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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ㅤ아프다. 실로 오랫만에 드는 감상이었다. 윤대협은 부스스하게 눈을 뜨고 물 먹은 솜처럼 묵직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손끝과 발끝까지 뻗어나간 피로감과 뻑적지근한 감각에 그대로 이불 안에 파묻혀 있고 싶었으나 형체가 또렷하지 않지만 알고 있는 의무감에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을 밀어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몇 시간을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몸통을 잡아끄는 익숙한 온기에 다시금 늘어진 몸을 퍼뜨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비척비척 발을 떼어 욕실로 들어가서 겨우 세수와 양치를 했다. 욕실에서 나온 그는 벽에 걸려있는 옷걸이에서 모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깨끗하게 빤 반소매 셔츠를 입고, 짙은 네이비색 캡 모자를 쓴 뒤 습관처럼 두껍지 않고 무겁지 않은 소재의 윈드 브레이커를 집어 들어 입고 밖을 나왔다가 쌩하니 부는 한겨울의 찬 바람에 결국 집으로 다시 들어가 두툼한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아팠기에 가능한 환복이었다. 제 발로는 일 년에 몇 번 찾지도 않는 동네의 작은 내과로 갔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쓴 채로 접수처로 갔더니 간호사가 고개를 거의 천장까지 꺾어들고는 둥그렇게 뜬 눈을 하고 제 앞에 장승처럼 서있는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ㅤ'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ㅤ건조하고 깔깔한 기도를 뚫고 나온 낮게 가라앉아 반쯤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한 마디를 꺼내자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이름을 호명하는 목소리에 따라 진찰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라는 말에 느릿한 손으로 겉옷을 벗었다. 아프면 이게 좋지 않았다. 몸이 제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외투를 벗자 안에 입고 있는 흰색 반소매 셔츠를 보고는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혀를 찼다. 열이 많이 난다고 해도 감기인데 옷을 얇게 입고 있으면 안된다고 한 소리 듣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빙그레 웃는 낯으로 네, 했을테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은 윤대협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과도 비슷한 목울림 소리만 내고 말았다. 청진기로 상체 이곳저곳을 짚고, 체온을 재고, 목 안을 살펴본 의사는 이미 알고 있는 진단을 내렸다. 감기가 심하네요. 주사 맞고, 약 3일치 먹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병원에 다시 오세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나이답게 얌전하게 대답을 한 윤대협은 힘이 쭉 빠진 몸을 휘적휘적 움직이며 지시에 따랐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걸음걸이었다. 단단하고 너른, 곧게 빠진 어깨를 펴고 강건한 등을 세워 발자국이 끌리지 않는 단정한 걸음을 걷던 그는 귀와 목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거대한 몸을 앞으로 구부린채 느리게 걸었다. 약국에서 약을 받으면서, 식사를 잘 챙기고 과일도 챙겨 먹여야한다는 친절한 약사의 말에 고개만 끄덕거린 그는 다시 한참 느려진 발을 떼어 집으로 겨우 들어왔다. 적막이 짙게 가라앉아있는 건조한 집안에, 윤대협은 침대까지 가지도 못하고 현관 앞에서 거대한 몸을 늘어뜨렸다.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ㅤ윤대협이 아프다. 서태웅은 자전거 페달을 바삐 밟으면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윤대협이 아프다. 왜? 건강체질이고 쉽게 감기도 걸리지 않는다고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이때까지 길다면 긴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을 알아오면서 저는 몇 번 감기 몸살을 앓았지만 윤대협은 아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고, 밥도 가리는 것 없이 많이 잘 먹고, 잠도 많이 자는데 왜 아프지. 춥고 차가운 겨울 아침은 풍경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벼려진 차가운 공기가 주변을 가라앉혀 사물이 선명했다. 날이 선 대기 안에서 더운 숨을 내뱉는 존재를 더욱 부각시켰다. 서태웅은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느라 풀린 목도리를, 길 위에 잠깐 멈춰선채 꼼꼼히 여몄다. 귀끝이 빨개지고 목도리에 차마 가리지 못한 뺨과 콧잔등, 이마가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받아치느라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목도리를 잘 여미는 법도 윤대협이 알려주었다. 자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이미 일어난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태웅은 평소에 들고다니던 더플백 안에 늘상 챙겨다니던 소지품과 다른 것을 잔뜩 집어넣은 것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목도리 매무새를 잘 매만지고 가슴을 가로질러 맨 가방끈을 다시 정리했다. 얼른 가서 윤대협을 봐야했다.

