는 승부 중간에 풀어버린 듯한데 어디에 던져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땀으로 푹 젖은 셔츠 단추 너 댓 개를 풀어헤치고 있었으나 더위를 쫓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윤대협은 서태웅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태웅이 봐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서태웅은 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윤대협은 결국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어느새 하늘은 보랏빛 물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 승부를 시작했을 땐 서태웅을 상대로 30분이나 버틸까 걱정했으나 아직 아주 몸을 못 쓰게 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서 너시간은 버틴 자신에게 괜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자니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제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서태웅이었다. 그 또한 한 여름에도 챙겨 입고 있던 나이키 트레이닝복 저지를 벗어던지고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검은 머리칼이 축 가라앉아 있다. 이제 서태웅도 저와 같은 30대 초반의 나이일텐데, 그의 까만 눈은 십 몇 년 전의 그것과 똑같았다. 여전히 어딘가는 소년같은 그는 한참 윤대협과 눈을 마주쳐주었다. 그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윤대협이었다.

  “우리가…… 몇 년 만이지?”

  윤대협은 다 아는 걸 물었다. “십 오 년.” 정확한 햇수가 서태웅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땐 내심 놀랐다. 카나가와를 떠난 이후로도 서태웅을 잊지 못한 윤대협이야 그렇다쳐도, 서태웅이 이렇게 세심한 녀석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십 오 년…….”

  정말 길었네. 윤대협은 그날처럼 땅거미가 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서태웅을 다시 만나기까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전광판에, TV 브라운관에, 신문의 지면에 비치는 네가 아니라 정말 내 앞에서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이는 너를 만나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오늘 이 잠깐의 만남이 끝나면 다시금 서로 헤어져야 한다.

  이것으로 여름을 끝낼 수 있을까? 카나가와에 모두 두고 왔다고 생각했던, 서태웅과 함께했던 그 여름을 이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윤대협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되어, 눈을 꾹 감았다.

  “카나가와에 있었을 줄은 몰랐네.”

  “시즌 오프니까, 잠깐.”

  “그렇네, 지금 7월이니까.”

  NBA 파이널은 보통 6월 중순이면 마무리된다. 7월이면 서태웅이 잠시 짬을 내어 귀국할 만도 했다. 이대로 대화가 멈추면 서태웅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아무 말이나 내뱉으려던 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선, 매년 7월엔 카나가와에 돌아왔어.”

  서태웅의 담담한 말에 윤대협은 저도 모르게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떤 감정의 가닥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한 얼굴의 서태웅이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승부.”

  “누구와? 나?”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이곤 “승부를 내지 못하고 떠났으니까.”라고 덧붙였다. 윤대협은 그 말에 픽 웃고는 흙바닥을 뒹굴고 있을 현 우승 상패를 떠올렸다.

  “무슨 의미가 있지? 네가 이길 게 뻔한 승부잖아.”

  고교 1학년 때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곧이어 미국 유학까지 떠난 서태웅과 이 작은 카나가와 현에 남아 발버둥치던 윤대협, NCAA 1부 리그에서 활약하던 서태웅과 대학 1부 리그 끝자락에서 매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해 조롱을 듣던 윤대협, NBA에 성공적으로 데뷔해 신인상을 받던 서태웅과 농구를 그만 둔 윤대협……. 윤대협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네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게?”

  거친 손바닥 안에 뜨거운 열기가 고인다. 서태웅이 제게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하며 보냈던 눈빛에 우쭐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카나가와를 떠나고, 대학 리그에서 고군분투하던 윤대협은 서태웅의 소식을 챙겨들으면서 이제 그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선수들이 생겼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농구밖에 모르는 너에게 내가 의미 있었던 유일한 장소, 유일한 시간은 모두 카나가와에 있었으므로 그것이 그대로 박제되길 바랐다. 하지만 서태웅은 구태여 카나가와를 헤매었고 기어코 윤대협을 추억 속에서 끌어내렸다.

  “윤대협.”

  서태웅이 제 손목을 잡고 몇 차레 제 얼굴을 덮은 손을 치워내려고 했다. 윤대협은 몇 번 그의 손을 뿌리치다가 간신히 표정을 가라앉힌 뒤에야 얼굴을 보였다. 미소조차 짓지 못하는 윤대협의 얼굴을 보는 서태웅은 처음으로 당황함이 서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계속 농구를 한다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곧 윤대협은 그게 서태웅이 미국으로 떠났을 때의 변명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라도 다시 한 번 너와 겨룰 일이 있을 거라고…….”

  “글쎄, 미안. 내가 먼저 그만두게 되어 버려서.”

  윤대협은 제 손목을 쥔 채로 더듬거리는 서태웅의 손을 뿌리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만 되었다. 박제된 기억이 유리 장째로 산산조각 난 심정이었다. 서태웅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안영수가 무슨 말을 했어도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윤대협이 골 밑에 던져둔 자켓을 집어들려고 할 때였다.

  “이제 가는 건가?”

  서태웅은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딘지 아쉬워하는 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윤대협의 속을 온통 꼬아놓은 탓에, 그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밑바닥까지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미소지어 줄 수 있었다.

