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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데워져서

동태적균형

ㅤ어떤 과학자가 말했다. 이번이 겨울로 맞는 마지막 새해일 거라고. 이 땅에는 앞으로 덜 더운 여름과 더 더운 여름만이 남게 될 거라고. 저 얘기 말이야, 진짜일까? 그에게 완전히 기대어 안겨 있던 자세 탓에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둘 사이에는 고개를 조금이라도 돌리면 필시 입술이 닿을 만큼의 거리만이 놓여 있었다. 구형 텔레비전 속에선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ㅤ“넌 여름 좋아하잖아.”

 

ㅤ윤대협에게도 제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윤대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더 맞붙여왔다. 아무래도 서태웅 생일은 겨울이었으면 하거든. 소곤소곤 내뱉아진 음절들에 고개가 휙, 반사적으로 돌아간다. 귓가가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잘 빠진 콧대 옆으로 어설프게 불시착한 입술이 금방 떼어졌다가, 원래 가야 할 자리로, 그의 도움을 받아 꾹 내려 앉았다. 짧은 입맞춤 후에 윤대협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작은 통의 파란 뚜껑을 열어 끈적이는 덩어리를 얼마간 덜어냈다. 그걸 서태웅의 입술에 답답할 정도로 가득 발라놓고, 다시 한번 더 얼굴을 감싸왔다. 이제서야 쪽쪽, 물기어린 효과음이 허전하지 않게 작은 방을 메웠다.

 

“눈 보러 갈래?”

 

ㅤ생애 마지막 겨울, 그보다 더 거창한 핑계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꼭 가장 겨울다운 생일을 같이 보내자는 얘기들을, 윤대협은 아주 오랫동안, 평소보다 반음 높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둘은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었으므로, 서태웅의 귀도, 목덜미도, 가슴께도 모두 그걸 들었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서태웅은 홀로 생각했다. 이 겨울이 부추긴 거리감이 영영 사라지는 것인지, 종일 포개어져 있어도 불쾌하지 않음이, 오히려 늘 적당히 잘 데워진 그의 품을 찾게 됨이, 빙하가 다 녹아버리면 정말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에 대해. 답을 알기 어려운 질문은 늘 알기 어려운 기분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서태웅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배워둔 바가 있었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지나치게 단순한 해법이긴 했어도.

 

ㅤ“응,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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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저녁 열한 시, 시외버스터미널, 한 시간 반 뒤에 출발할 야간 버스 티켓 두 장. 목적지는 오늘이 아니면 아마 영영 가보지 못했을 멀디 먼 곳. 일기예보도 확인하지 않고서 오로지 눈이 무릎만큼 쌓인다는 소문에 기대어, 윤대협과 서태웅은 새벽을 기꺼이 내어놓기로 했다. 둘이 아니었다면 고를 리 없었을 선택지를, 둘일 때는 별 시답지 않은 이유들을 붙여 참 쉽게도 골랐다.

좌석은 드문드문 차 있기도, 비어 있기도 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창가자리로 밀어 넣었다. 윤대협은 못 이기는 척 순순히 밀어 넣어졌다. 가방 두 개를 선반에 올리는 것도 서태웅의 몫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한 안내 방송이 흘러 나오고, 윤대협이 안전벨트 두 개를 달칵이며 채워냈다. 터미널을 빠져 나간 버스는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실내등을 껐다. 가방에서 미리 꺼내 놨던 줄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꼈다. 시야에 어둠이 들어찼다.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희박한 빛에 익숙해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들어 버리기에 더없이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서태웅은 잠들지 않았다.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 화면 마냥 까맣기만 한 창문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ㅤ윤대협은 멀미를 했다. 오히려 편한 부분이 있다던 얘기가 능청스러운 장난만은 아니었던 건지 어느새 꾸벅꾸벅 머리가 흔들렸다. 서태웅은 최대한 얌전히 손을 뻗었다. 두툼한 겨울 외투가 곳곳에 쓸리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내 툭-하고 무게가 실려왔다. 이래서야 안쪽 자리를 양보한 보람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서태웅은 그저 그가 깨지 않기를 바랐다.

