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첫사랑의 겨울

해람

  *별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알오물입니다.

  ** 마지막에 2세 언급이 있습니다. 

  센도는 옷장을 눈 앞에 두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있는 힘껏 멋을 낸 상태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은 좀 웃긴 모양새였지만 당사자는 진지했다. 

   ‘뭐 입지’

  평상시라면 망설임 없이 학교 지급 롱 패딩을 입었겠지만 데이트에 패딩이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연하의 가오(?)가 있지 밖이 아무리 추워도 패딩이 왠 말인가. 생존과 가오 사이에서 센도는 가오를 택했다. 패딩은 아니어도 비싼 모직코트인데 춥지야 않겠지. 

  ‘코치님은 뭐 입고 오시려나’

  루카와 카에데. 고등학교 때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 끝내는 NBA 입성을 이뤄낸 일본 농구계의 슈퍼스타. 코치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식 코치는 아니었다. 부상으로 다소 이르게 시즌을 접은 후 잠시 일본에 들어왔다가 감독인 코시노와의 인연으로 일본에 있는 동안 임시로 코치 비스무레 한 것을 해 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센도 아키라는 루카와 카에데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다. 겉으로는 차가워보이지만 팀원들이 기합을 넣을 땐 빠지지 않고 같이 세레모니를 했고 의외로 섬세한 신경줄로 쳐져 있는 선수들을 맞춤으로 위로해 주기도 했다. 농구 실력이야 더 말할 게 있나. 이런 사람에게 반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센도 아키라에게 루카와 카에데에 대한 사랑은 불가항력의 재난 같은 거였다. 

 그렇게 반한 뒤로, 열심히 플러팅을 했다. 지각을 밥먹듯이 하던 센도 아키라는 온데 간데 없이 누구보다 빠르게 출석했고 항상 맨 앞에 서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루카와의 코멘트를 경청했다. 그런 정성의 결과가 오늘의 데이트(?)였다.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초조하게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데이트 상대가 도착했다. 장소에 어울리는 나이키 셋업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

  서로의 모습을 본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어른’인 루카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춥지 않아?”

  혼신의 힘을 다해 멋을 냈는데 사랑하는 임의 눈에는 제자가 엄동설한에 춥게 입고 나온 것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만 보이시나요.

  “완전 괜찮아요! 저 아직 어리다구요. 젊음을 우습게 보시면 안돼요”

  호기롭게 외쳤더니 그런대로 납득이 됐는지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센도가 멋대로 데이트라고 생각한 그것은 새 운동화를 사는 일정이었다. 보통 원래 신던 것을 신기 때문에 보호자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최근에 훅 자라면서 원래 신던 운동화가 맞지 않아 바꾸는 김에 아예 새로운 모델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센도는 바로 그 핑계로 루카와를 불러 낸 것이었다. 전문가가 봐 주면 더 좋은 운동화를 살 수 있을 거고 그럼 농구도 더 잘 할 수 있지않겠냐는게 센도의 어필이었다. 그리고 농구귀신 루카와가 자연스럽게 낚인 것이고. 의외로 낚시에 소질이 있는걸까. 약속을 잡았을 때 센도의 감상이었다.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꿈꿨건만 농구귀신을 상대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모델을 신었다 벗었다 한 끝에 컨버스에서 나온 모델 하나를 골라 결제하려는데 루카와가 한 발 빨랐다.

  “어, 코치님. 괜찮아요. 부모님이 카드 주셨어요. 중요한 거니까 걱정말고 사라면서요”

  “내가 골라준 거니까 내가 마무리 할게. 이정도는 하게 해줘. 내가 사준거니까 네가 이걸 신고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어”

 

  아, 이 사람 역시 유죄다. 순수하게 농구를 잘 했으면 하는 마음이겠지만 센도의 귀에는 사랑고백쯤으로 들렸다. 루카와가 아무한테나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다고 하지는 않을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한 거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미쳤냐고 했겠지만 둘만의 데이터 였기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센도를 말려줄 사람이 없었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게”

  일정때문에 약속 장소에서 바로 만난 게 신경쓰였는지 루카와가 먼제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고 나섰다. 이게 무슨 말이람. 어떻게 얻은 기횐데 바로 헤어지다니. 

  “바로 들어가셔야 돼요?” 

  “아니. 그런건 아냐. 왜?”

  “ 안 바쁘시면 같이 거리 구경이라도 하고 들어가요. 다음주가 크리스마스라 분위기도 좋은데 아깝잖아요”

  남자 둘이서 뭣하러 크리스마스 무드의 거리를 돌아다니냐는 의문이 들 법도 한데 루카와는 ‘호오…’하더니 그래 가자, 하고 시원스럽게 허락했다. 역시 나는 럭키보이야. 