ㅤ서태웅이 윤대협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패딩 점퍼 안주머니에 윤대협에게 받은 열쇠를 곱게 넣어왔다. 한쪽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잘 벗고 점퍼 지퍼를 열고 열쇠를 꺼내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도 손이 쨍하니 차가웠다. 차가운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이상하게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태웅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열쇠를 빼어 들고 설마하는 생각과 함께 문고리를 돌렸다. 애초부터 잠그지 않았던 모양인지 문이 단 번에 열렸다. 문도 잠그지 않고 어딜 간거지 하는 생각과 함께 몸이 들어갈만큼 문을 당기자 현관 앞에 거대하고 길쭉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ㅤ"...윤대협."

신발만 겨우 벗은 채로 뻗어있는 윤대협을 보고 놀라서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멍하니 있던 서태웅이 문을 닫고 잘 잠근 후 누워있는 윤대협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잠든 윤대협을 흔들어 깨우기보다는 몸을 부축해 일으켜 침대로 데려다 놓는 것이 더 빠르고, 더 나을거라는 판단에 윤대협의 팔 하나를 들어 제 목 뒤로 둘렀다. 힘이 빠져있는 뜨거운 몸이 낯설었다. 정신이 있을 때에 부딪혀오는 윤대협의 몸은 힘이 들지만 묵직하고 단단한데, 기운이 하나도 없이 늘어진 채 제게 전부 의지하고 있는 커다란 몸을 건사하는 것은 배로 힘들었다. 낑낑거리면서 잠든 몸을 일으키고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침대까지 발을 더듬더듬 떼어 옮기는데도 힘이 꽤 들었다. 침대 위에 열이 오른 몸을 눕힌 서태웅이 그제서야 제 가방과 겉옷을 벗었다. 어제 밤에 통화했을때만해도 이 정도로 아프다고 하지 않았는데. 서태웅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삐죽거리면서 눈썹에 힘을 주었다. 침대에 몸을 잘 눕혀주고 윤대협이 걸치고 있는 겉옷을 또 낑낑거리면서 벗겨냈다. 서태웅은 아픈 사람을 간호하거나 도와주는 법에 대해 서투른데다 저보다 큰 덩치의 사람을 다루는 요령 또한 몰랐으므로 한참을 애써야했다. 겨우 옷을 벗기자 겉옷 안에 입은 반소매 티셔츠를 보고는 또 눈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평소에 옷을 두껍게 입고 추위 안 타게 감기 조심해야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사람이 반대로 옷차림이 너무 간소하고 썰렁했다. 나중에 다 낫고나면 한 마디 꼭 해야겠다. 평소엔 윤대협이 서태웅에게 잔소리를 하는 편이니까 이번은 서태웅이 윤대협에게 잔소리를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랬다. 서태웅은 잠든 윤대협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미지근한 손으로 땀으로 살짝 젖은 이마와 벌개진 뺨을 한 번 쓰다듬고는 제 옷과 윤대협의 옷을 챙겨들었다. 항상 겉옷을 걸어두는 옷걸이에 두 벌을 걸고, 엄마와 누나에게 물어서 챙겨온 아픈 윤대협을 위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둘 참이었다.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ㅤ병원을 다녀오는 그 짧은 여정도 아픈 몸에는 꽤나 힘든 일이었는지, 윤대협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잠에서 깨면서 깨달았다. 이렇게 정신없이 아프고 잠들고를 반복할 정도로 감기몸살이 심하게 든 적이 언제였더라. 윤대협은 혼곤한 와중에도 실없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때였던가, 학교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던 지독한 유행성 독감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혼자 아파서 일주일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이렇게 아팠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나서 그 이후 키가 부쩍 자랐다. 이번에도 아프고 나서 키가 크려나. 아파서 그런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힘이 없어 소리내어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메말라 잔뜩 가라앉고 거칠어진 목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기침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찬바람을 맞아 걸린 감기때문인지 기관지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목이 붓고 따가웠다. 거친 소리로 목을 가다듬느라 쿨럭거리는 잔기침이 샜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투다다 하고 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윤대협은 마치 풀로 붙여놓은 것 같이 들러붙어있는 눈을 천천히 떴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잠시간 들었다.