눈은 별을 닮았다고, 그러니 어두울수록 잘 보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그 믿음은 애써 지켜내야만 하는 중요한 범주의 것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틀려도 대수롭지 않을, 그런 것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눈은 별이라기 보다는 비에 가까웠다. 바깥을 적시고 있는 것이 비 아닌 눈이라는 걸 서태웅은 한참의 시간을 들여 깨달았다. 창을 세차게 두드리는 쌀알 닮은 알갱이들은 아주 짧은 순간 눈이었다가, 금세 축축히 녹아 형체를 잃고 물이 되었다. 그리고는 대각선 무늬의 긴 흔적을 남기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재미도 뭣도 없는 장면에 서태웅은 오래도록 시선을 두었다. 뿌연 습기가 창을 가리면 조심히 닦아내면서. 따가워진 눈을 깜빡이다 자각도 못한 채로 잠에 빠져버린 건 끊겨버린 이어폰 속 노래를 몇 번이나 다시 재생한 뒤의 일이었다. 어깨 너머 풍경이 기껏 푸르기 시작할 때 즈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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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우습게도 도착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비몽사몽한 정신을 다시 꿈나라로 보내는 것이었다. 대충 찾아 들어온, 침대도 없는 한 칸짜리 숙소에서 두 사람은 이미 늦어버린 굿나잇 인사를 나눴다. 바닥에, 그리고 서로에게 들러붙어 못다한 밤을 남김없이 쓰는 동안, 하늘은 그들이 바라던 대로 눈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서태웅이 먼저, 윤대협이 그 다음이었다. 서태웅은 의외로 수면습관이 꽤 담백한 편이어서 일단 할당량을 채우기만 하면 곧장 몸을 일으키곤 했다. 그 할당량이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에 반해 윤대협은 얼마를 자든 하루를 보내는 데 크게 영향이 없는 대신 항상 눈 뜨기를 힘들어했다. 서태웅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꼭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계속 옆을 지키는 방식의 기다림은 아닐지라도 서태웅은 윤대협을 얼마든지 기다릴 용의가 있었으므로. 물론 윤대협은 서태웅을 혼자 오래 둔 적이 없었기도 했다. 책상다리를 한 무릎위로 머리통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잠꼬대 같은 웅얼거림도 함께 올라온다. 배 안 고파? 춥지는 않아? 밖에 눈 많이 오는 거 같던데. 잠결에도 서태웅은 온도로 윤대협을 찾아낼 수 있다. 오늘 같은 날에는 특히 그렇다. 기온이 떨어질수록 그의 난 자리는 티가 났다. 그럼 미지근한 저를 윤대협은 어떻게 알고 붙어오는지, 역시 서태웅은 윤대협이 신기했다.

 챙겨온 농구공을 기어이 들고 나가겠다는 서태웅을 윤대협은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공이 든 서태웅의 가방을 스스럼없이 어깨에 걸쳐 매기도 했다. 웃는 낯으로 어차피 안 튀어 오를 걸, 따위의 얘기를 덧붙이긴 했지만 서태웅은 그보다 한 발 빨리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차가운 철제 문 너머의 세계는 말 그대로 겨울, 겨울이었다. 구름이 가득 찬 하늘에서부터 얼음결정들이 두껍게 내려앉은 바닥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얀색인. 그런 광경을 눈 앞에 두고도 춥다는 감상이 우선할 만큼 쌀쌀한 날씨마저 완연한 겨울이었다.

그 겨울 속을 윤대협과 서태웅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무작정 걸었다. 일단 속에 뭔가를 좀 집어넣자는 단순한 계획을 빠르게 해치우고 나니, 이제 일정도, 목적지도 남아있지 않았던 탓이다. 길이라는 경계가 흐릿해진, 번화하지 않은 동네의 작은 거리를 네 살배기 미아 마냥 함께 헤맸다.

서태웅은 걸음마다 따라오는 차가운 기운이 마음에 들었다. 푹푹, 그리고 뽀드득. 확실히, 이런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건 눈이 유일했다. 서태웅은 반질하게 잘 닦인 농구 코트를 사랑해 마지않았으나, 결코 지금 닿아오는 것과 같은 감촉을 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되도록 많이 밟아 두어야만, 그래야만 했다.

 

ㅤ“어디 가서 농구나 할까?”

 

 서태웅이 절대 거부할 수 없을 제안을 무책임한 말투로 던져놓고, 윤대협은 끝내 서태웅을 우뚝 솟아 있는 백보드와 림 앞으로 데려다 놨다. 근처에 학교가 있길래 혹시 싶어 와봤는데, 라는 그의 설명은 더없이 부족했으나 상으로 뽀뽀, 라는 그의 요구는 더없이 정당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서태웅은 공을 꺼내 들면서 그 요구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니가 이기면.