  그 뒤로는 별로 기억이 없었다. 온 세상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단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센도는 자신이 아주 바보같은 얼굴이었을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얼굴 근육이 다 풀어진 것은 너무나 잘 느껴졌기 때문에. 

  그리고 달콤한 데이트의 댓가는 혹독했다. 분명히 하나도 안 추웠던 것 같은데 코트 차림으로 오래 돌아다닌 탓인가 센도는 감기로 알아누웠다. 이런 걸 두고 영광의 상처(?)라고 해야할지. 앓더라도 도쿄의 본가로 돌아가서 드러누웠으면 좋았겠지만 출발하지도 못하고 앓아누워 오롯이 혼자였다. 간신히 학교에 결석을 이야기하고서,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열에 들떠 자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부턴가 조심스럽고 또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익숙한듯이 해열 시트를 이마에 척 붙이고는 뒤척이느라 내려가버린 이불을 정리해서 덮어준다. 잠시 토닥여준 손길이 다정해서 눈물이 났다. 지금 부모님보다 더 보고싶은 한 사람. 그 사람이기를 바라는 건 욕심인걸까.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센도는 여전히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조금 어지러웠지만 한결 나아진 컨디션으로 깨어났다. 아니, 나아진게 아닌가? 눈을 떴으니 일어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을켜보려고 꿈틀거리는데 눈에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것이 보인다. 결이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 엎드려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살짝 보이는 뒷덜미로도 알 수 있는 새하얀 피부.

  잠에서 막 깬 머리로 대체 무엇을 본 건지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어서 결론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곤히 잠든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는데 그다지 의미는 없는 것 같았다. 배게가 움직이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잘도 잤다. 어지간한 움직임으로는 깨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몰래 자신에게 엎드려 잠들어 있는 사람을 관찰한다. 센도가 움직이려고 했으니 깰 법도 한데 움직임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것 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사람. 단순히 농구를 잘 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고 품 안에 넣어 온기를 느끼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다. 센도는 태어나 처음으로 농구만큼 아니 어쩌면 농구보다 더 욕망하는 존재가 생겼다. 어린 나이를 무기 삼아 사고를 쳐 보기로 했다. 이 마음은 진심이니까. 

  고개를 숙여 루카와의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춰본다. 이정도로는 반응이 없다. 용기를 얻어 조금 더 과감해 지기로 한다. 이번에는 목덜미에 짧게 입맞춤을 해 본다. 너무 떨려 입술이 닿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것 만으로 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다. 센도는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어쩔줄을 몰라했다. 센도는 다른 아이들보다 섬세하고 어른스러웠지만 그래봐야 16살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서, 그것도 스킨쉽을 시도해도 들키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는 몰랐다. 그저 본능에 따라 다음 진도를 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좀더 길고 진득하게 하얗고 아름다운 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귓볼을 입술로 살짝 깨물어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핥아보기도 했다. 처음에 조심스러웠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센도는 점점 더 과감해졌다. 이제 입맞춤을 넘어서서 한참 전 부터 자유로워진 손으로 목덜미를 따라 아래로 이어본다. 하얗고 아름다운 피부위를 손가락으로 미끄러지는 것 만으로도 다시 열이 오른다. 정신없이 키스를 이어가던 센도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어느새 루카와가 눈을 뜨고 센도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센도의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루카와는 표정이 잘 드러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뭘 했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인 건 확실했다. 

  “코치님…”

“너한테 뭐라고 하려는 건 아냐. 어리다고 무시할 생각도 없고. 그래도 받아줄 수는 없어. 나는 어른이고 너는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씻고 와. 죽 사왔으니까 차려줄게. 농구 하려면 잘 먹어야 해”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는 것이 저를 위한 것임은 안다. 받아주지는 않을 테지만 무시할 생각이 없다는 것도 진심일 것이다. 센도는 그것이 조금 슬펐다. 늦게 태어난 것은 잘못이 아닌데, 잘못이기도 하다. 

