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Let's Kiss Rescue

교녕

ㅤ12월의 거리는 이미 구석구석 크리스마스 무드였다, 할로윈이 지나기가 무섭게 일루미네이션과 트리 장식이 호박과 유령을 대신해 거리를 메웠던 터라 그런 분위기가 된 것도 한 달쯤이다. 그리고 센도로 말하자면, 기말고사까지 끝난 지금 농구부 주장인 그로서는 크리스마스나 신년보다 코앞으로 다가온 윈터컵이 먼저라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ㅤ지난 화요일에 비가 내린 후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추위라곤 좀처럼 타지 않는 센도조차 이제 운동 후에는 몸이 식지 않도록 아우터를 걸친다. 하긴 12월이니 추운 것도 당연했다, 기온이 더 떨어지면 야외 코트에서 농구하는 건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 제 이름이 등판에 써있는 져지를 집어 든 센도는 벤치 쪽으로 다가오는 루카와를 돌아보았다.
ㅤ그러고 보면 루카와는 여름에 만났을 때도 긴팔 차림이었다, 불편한 차림인 것 같아서 그 때 제 옷을 빌려줬(다가 그냥 준 셈 쳤)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이 녀석은 단풍이 들기 전부터 낮에도 아우터를 입고 왔었지, 추위를 그렇게 많이 타면서 이런 날씨에 밖에서 농구하는 건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역시 농구 귀신…이라고 생각하다가, 센도는 토요일마다 저를 찾아오는 상대와 질리지도 않고 매번 몇 시간이나 원온원을 하는 자신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고 픽 웃는다. 처음에는 그냥 한 번 어울리는 게 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약속도 하지 않고 약속처럼 매주 만나서 이럴 줄은 몰랐지. 
ㅤ겨울에는 해가 일찍 지는 걸 고려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12시에 만났는데도 어느 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센도는 땀을 닦은 수건과 빈 물통을 가방에 넣고 자리를 정리했다. 토요일마다 몇 시간이고 코트를 차지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소문이 났는지 바닷가 근처의 이 코트는 센도와 루카와 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라, 오늘도 두 사람과 찬 바람과 바닷새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ㅤ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정확히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인 쪽일까. 턱 끝까지 져지의 지퍼를 채워 올린 채로 제 쪽으로 성큼 다가오는 루카와의 얼굴을 쳐다보며 센도는 빙긋 웃는다, 저 하얀 뺨이 달아오른 건 방금까지 땀을 흘려서거나 날이 추운 탓일 테지. 예쁘장하게 잘생긴 낯은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저것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긴장해서 나온 얼굴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센도는 이제 루카와를 자주 봤다, 처음도 아니고 별 것도 아닌데 긴장까지 할 건 없지 않나 싶긴 하지만.
ㅤ발 하나쯤 거리를 두고 멈춘 루카와가 침을 꼴깍 삼키고 살풋 눈을 감는다, 그 다음에는 고개가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눈을 부릅뜨고 가까이 왔었고 두번째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들이대더니, 그래도 이제 몇 번 해봤다고 제법 ‘분위기’를 만들 줄 안다는 게 조금 기특했다. 센도가 기꺼이 고개를 살짝 어긋나게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해주자 루카와의 입술이 센도의 것에 쪽- 하고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진다, 입술끼리 닿긴 했지만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운, 뽀뽀라고 할 수준의 접촉이었다.
ㅤ목적을 이루고 지체 없이 물러난 루카와는 ‘그럼 이만.’ 이라거나 ‘다음에 보자.’ 같은 말도 없이 바로 등을 돌려 제 자전거로 척척 걸어간다, 원온원도 끝났겠다 뽀뽀도 했겠다, 볼 일이 끝났으니 집으로 가려는 것이다. 저런 태도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니 평소라면 그러려니하고 보냈겠지만, 오늘은 할 말이 있었던지라 센도는 다소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

ㅤ“루카와, 나 다음 주에는 못 나와.”
ㅤ“…?”
ㅤ“도쿄 가거든, 친척 결혼식 있어서.”
ㅤ“아….”

​​

ㅤ그냥 ‘일이 있어서’ 정도로 충분했을 텐데 이유까지 말해버렸군, 평소라면 누가 이유를 물었어도 적당히 얼버무리고 대답하지 않았을 텐데 저도 모르게 얘기를 꺼내 놓고 센도는 내심 조금 당황했다. 루카와가 처한 ‘상황’이 있어서 그런가, 어쩐지 이 녀석에게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스케줄’이라는 부분을 강조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 센도의 복잡한 심정을 알기는 하는 건지, 루카와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ㅤ“다다음 주에는 할 수 있지?”
ㅤ“그렇긴 한데, 아무튼 다음 주 토요일에는 못 만난다고.”
ㅤ“…웅.”
ㅤ“응이 아니라, 너 타임 리미트 일주일이라며.”
ㅤ“아….”

​​

ㅤ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루카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든다. 하하, 이 자식이, 위기감이 없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센도는 일부러 묻어뒀던 의구심을 새삼스레 다시 확인한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루카와가 했던 얘기는 거짓말일 거라는. 센도의 짐작은 사실은 의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확신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그런 내색은 조금도 비추지 않고 센도는 애초부터 하려던 말을 이었다.