힘껏 내쳐진 가죽공은 윤대협이 예상했듯 손으로 돌아오질 못했다. 또,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고요하게 눈더미 속으로 안겨 드는 것이 다였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봤다. 윤대협도 서태웅을 봤다. 시선이 잠시간 얽혔다.

윤대협이 끼워줬던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딱딱하게 얼어 있던 공의 낯설고 차가운 감촉에 절로 소름이 일었다. 어쨌든 농구라는 것은 이 동그라미를 저 높이 매달린 동그라미에 통과시키면 그만인 게임이라, 서태웅은 그대로 가볍게 슛을 던졌다. 백보드에 쌓여 있던 눈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ㅤ“3점 10개 내기.”

 

ㅤ중간 즈음부터 윤대협은 눈을 뭉쳐 공 대신 썼다.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오르던 눈덩이가 방향을 바꿔 서태웅을 향하기 전까지 승부는 난전을 거듭했다. 이후로는 아주 손쉬운 서태웅의 승리였는데, 아무래도 서태웅은 싸움이라면 그다지 져 본 기억이 없었다.

묵직한 얼음공이 이리저리 부서지고 깨지다가, 나중엔 거의 가루 상태 그대로인 눈을 서로에게 바삐 뿌려 댔다. 도망가는 윤대협의 등은 맞출 곳이 많았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도 한결같이 고수하는 어두운 색 코트가 반격할 새도 없이 젖어 들어갔다. 윤대협이 나뭇가지로 그럴듯하게 그려 놓은 삼 점 라인은 발자국 아래로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항복 선언과 함께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윤대협이 얘기했다. 눈싸움이라는 거, 생각보다 로맨틱하지는 않네. 중간중간 큭큭거리는 웃음이 섞여 들려왔다. 그래도 재밌었다. 그치.

 

ㅤ눈밭에 윤대협과 똑같이 따라 앉아, 서태웅은 장갑을 다시 꼈다. 이미 굳어버린 손이 더 둔해지는 감각은 좀처럼 즐겁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서태웅은 잠시간 손가락을 꼼지락 대고서, 그대로 윤대협의 목 뒤를 손으로 감싸 잡았다. 몸에서 입술이 차지하는 면적은 지극히 사소할 텐데도, 전해지는 온기는 사소하지 않게 따뜻했다. 길고 긴 입맞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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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다섯 시가 겨우 넘은 시간임에도 돌아가는 길엔 해가 없었다. 오렌지 빛 할로겐 가로등이 깜빡이며 켜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은 제법 흔치 않은 일이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켜지고 꺼질 텐데, 이상하게도 그랬다. 걸음을 뗄 때마다 우산 아래로 등불 몇 개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비교적 큰 도로 쪽은 제설차가 지나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드러난 아스팔트 위로 눈과 다른 고운 입자가 평평히 뿌려져 있었다. 아쉬운 마음은 괜히 사람을 부추기곤 해서, 서태웅은 윤대협을 푹신한 눈이 남아있는 좁은 골목으로 이끌었다. 이 비효율적인 여정에 불만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은 종일 지겹도록 흩날렸다. 헤아리자면 끝도 없을 개수의 눈송이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서태웅은 지난 새벽 동안 정리해 두었던 중요하지 않은 믿음 하나를 다시 꺼내야만 했다. 주황색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눈 알갱이는 분명 별과 닮아 있었으니까. 그 막역한 믿음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까만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거리를 걸으면서 서태웅은 머릿속으로 결론을 고쳐 썼다.

얄궂은 날씨의 영향인지 영업종료가 적힌 팻말이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제과점이나 빵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슈퍼마켓 한 쪽에 자리한 낡은 프랑스어 간판을 발견하고 나서야 윤대협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그는 서태웅의 생일에 당사자인 저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굴었다.

윤대협이 촌스럽고 화려한 설탕 맛 케이크를 고를 때, 서태웅은 옆에서 진열된 바게트가 장식인지 아닌지를 더 고민하고 있었으니 틀린 설명은 아닐 터였다.

ㅤ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서태웅은 떼를 썼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고, 보통의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이니 케이크가 등장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그렇지만 자정은 기다리기에 너무 멀었다.