ㅤ"윤대협, 괜찮아?"

ㅤ역시나. 제가 익히 아는 발소리였다.

ㅤ"...왔어?"

ㅤ오랫동안 감고 있던 차라 눈에 초점이 느릿하게 잡혔다. 제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사람은 한 명 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한 명이 누군지 알고 있기에 누군지 물을 필요도 없었고, 왜 왔냐고 할 필요는 더욱 없었다. 어젯밤 통화 중에 몸이 좀 피곤하길래 농담조로 감기라도 걸리려나 하는 말을 녀석은 가볍게 넘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가 병원을 간 사이에 집으로 몇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확신해서 실행에 옮긴 듯 했다. 서태웅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감기 옮을 수도 있는데 왜 왔냐고 말하면 '나 건강해서 괜찮아.'라고 할 것이고, 더 나무라면 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입을 다물 터였다. 그래서 윤대협은 나무라는대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좁은 공간에 감기 환자와 같이 있으면, 상대방도 감기에 옮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ㅤ"안 와도 되는데, 와줘서 고마워. 병원도 갔다왔으니까, 괜찮아."

ㅤ겨우 긴 말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몇 초 되지 않는 사이에 할 말을 몇 번에 나눠서 느릿하게 꺼내놓았다. 껄끄러운 목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본래와는 다르게 정제되지 않은 거친 쇳소리가 섞여있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말에 대답 대신 컵을 내밀었다. 내밀었다기보단 윤대협의 입술에 컵을 거의 갖다대었다. 마른 입술에 닿는 물기에 윤대협은 순간 강렬한 갈증을 느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 신호를 알아챈 서태웅이 컵을 기울여 윤대협의 입안으로 물을 천천히 밀어넣었다. 입가로 흘러 이불을 적시지 않게끔 윤대협이 컵 아랫부분을 받쳐 들었다. 시원한 물이 목으로 넘어가자 조금 살만해졌다.

ㅤ"안 괜찮아. 넌 아픈 사람이야. 누워있어."
ㅤ"하하..."

ㅤ머그컵에 거의 가득 담긴 물을 다 삼키는 것을 본 서태웅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라 거절할만한 말을 찾기도 쉽지 않아서 그저 웃고 말았다.

ㅤ"일어났으면 죽 먹어. 집에서 가져왔어."

ㅤ윤대협의 손과 제 손에 같이 붙들려있던 컵을 침대 옆 낮은 협탁에 올려놓고 서태웅이 무릎을 대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그컵을 놓는 곳을 따라 자연히 눈길이 가자 제 집에는 없는 물건이 하나 보였다.

ㅤ"가습기. 누나가 갖고 가랬어."

ㅤ물통보다 큰 가습기가 쉬익 소리를 내면서 뽀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취생활을 하는 남자 고등학생의 방에서는 볼 수 없는 기계가 낯설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윤대협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신 물 때문에 목이나 코가 덜 건조한가 싶었는데, 자는 사이에 작동시켜놓은 가습기 때문에 건조한 기관지가 그나마 습기를 머금어 저를 덜 아프게 만들었나 싶었다. 작은 배려에도 크게 감동을 받은 윤대협이 조금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 위로 푹 눕히고는 허허 웃었다.

ㅤ"감사하네. 말씀 꼭 전해드려."
ㅤ"응."

ㅤ누워있는 윤대협을 내려다 본 서태웅이 몸을 돌려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서태웅이 뚜벅뚜벅 걸어와 침대 옆에 털썩 앉는다. 남자 고등학생의 자취방에 쟁반이라는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찾지 못한 모양인지, 서태웅이 두 손에 물병과 길쭉하고 통통한 보온병을 하나 들고 있었다. 보온병 안에 숟가락 하나를 집어넣은 채로 들고는 윤대협의 앞에 내밀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걸 보니 만들자마자 담아서 제 집으로 가져온 모양이었다.

ㅤ"죽 먹어."
ㅤ"괜찮은데."
ㅤ"안돼. 먹어."

ㅤ꾸준히 단호한 말투였다. 윤대협이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ㅤ"먹어야 돼?"
ㅤ"그럼. 안 먹으면 약 못 먹어."