  “가봐야할 것 같은데. 이러다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서태웅은 허망하게 서서 먼지 투성이인 자켓을 걸치는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열렬한 시선이었는지 윤대협은 제 등이 다 따끔거린다고 생각했으나, 그대로 인사도 없이 코트를 떠나려고 했다.

  “윤대협.”

  그러나 저를 부르는 서태웅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를 돌아보는 자신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서태웅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골랐다.

  “언젠가 또……. 다시 승부해.”

  “하나만 묻자.”

  윤대협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무심하게 서태웅을 내려다 봤다.

  “왜 다시 승부를 하자는 거야?”

  표정만으로도 서태웅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단지 오랜만에 만난, 학창 시절의 라이벌과 다시 한 번 겨뤄보고 싶은 순수한 마음의 발로로 윤대협에게 패스를 던졌을지도 몰랐다. 서태웅은 제가 품은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윤대협은 그를 상처 주고 싶었다.

  “네가 이겼어, 서태웅.”

  그리고 그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윤대협은 투명하게 제 얼굴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서태웅의 눈동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씁쓸한 뒷맛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서태웅을 지나쳐 갈 생각이었다.

  “윽!”

  억센 손아귀가 손목을 붙들고 강제로 돌려세운다. 서태웅이었다. 윤대협은 뿌리치든, 놓으라고 일갈하든 할 셈이었다. 고개를 든 서태웅이 저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보다가, 멱살을 쥐고 입술을 부딪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읍, 너, 윽! 하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윤대협은 제게 입술을 붙여오는 서태웅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며 마구 고개를 흔들었지만 저를 끌어당기는 서태웅의 팔뚝을 벗어날 순 없었다. 매일 고강도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현역 선수의 완력을, 운동을 그만 둔지 10년은 족히 지난 회사원이 이겨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윤대협은 끔찍한 기분이 되어 두 손을 떨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항이 멎자 목을 옥죄던 손아귀도 한결 부드럽게 바뀌었다. 입술을 부비는 것만 할 줄 알아 보였던 서태웅은 곧 혀를 뾰족하게 세워 윤대협의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집요한 움직임에 결국 윤대협은 그 침범을 허용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입술과 혀에서는 미지근한 타액의 온도와 바닷바람을 맞고 땀으로 절여져 찝질한 맛이 느껴졌다. 서태웅이 윤대협의 혀를 건드릴 때즈음, 윤대협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키스는 전혀 키스 같지 않았다. 서태웅은 속눈썹이 빽빽하게 박힌 눈을 꾹 감고 윤대협의 입 안에서 그가 감춰둔 심장을 찾는 듯이 거칠게 헤집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작 키스 한 번으로 십 오 년을 묶어둔 감정이 흘러 넘치겠는가? 서태웅은 곧 윤대협이 기대했던 대로, 아무런 교류 없는 키스를 끝내고는 혼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이게 되었다. 윤대협은 그 열기에서 억지로 한 발짝쯤 떨어진 채로 서태웅을 내려다봤다.

  “널 이기고 싶어서……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게 아냐.”

  “그래?”

  서태웅의 입술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도 윤대협은 고개를 모로 비꼈다. 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윤대협의 모호한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던 건지, 서태웅이 이를 악문 채로 다시 윤대협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겼다. 윤대협은 눈을 지긋이 감고서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널 좋아하니까!”

  닻에 매달아 바닷속 깊은 곳에 처넣은 심장이 울렁거린다. 너라는 강물이 짙고 무거운 바닷물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그래서 더는 모른 척 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게……. 가만히 눈을 뜨자 절박하게 헐떡이는 서태웅의 얼굴이 온통 눈앞을 메우고 있었다.

  “널…….”

  그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윤대협은 그대로 서태웅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번에는 서태웅이 버둥거린다. 윤대협이 두 팔로 그를 가득 끌어안으려 들자 몸부림을 치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때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바다가 언제 제게로 흘러든 강물을 다시 상류로 올려보내던가? 곧 서태웅 또한 윤대협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윤대협을 마주 끌어안았다.

 

 

 

  한여름의 바닷가는 해가 다 지고 어둑해진 때에도 사람이 꽤 많았다. 물놀이를 나온 듯한 어린애들이나 근처를 산책하는 연인들, 집으로 돌아가는 연인들 사이 두 사람은 꽤 이질적인 차림으로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특히 윤대협은 추레한 양복 차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홀가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쯤 돌아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태웅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윤대협은 파도를 구경하는 척하며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득 서태웅은 “우리 집, 근처야.”라고 툭 뱉었다.

  “그렇구나.”

  괜히 서태웅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한 척 멀리 수평선을 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고개를 돌린 서태웅이 저를 쏘아보는 게 느껴진다. 윤대협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아, 은은한 미소를 지어냈다.

  “……씻고 가.”

  “그런데 너희 집이면 가족분들 계신 거 아냐?”

  장난이 심했던 모양이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뾰족한 팔꿈치에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독립했어.”

  “아야야, 하하하!”

  “대답.”

  서태웅은 뭐가 그리 웃긴지, 옆구리를 부여잡고 모래사장에 쓰러져 푸슬푸슬 웃는 윤대협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왁스와 땀이 엉겨 붙은 머리카락에 모래까지 잔뜩 묻히고도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얼굴로 씩 웃었다.

  “응,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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