사실 서태웅은 내내 추위에 시달렸다. 구태여 티 내지 않았을 뿐 손발은 시리다 못해 따가웠으며 얼굴엔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와 딱 좋은 온도의 윤대협이 서태웅에게는 필요했다. 그 필요는 어렵지 않게 충족될 것이었으나 그 끝은 필시 기절 같은 잠이 될 것이었다. 윤대협과 함께 있을 때의 서태웅은 유난히 잠이 많기도 했다.

 

ㅤ“윤대협, 지금 케이크 먹어. 빨리.”

 

ㅤ윤대협은 반쯤 순순히 서태웅의 요구에 응했다. 서태웅도 우선 씻고 오라는 윤대협의 요구에 응했다. 덕분에 보송하고 나른한 상태로 앉아 윤대협이 초 꽂는 장면을 구경했다. 긴 초 하나와 짧은 초 여럿이 초콜릿 장식을 피해 단단한 크림 위로 자리를 잡았다. 

윤대협은 손톱만한 성냥에 불을 곧잘 붙였다. 탁탁 두 번 그어진 성냥머리는 여기저기 빛을 옮겨 주고서 가장 먼저 사그라들었다. 오렌지색 빛과 하얀 케이크는 어쩐지 바깥 풍경을 떠오르게 해서, 서태웅은 어렵지 않게 소원을 정해 둘 수 있었다. 방을 비추던 형광등을 꺼트리고 나니 더 그랬다.

생일 축하해. 미처 생일이 되지 못한 얕은 밤에, 서태웅은 알록달록한 초를 불어 껐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그런 다음, 서걱서걱 설탕이 씹히는 큼지막한 케이크를 굳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 두 조각씩, 남김없이 해치웠다.

 

ㅤ“내년에도 오늘이 겨울이었으면 좋겠어.”

 

ㅤ나도 그래. 빈틈없이 맞붙어 누워있던 탓에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윤대협에게도 제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윤대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더 겹쳐왔다. 서태웅은 홀로 생각했다. 이 겨울이 부추긴 거리감이 영영 사라지는 것인지, 종일 포개어져 있어도 불쾌하지 않음이, 오히려 늘 적당히 잘 데워진 그의 품을 찾게 됨이, 빙하가 다 녹아버리면 정말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에 대해.

답을 알기 어려운 질문은 늘 알기 어려운 기분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여전히 서태웅은 그 질문들에 어울릴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 질문들이 데려온 기분의 정체를 조금쯤은 밝혀냈다는 만족감을 얻었다. 서태웅은 윤대협과 보낼 겨울이 여전히 남아있기를,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 * *

 

 

 

ㅤ우리는 어떻게 되었어야 했던 걸까. 여전히 윤대협의 품에는 서태웅이 있었지만, 여전히 윤대협과 서태웅은 어떤 관계도 아니었다. 약간의 물리적 거리도 둘 사이에 놓지 않으면서, 아무런 이름이나 속박도 둘 사이에 붙이지 못한 것은, 순전히 윤대협의 탓이었다. 정확하게는 윤대협의 오만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태웅은 애를 썼다. 적어도 열 번의 고백을 윤대협에게 전했다. 윤대협은 적어도 열 번의 고백을 거절했다. 표면적으로 서태웅의 고백은 거절하기가 쉬웠다. 사귀자 또는 만나보자, 그런 관계에 대한 얘기 없이, 좋아한다는 말과 눈빛이 전부였으므로. 그럼 저는 마치 수락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았다는 대답을 내놓으면 그만이었다. 고개를 내저을 필요도, 부정적인 대답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

 

 

 

ㅤ결론적으로 그 과학자는 틀렸다. 물론 큰 틀에서 맞은 예측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었다. 텔레비전 속에는 새로운 얼굴을 한 과학자가 등장했다. 빨갛거나 파란 화살표가 어지러이 늘어져 있는 여러 장의 지도가 화면에 가득 비춰졌다. 마지막 겨울이라던 장황한 헤드라인은 영원한 겨울이라는 더 장황한 헤드라인으로 대체되어 갔다.

우리는 아무 대비 없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잃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갔다. 날이 너무 추웠다.

많은 것이 변했다.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기도 했다. 으레 미디어나 창작물에서 묘사되던 아포칼립스와 비교하자면 확실히 별 일 아닌 듯이 느껴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인류는 살아남았고, 문명은 유지되었으며, 사회는 작동했다. 심지어 여전히 축구를, 야구를, 배구를, 농구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일이 괜찮은 건 아니었다.