ㅤ누워있던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자 서태웅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머그컵 옆에 두고는 자리를 잡는 윤대협을 도와준다. 꽤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베개를 받쳐주고 잘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길이 퍽 괜찮았다.

ㅤ"고마워."

ㅤ대답 대신 작게 흥, 하고 콧숨을 내뱉은 서태웅이 다시금 윤대협에게 죽이 담긴 보온병을 내밀었다. 죽에다가 김을 조각조각 잘라 넣어 잘 섞어 놓기까지 했다. 아까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이걸 한 모양이었다. 배려 깊은 손길에 윤대협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준비하고 챙겨온 정성과 제 옆에서 간호를 해주겠다고 마음 먹고 온 결심이 고맙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서, 윤대협은 천천히 숟가락을 잡었다. 보온병에서 바로 죽을 떠먹는 모습이 서태웅의 눈에는 차지 않은 모양인지 약간 볼멘소리가 나온다.

ㅤ"그릇에 옮겨 주려고 했는데, 쟁반을 못 찾았어. 그릇은 손에 들고 먹으면 뜨거울 것 같아서..."

ㅤ종알종알 말을 놓으면서 컵에 물을 따르고 두 손에 든 채 윤대협이 숟가락을 드는 것을 한 번, 입으로 죽을 조금씩 넘기는 것을 한 번 바쁘게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이 꼭 아기고양이가 주인이 흔드는 장난감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윤대협은 결국 죽을 반쯤 먹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ㅤ"왜, 맛 없어?"
ㅤ"아니아니. 맛있어."
ㅤ"나 아플 때 먹는 거야. 계란이랑 소고기 넣은 거."

ㅤ뽀얀 쌀을 푹 퍼지게 끓인 것에 달걀을 풀어 섞고 잘게 갈아 볶은 소고기를 함께 넣어 만든 고소하고 따뜻한 죽이었다. 거기에 서태웅의 정성이 포함된 조각난 김까지, 점점이 보이는 까만색 조각들에서까지 전부 서태웅의 마음씀씀이가 절절하게 느껴져서 윤대협은 코끝이 찡해졌다.

ㅤ"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 태웅아. 어머니께 꼭 감사하다고 말씀 드려."

ㅤ윤대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은 죽을 마저 먹으라고 채근하는 통에 윤대협은 결국 꽤나 많은 양의 죽을 다 비워냈다. 사실 말로 채근하기보단 작은 입을 꾹 다물고 저를 빤히 바라보면서 먹으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말이다.

ㅤ"약도 먹어야 돼."
ㅤ"패딩 주머니 안에 약봉투 있어."

ㅤ윤대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태웅이 옷걸이로 걸어가 윤대협의 점퍼 안에 들어있던 약 봉투를 꺼내왔다.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려있는 약봉투를 빤히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ㅤ"이거, 아침밥이지."
ㅤ"음, 그렇지?"

ㅤ눈을 뜨고 먹은 첫 끼니냐고 묻는 말인것 같길래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서태웅의 시선이 도르륵 굴러서 벽에 붙어있는 시계로 향한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통상적으로 점심이라고 부르는 때였다. 아침 약을 줘야하는지, 점심 약을 줘야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이 뻔했다. 윤대협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목소리로 큭큭 웃었다.

ㅤ"아침 약 줘. 이따가 점심 약 먹으면 돼."
ㅤ"응."

ㅤ윤대협의 말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겉면에 아침이라고 적힌 봉투를 톡 뜯어낸다. 그리고 살짝 찢어서 안에 든 알약 여러개를 털어 꺼내고 윤대협의 손바닥 위로 올려준다. 제가 알아서 먹겠다고 말해도 듣지 않을 서태웅임을 알기에 윤대협은 얌전히 받아 들었다.

ㅤ"물."

ㅤ윤대협에게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내밀면서 다 마셔야한다고 또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윤대협은 조금 즐거운 기분으로 시키는대로 군말 없이 행했다. 약까지 먹은 윤대협을 본 서태웅의 얼굴에 안도와 함께 뿌듯함이 서려있었다. 뻗은 손에 빈 컵을 건네고 다 비운 보온병까지 챙겨든 서태웅이 말했다.