  “저는 코치님 좋아해요. 선수로서 동경하는 것 뿐 아니라 연애 대상으로서요. 저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건 알아요. 그래도 제 마음은 진지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알아. 내가 아무리 둔해도 그런것 까지 모르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거절하는 거야. 네가 진지하니까. 괜히 희망을 가지게 하면 안되잖아”

  “너무 확실하게 거절하시네요”

  “내 포지션을 생각해주길 바래. 자, 죽 데워놨으니까 먹어. 멀쩡해보이니까 이제 갈게. 오늘까지는 다른거 하지 말고 잘 먹고 많이 자”

  “네”

 

  루카와는 센도의 머리를 휙휙 쓰다듬고는 미련없이 떠나버렸다. 그리고 남겨진 센도는 루카와가 남기고 간 죽을 먹으며 실연의 슬픔에 몸서리쳤다. 아니 정말로. 늦게 태어난게 죄는 아니잖아.

 

  실연의 슬픔을 잊겠다고 러닝훈련을 하다가 간신히 나은 감기가 두배로 악화되어 감독과 임시 코치에게 크게 혼난 것은 후일담 아닌 후일담이었다. 겨울은 상실의 계절. 그것이 센도가 첫사랑을 실패하며 얻은 교훈이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라는거야. 노력이 중요하다, 노력이. 알겠지?”

  센도는 남매를 앞에 두고 일장연설 중이었다. 그러나 다섯살과 이제 막 한살이 된 아이들은 아버지의 연설에 그다지 감동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센도와 판박이인 아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다는 표정이었고 사랑하는 배우자를 쏙 빼닮은 귀여운 딸은… 아마 장대한 러브 스토리의 초입부에서 이미 잠든 것 같았다. 아이가 머리를 기댔던 부분이 침으로 축축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여보오!”

  언제 들어온 건지 루카와가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임은 잘 끝났어요?”

  “어, 다음엔 애들 데리고 만나자고 그러더라. 우리 만으로도 시끄러운데 무슨 말인지”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말하는 표정마저도 좋아서 센도는 둘째와 함께 루카와를 껴안았다. 

  “왜요 애들 챙기느라 오히려 조용할 수도 있지”

 

  루카와가 그 말에 대답하려는 찰나 자기만 빼고 세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게 불만이었던지 얌전히 앉아있던 첫째가 센도를 들이받았다.

  “나도, 나도 안을래!!”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아들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지만 센도 아키라가 누구인가. 이래뵈도 현역 농구선수였으며 MVP에도 여러번 선정된,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다. 있는 힘껏 달려드는 아들까지 편안하게 안아 올려 세 명을 한꺼번에 껴 안고서 말했다.

  “숙소 빌려서 애들끼리 놀게 두면 좀 괜찮을거에요. 독채로 된거. 애들 보기 좋은 곳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하는거지”

  “그건 나도 아는데 멤버를 생각해 봐. 어른들의 대화가 되겠냐고. 다음엔 같이 가. 다들 같이 오니까… 직접 봐야 애들까지 보자는 소리를 안 하지”

  진저리가 난 듯 말하지만, 목소리 안쪽에는 함께 했던 멤버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게 보여서 센도는 살짝 웃었다. 타박하는 것 같으면서도 센도의 제안에 혹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루카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잘 해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다 함께 모여서 재미있게 놀자. 그것이 센도의 생각이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행동에 옮긴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 그게 센도의 신념이었다. 잊을 수 없는 그 겨울로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신념은 센도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겨울에는 좋은 일이 생기니까 다들 모여서 즐겁게 놀고 나면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아진 센도가 루카와의 품을 파고 들었더니 익숙하다는 듯이 루카와가 토닥여준다.

  “넌 겨울만 되면 기분이 좋아보이더라. 아주 날아다니겠어”

  “티 나요?”

  “많이 나”

  “좋아 하는 거야 당연하죠. 겨울에 형이랑 만났잖아요. 나 그때 입었던 옷 아직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행운의 상징으로”

   “나는 너 감기 걸린거만 기억나는데”

 

  가차없는 루카와의 말에 무드가 와장창 깨졌지만 센도는 굴하지 않았다.

  “아무튼 겨울은 저한테 중요한 계절이에요. 그러니까 내년엔 좋은 사람들하고 기념하고 싶어요”

  “좋은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마음대로 해. 네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

  아, 정말이지. 아무리 애를 써도 연상의 시간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연하만의 매력을 보여줘야지.

  “역시 날 사랑해주는 거 형밖에 없어요. 나도 사랑해요!!”

====

이게 분명히 머리속으로 굴릴때는 재미있었거든요. 근데 쓰다말고 이시국 크리를 맞으면서 좀 서둘러 마무리를 했더니 

이도저도 아니게 됐네요(...)

그래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센루 레이디들이 알잘딱깔센으로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제 안의 센도는 여름 소년인데 첫사랑ㅎㅎ 덕에 겨울도 좋아하게 되었을거라고 생각해요.

勝負·初めて·恋人·四季·年末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