사실 윤대협은 겨울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겨울만이 남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단지 마지막 겨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대협과 서태웅의.

서태웅은 지금쯤 미국에 있어야 했다. 윤대협과 같은 코트에 서 있지도, 그 이상의 무엇이라도 하지 말아야 했다. 이 이야기의 장르를 로맨스로 본다면 이보다 답답한 배드엔딩은 없겠지만, 둘 중 누구의 삶도 단순한 러브스토리만은 아닐 테니, 윤대협은 그 작은 비극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준비되지 않은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훨씬 나았다.

이제 그 바보 같은 오만은 실수, 또는 실책으로 윤대협에게 돌아왔다. 겨울도, 서태웅도 언제 떠날지, 아니면 영영 떠나지 않을지 모르는 채로 윤대협의 곁에 남았다.

윤대협은 후회했다. 서태웅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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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방파제 위에서는 낚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의 파도 모양대로 꽝꽝 얼어버린 바다에 낚시대를 드리우기 위해서는, 미끄러운 얼음 표면을 직접 밟고 들어가 작은 구멍을 뚫어야 했다. 윤대협은 보통 먼저 온 누군가가 뚫어놓은 구멍 앞에 자리를 잡는 편이었다. 손이 시리기도 하고, 적당한 장비도 없어서. 예전엔 잡는 족족 물고기를 놓아줬는데, 요즘은 먹는다. 세계적인 식량난에 가장 적합한 취미생활이라는 핑계를 대고 윤대협은 부쩍 자주 바다를 찾았다. 흐르지 않는 물은 흐르는 물과 다른 건지, 해소되지 못한 아쉬움이 천천히 쌓여 갔다. 그럼에도 갈 수 있는 곳은 바다가 유일했다.

미리 펼쳐 놓은 여분의 간이 의자는 그리 오래지 않아 채워졌다. 오늘은 못해도 네 마리쯤 잡으면 좋겠다, 하는 느슨한 목표치도 함께 세워졌다.

 

ㅤ“펭귄 봤어?”

ㅤ“아직 못 봤어. 사냥 안 나왔나 봐.”

 

ㅤ며칠 전부터 해안가에는 펭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고 까맣고 뒤뚱거렸다. 처음엔 원래 펭귄이라는 게 이렇게 작은 건가 싶어 펭귄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찾아볼 만큼 조그마했다. 다큐멘터리는 퍽 유익했던 터라, 윤대협은 그들을 볼 때마다 호기심을 내비치는 서태웅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 주곤 했다. 무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지, 제법 자주 마주친 탓에 금방 소재가 고갈되긴 했어도.

사람들은 펭귄을 좋아했다. 서태웅도 그래 보였다.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시간이 꽤 줄었다. 근래 들어 그를 여기까지 불러내는 것은, 어쩌면 저보다 그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일지도 모른다고, 애매한 질투심이 생겨나기도 했다.

윤대협은 펭귄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저 제 눈앞에 펭귄이 지나다니는 장면이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 뒤의 배경이 얼마나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지와는 별개로.

펭귄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바다가 얼었으니 그냥 걸어 온 걸까, 그런 거라면 우리도 걸어서 미국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윤대협이 펭귄을 보거나 떠올릴 때의 감상은 주로 그런 문장들이었다. 순수한 궁금증만은 아니었다.

윤대협은 한 번도 서태웅을 보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동시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서태웅이 떠나는 것과 서태웅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저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윤대협은 언제나 전자를 택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선택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윤대협은 펭귄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부럽기는 했다.

 

ㅤ“궁금하면 가보자.”

 

ㅤ말을 마친 서태웅은 곧장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추운지 목도리 속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잔뜩 움츠린 뒷모습이 망설일 시간도 주지 않고 점차 멀어져 갔다. 자리를 정리해야 했다. 잡아 놨던 물고기를 다시 좁은 구멍 속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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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조금은 무서운 건지, 조금도 무섭지 않은 건지. 무섭지 않다고 한다면 이상한 것일 텐데, 무섭다고 하기에는 걸음이 가볍게 떼어졌다. 발바닥에 붙은 아이젠이 사각거리며 멈춰버린 파도를 갈아냈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육지가 저만큼 멀었다. 역시 무섭지는 않았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나버린 서태웅의 열 번째 고백을 떠올린다. 그냥 무작정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기억은 시킨 적도 없는 일을 했다.