ㅤ"아직 자면 안돼. 과일 먹어야 돼."
ㅤ"과일까지?"
ㅤ"너 아프니까."

ㅤ자리에서 일어난 서태웅이 성큼성큼 발을 떼어 싱크대로 가 설거지거리를 내려두고 싱크대 앞에 있는 2인용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놓은, 윤대협에게도 익숙한 더플백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커다란 투명 지퍼백 안에 든 꽤 많은 양의 귤이 보였다. 저것까지 챙겨주시다니 윤대협은 대체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할지 살짝 아득해졌다. 윤대협의 침대로 돌아온 서태웅이 아까와 같이 침대 옆 바닥에 털썩 앉더니 귤을 하나 집어들고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ㅤ"내가 해도 되는데."
ㅤ"안돼. 넌 환자야."
ㅤ"네네."

ㅤ앞으로 감기 한 번만 더 걸리면 아주 병원에 입원을 시킬 기세다. 윤대협은 서태웅을 말리는 대신, 이 기회를 조금 이용해보기로 했다.

ㅤ"그럼 얌전히 있으면 돼?"
ㅤ"응.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ㅤ야무진 대답과 함께 생그러운 향이 나는 과실 조각이 입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먹을게, 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지만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었다. 윤대협이 아기새처럼 얌전히 입을 벌렸다. 살짝 차가운 귤 조각이 입술에 닿고 곧바로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입을 다물어 씹자 입안에서 상큼하고 새콤달콤한 과즙이 톡톡 터져 가득 번졌다.

ㅤ"맛있다."
ㅤ"많이 먹어. 과일도 많이 먹어야돼."

ㅤ서태웅이 귤껍질을 부지런히 까서 윤대협의 입에 모양대로 조각조각 난 귤을 한 알씩 넣어주는 것을 가만히 받아 먹었다. 아픈 것이 서럽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저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때문에 번거롭고 귀찮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겨울은 춥고 외롭고 쓸쓸하고 때로는 막막한 계절이지만 가끔 이런 소소한 이벤트가 있다면 괜찮은 계절이라는 것을, 윤대협은 입안을 메우는 주황색의 정성어린 달콤한 조각을 삼키면서 제 안에서 다시 정의했다.


ㅤ서태웅은 다정하지만 상냥하고 부드러운 간병인은 아니라서 윤대협이 아프더라도 해야하는 일에는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었다. 눈썹에 힘이 바짝 들어가 거의 직각으로 치켜올라갈 것 같은 모양을 보면서 윤대협은 욕실로 쫓겨나다시피 들어왔다.

ㅤ'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양치도 하고 푹 자야 돼.'

ㅤ한 치의 무름도 없는 말씀에 윤대협은 그래도 아까보다는 기력이 있어 받들기로 했다. 앓으면서 내내 자느라 감각하지 못했던, 식은땀으로 온 몸을 흠뻑 적시고 있어 찝찝한 몸인 것이 샤워기 밑에 서자 그제야 느껴졌다. 서태웅의 말에 옷을 느릿하게 벗으면서도 그냥 눕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제 옷을 전부 벗겨주고 샤워도 시켜줄 기세의 서태웅을 도리어 말리면서 제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머리부터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윤대협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꺾어든 고개를 따라 얼굴 위로 물이 흘러내렸다. 하루하고도 반을 꼬박 앓은 탓에 얼굴이 야윈 모양인지 본디 진하고 짙었던 이목구비의 굴곡이 더욱 뚜렷해졌다. 감은 눈 위로 뿌연 김을 뿜으면서 흩어지는 물이 깊은 눈매와 높다란 콧잔등을 따라 갈라지며 흘러내리고 곧장 단단한 목과 어깨를 따라 물길을 만들어냈다. 마른 입술 위로 뜨거운 물이 닿자 핏기가 없던 표면에 혈색이 올랐다. 굳게 다문 입매를 따라서도 물줄기가 만들어져 안으로 살짝 파인 입술 끝에 맺혀있다가 불거진 목선과 결후를 따라 쏟아지고 두드러진 어깨 근육을 따라 일자로 자리잡은 쇄골 위 깊게 패인 곳에 물이 고였다가 쏟아져내렸다. 뜨거운 물을 맞고 있자니 굳어있던 몸이 풀어지는 덕에 평소보다 샤워시간이 좀 길어졌다. 양치까지 마친 윤대협이 젖은 몸을 닦으면서 습관처럼 속옷과 하의만 입은 채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틈새로 흰 수증기가 같이 퍼져 나왔다. 달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태웅의 고개가 바짝 돌아갔다가 눈이 커다래진다.

ㅤ"윗도리."
ㅤ"입을게, 입을게."

ㅤ이크. 혼나기 싫어. 윤대협이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면서 조금 서두르는 손길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부벼 닦았다. 어느새 윤대협 앞으로 다가온 서태웅이 윤대협을 침대 위로 앉혔다. 깨끗하게 빨아 말려 접어 놓은 수건을 두는 자리를 알고 있는 서태웅이 손에 마른 수건을 하나 들고와 윤대협의 어깨에 둘러주고는 드라이어를 들었다.

ㅤ"머리도 말려주려고?"
ㅤ"응. 머리 젖은 채로 자면 감기 더 심해져."
ㅤ"아는 것도 많아라."

ㅤ윤대협의 말에 서태웅이 입을 꾹 말아물었다. 윤대협은 그저 머리를 대줄수 밖에 없었다. 꽤나 신경쓰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윤대협의 젖은 머리를 바짝 말려준 서태웅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넘겨 빗어주었다. 자잘하고 사소한 행동들이 윤대협의 몸과 마음을 자꾸 누그러뜨렸다.

ㅤ"이제 누워."

ㅤ서태웅도 윤대협의 머리를 말려주는 일에 정신이 팔린 모양인지 윗옷은 여전히 입고 있지 않은 윤대협을 침대에 눕히기 바빴다. 둘이 집안에 있을 땐 거의 윗옷을 입고 있지 않은 윤대협의 모습이 익숙해서 못 알아차리고 있는 것에 가깝기도 했다. 침대에 누운 윤대협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꾹꾹 눌러 빈틈 하나 없이 덮어준 서태웅이 누워있는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ㅤ"자."
ㅤ"아직 안 졸린데."
ㅤ"눈 감고 있으면 돼. 자야 돼."
ㅤ"그으래."

ㅤ서태웅이야 머리만 대면 곧장 자는 사람이니 잠을 많이 자서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을 터였다. 윤대협은 그저 큭큭 웃으면서 서태웅이 제게 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새겼다.

ㅤ"아, 잠깐."

ㅤ뭔가 생각난 모양인지 다시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놓은 제 더플백 쪽으로 가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집어들고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아까와 같이 침대 프레임 앞 바닥에 두 무릎을 대고 바짝 다가가 앉은 서태웅이 윤대협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ㅤ"뽀뽀 안돼. 감기 걸렸잖아."
ㅤ"멍청이. 그거 아니거든."

ㅤ윤대협이 행여나 싶어 푹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자 서태웅이 미간을 살짝 모으면서 또 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한 것에 안도함과 동시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없잖아 있었으나, 곧이어 서태웅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눈을 끔뻑거렸다.

ㅤ"뭐야?"
ㅤ"립밤."
ㅤ"립밤?"
ㅤ"감기 걸렸을때 그냥 자면 입술 다 터서 아프니까. 누나가 가져가라고 해서 갖고왔어."

ㅤ서태웅의 검지 길이만한 하얗고 얇은 원통형의 플라스틱이 낯설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립밤까지 챙겨와 발라주겠다니 대체 이걸 어째야하나 싶었다.

ㅤ"나 태웅이 아파도 이렇게 못해줬는데 어쩌지."
ㅤ"어쩌긴 뭘. 아프지마."

ㅤ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립밤의 뚜껑을 열고 하단과 몸통을 잡아 내용물을 살짝 돌려서 빼는 것이 꽤 익숙한 모양이었다. 윤대협은 얌전히 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들어서 제 입술이 잘 드러나게 맞춰주었다.

ㅤ"매운거 아니니까 괜찮아..."