서태웅은 지구에 겨울이 사라질 것이라는 뉴스를 둘이 함께 앉아 보고서, 아주 먼 곳까지 생일파티를 다녀온 뒤로, 더 이상 제 마음을 윤대협에게 말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윤대협은 그게 끝일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봄, 여름, 가을이 그랬던 것과 같이, 뒤늦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 없겠구나, 하고.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드는 스스로가 윤대협은 한심하고 가여웠다.

새로운 겨울은 분명 겨울이었음에도 이전과 달랐다. 구름이 켜켜이 쌓인 하늘은 매일같이 푸른기 없이 뿌옇게 흐렸으나 눈은 드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진부한 질문에 서태웅은 늘 겨울이라는 답을 했다. 미국 프로농구가 겨울에 가장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빼놓지 않고 덧붙였다. 누구보다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겨울이 좋다고 쉽게도 말하는 게 지극히 서태웅 다워서, 윤대협은 벌써 몇 번이나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 날에도 윤대협은 물었다. 어떤 계절이 제일 좋냐고. 서태웅은 얘기했다. 겨울이라고. 평소와는 다른 이유를 댔다. 그런 서태웅을 보면서, 무슨 이유를 대든, 서태웅이 겨울 아닌 계절을 말하는 건 어색한 일이라고 윤대협은 생각했다. 꼭 윤대협이 아니라 누구라도, 하얀 눈 위에서 귀 끝이 발갛게 언 그를 봤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발간 귀 끝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서태웅은 윤대협에게 좋아한다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줬다. 윤대협은 손을 뻗어 부러 우악스럽게 그의 머리칼을 넘겨냈다. 드러난 눈에 눈을 맞추고, 알겠다는, 더 없이 비겁한 거절을 돌려주었다.

윤대협은 괜히 한 번 더 묻고 싶어졌다. 아직도 변함없이 겨울인지. 너를, 그리고 나를 이렇게 내버려둔 계절을 계속 아끼고 있는지. 혹시 그 뒤에 그때처럼 묻지 않은 대답이 따라올까 봐, 라는 다분히 불순한 동기도 좀 섞어서. 응, 알았어. 저는 또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텐데도.

 

ㅤ그림자가 짧아졌다가 반대 방향으로 길어졌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세상에 정말 종말이 찾아와서 둘 밖에 남지 않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부터 희미하게 울리는 파도소리가 더 잘 들렸다. 이 대책 없고 무모한 짓의 끝을 고하는 소리였다. 미국은 커녕 고작 반나절. 허무감이 몰려올 법도 했으나, 윤대협은 서태웅의 손을 잡았다. 앞장서서 걷는 반가움을 놓치지 않고 따라 잡으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ㅤ움직이는 바다가 있었다. 흐르는 바다가 있었고, 파아란 바다가 있었다. 홀로 있어도 소란하기 그지없던 바다도 거기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한껏 들이마셨더니 입안에서 짠 맛이 났다. 쌓였던 아쉬움이 눈처럼 녹았다.

그리고 윤대협의 옆에는 서태웅이 있었다. 그는 까만 눈동자로 확인하고 있었다. 걸어서 미국에 가지 못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그 사실이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또 다른 사실을.

겨울이 아무리 변해버렸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서태웅과 더없이 잘 어울렸으니 말이다. 그는 겨울 태생임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눈 아닌 얼음 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윤대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필 이 순간에, 잠깐 미뤄 놨던 질문을 해야만 하겠다는, 어떤 충동이 마음 속에 일었기 때문이다.

 

ㅤ“여전히 겨울인가? 좋아하는 계절.”

ㅤ고개를 끄덕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발갛게 언 코 끝이 목도리 너머로 살짝 보였다.

ㅤ“윤대협, 나랑 연애해.”

ㅤ윤대협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제법 큰 덩어리를 한 번 삼켜냈다. 두 번 째도, 세 번 째도 삼켜냈다. 그 덩어리는 삼킬 때 마다 덩치를 키워서, 열 한 번 째에는 도저히 그러질 못했다.

 

ㅤ“응, 알았어.”

ㅤ참으로 지지부진한 해피엔딩이 기어이 둘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구가 데워져서, 겨울이 사라졌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그런 결말이었다.

ㅤ비로소 윤대협은 운명이 시킨 대로, 서태웅이 제 곁에 남아있음을 기뻐하기로 했다.

勝負·初めて·恋人·四季·年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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