ㅤ단단하고 심지 굳은 눈의 홍채 색깔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두 숨결이 맞닿아 섞일 정도로 다가온 얼굴이 잔뜩 긴장한채로 진지했다. 부드럽고 무르지만 단단한 크림 제형이 얇은 점막 위를 부드럽게 덧그렸다. 입술 위에 립밤을 발라주는 그 별 것 아닌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서태웅은 꽤나 긴장하고 결심한 모양인지 숨을 잠시 멈췄을 정도였다. 입술 위를 맨들맨들하고 매끄럽게 덮은 것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조심조심 입술을 채워 바르고, 혹여나 입술선 겉에 묻은 것이 있을까봐 새끼손가락 끝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아준 서태웅이 헥, 하고 얕게 숨을 내쉬었다.

ㅤ"이거 무슨 향이라고 하셨어?"
ㅤ"몰라. 안 매운거, 새 거 달라고 했어."
ㅤ"매운게 있는지 어떻게 알아. 발라봤어?"
ㅤ"응. 예전에 누나가 준 거."

ㅤ서태웅이 고개를 얕게 끄덕거리면서 소임을 마친 립밤의 뚜껑을 꼭 눌러 닫았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아둔 머그 컵 옆에 같이 올려놓으면서 세웠던 몸을 누그러뜨리며 바닥에 앉았다. 멘솔향이 첨가된 립밤이 맵다고 생각하는게 미용용품에는 크게 관심 없는 그 나이대 남자아이다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픈 윤대협이 멘솔향이 거슬릴까봐 굳이 말을 해서 다른 것으로 챙겨왔다는 것까지. 전부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윤대협이 말했다. 목소리가 전에 비해 좀 더 무르고 부드러웠다.

ㅤ"큰일 났다. 태웅아. 어쩌지. 정말 뽀뽀하고 싶다."
ㅤ"감기 걸려서 안된다며..."

ㅤ조그만 입술을 내밀어 삐죽인 서태웅이 윤대협을 빤히 바라보았다.

ㅤ"알지. 그런데 너 정말... 아냐, 나 얼른 나을게."

ㅤ물기 하나 없이 마른 머리카락이 이마를 반쯤 덮고 부드럽게 풀어져 흐트러져있는 것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금은 채 빗어주던 서태웅이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ㅤ"응."

ㅤ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반듯하고 단단한 이마를 매만지는 손길에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윤대협의 눈에 이미 짙고 선명한 선 위로 얇고 촘촘한 쌍꺼풀이 몇몇 겹겹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도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픈 기색이 만연한 윤대협의 얼굴을 보면서 눈매를 흐렸다. 바짝 치켜올라갔던 눈썹이 어느새 푹 주져앉았다. 삐죽 내밀었던 입술도 힘이 빠져서 꾹 다물렸다가 입끝이 초옥 쳐졌다. 윤대협이 보기 드문 장면이었으나, 의식과 무의식을 순간순간 오가고 있는 윤대협이 쉽게 알아차리긴 어려웠다. 윤대협이 내쉬는 숨이 점차 고르게 변하고 있었다. 목이 잠기는지, 코가 막히는지 짙은 숨을 살짝 몰아쉬면서 목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내는 듯한 깊은 침음성이 났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내려 손가락 등으로 윤대협의 뺨을 살살 문지르며 매만졌다. 윤대협이 제게 자주하던 손짓이었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그 마음, 그 생각 하나만 들었다. 겨울에는 제가 앓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윤대협이 아프다니 새로운 일이었다. 춥고, 매섭고, 차갑고, 길고 지루한 겨울이지만 윤대협이랑 같이 있으면 하루하루가 몹시도 빨랐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내 생일인데.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그때까지도 윤대협이 낫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평소의 서태웅이라면 하지도 않을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곧바로 머릿속에서 휘휘 지워버리고 건강해진 윤대협과 해야하는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푹 잠드는 걸 확인하고 난 이후에 저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잘 생각이었다. 아픈 사람을 두고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잠든 윤대협의 얼굴을 만지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듯한 서태웅이 윤대협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구부렸던 다리를 펴고 몸을 세우고는 침대에 파묻혀있는 커다란 몸 쪽으로 기울였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가만히 윤대협에게 몸을 덮치듯 기대고 있던 서태웅이 고개를 들었다. 발그스름한 혈색만 띠고 있던 서태웅의 아랫입술에 반들거리는 빛이 생겼다.

ㅤ"바닐라 향..."

ㅤ서태웅이 귀가 빨개진 채로 바닥으로 푹 주저앉으면서 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勝負·初めて·恋人·四季·年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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