​​

ㅤ“금요일 연습 언제 끝나?”
ㅤ“…6시.”
ㅤ“음…, 그럼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가. 나 금요일 저녁 차로 본가 갈 거니까.”
ㅤ“그럼 너…너무 늦게 출발하는 거 아닌가?”
ㅤ“어쩔 수 없지 뭐. 저-기, 아파트 보이지?”
ㅤ“응.”
ㅤ“꺾어진 쪽 맨 끝집, 111호. 저기로 와.”
ㅤ“응.”

ㅤ​

ㅤ센도가 손가락으로 자신이 사는 저 멀리의 아파트를 가리키며 일러주자 루카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로 향하더니 이번에는 휙 올라타 쌩하니 떠나기 전에 다시 뒤를 돌아보고 센도에게 고개를 숙였다. 꾸벅이라기보다는 까딱에 가까운 동작이었지만, 센도는 어쩐지 그가 좀 쑥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ㅤ금요일에 보자, 늦지 말고. 센도가 한 마디를 더 붙이자 루카와는 고개를 작게 끄덕끄덕하고는 두 발을 차례차례 페달에 올려 밟는다, 타이어에 도로가 밟히는 익숙한 소리가 사삭사각 들렸다. 센도는 루카와가 거침없이 페달을 밟아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몸이 식기 전에 빨리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져지의 지퍼를 올려 채우고 성큼성큼 집으로 발을 옮겼다.​​

ㅤ루카와하고 ‘뽀뽀’를 하게 된 건 몇 주 전부터, 원 타임 이벤트로 끝날 줄 알았던 원온원이 토요일 루틴이 되고 한 달여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 원온원 이후 한참 보지 못했던 루카와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저답지 않게 너무 반가운 얼굴을 해버린 것이 이 꼴이 된 원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때쯤 센도는 나름 겸허하게 원온원 자판기가 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ㅤ그 날도 몇 시간이나 원온원을 했고,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늘 그렇듯 센도 쪽에서 이제 그만 하자고 먼저 말을 꺼냈다. 루카와의 재미있는 점은 자기가 먼저 그만 하자는 말은 절대 안 하면서 센도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하면 깔끔하게 수긍한다는 것이다. 잠깐 숨만 좀 돌리고 정리해야겠다 생각한 센도는 잠시 벤치에 앉아 물병을 집어들었고, 루카와가 따라와 늘 그렇듯 그 옆에 앉았다.
ㅤ그런데 그 날은 상대의 열기가 바로 옆에서 훅 끼쳐오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농구공 하나 쯤은 놓을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두고 앉는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지금…너무 가깝지 않나? 의아하게 여긴 센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루카와의 입술이 쪽- 하고 제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눈을 계속 뜨고 있어서 루카와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걸 보지 못했다면 자기가 뭔가 착각한 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입술이 맞닿았다. 

​​

ㅤ“…방금 뭐….”
ㅤ“싫었어?”
ㅤ“그런 건 아닌데….”
ㅤ“그럼 됐어.”

​​

ㅤ아니, 뭐가 됐는데. 황당해진 센도가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루카와는 벌떡 일어나 뛰듯이 걸어 냉큼 자전거에 올라타더니 쌩하니 돌아가 버렸다, 붙잡을 타이밍을 놓친 센도는 자전거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순식간에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ㅤ그래봐야 뭐 뽀뽀인 걸, 딥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입술만 닿았다 떨어진 게 전부니까 대단하지 않다면 대단하지 않은 일이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면서 센도는 빠르게 상황을 합리화했다, 어차피 입술 좀 뺏긴 게 처음도 아니고…. 그래서 센도는 그 날 일을 없었던 셈 치기로 했다, 루카와가 왜 그런 일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ㅤ하지만 이유 모를 사고(?)를 너그럽게 덮어주기로 한 센도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루카와는 그 다음 주에도 대뜸 도둑 뽀뽀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고 있었던 센도가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막자, 센도의 손에 입술이 막힌 채 눈을 치뜨고는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적반하장이었다.

ㅤ“왜.”
ㅤ“왜…는 내가 해야 할 질문 같은데.”
ㅤ“안 싫다며.”
ㅤ“싫지 않은 정도로 될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

ㅤ웃는 얼굴을 한 채로 거리를 벌리고 서자 루카와의 미간이 꾸욱 찌푸려졌다, 골이 난 것 같기도 하고 곤란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고나 동의도 없이 곧장 입술을 들이댄 건 루카와인데도, 그의 얼굴만 보자면 부당한 요구를 한 쪽이 자신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한 번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덮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낭패라는 기분이 조금 들었다.

​​

ㅤ“왜 하고 싶은 건데, 이게.”
ㅤ“…….”
ㅤ“딱히 이유는 없고, 그냥?”

​​

ㅤ상대가 긍정할 경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마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냐- 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루카와라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워낙에 엉뚱한 녀석이니까. 하지만 입술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워줬는데도 루카와는 말이 없었다. 
ㅤ설마? 혹시? 아니겠지. 이유를 묻지 말고 그냥 이런 건 곤란하다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게 나았을까, 지금이라도 적당히 얼버무릴까? 센도가 갈등하고 있을 때, 겨우 루카와가 입을 열었다.

​​

ㅤ“…믿기 힘들 수도 있는데….”
ㅤ“아, 이유가 있어?”

​​

ㅤ자신이 먼저 묻긴 했지만 정말 이유가 있었다니, 기대를 해야 할지 실망을 해야 할지 애매한 기분으로 센도는 되물었다. 루카와는 운을 떼고도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고 센도는 그게 무척이나 의외였다, 이 녀석이라면 설령 좋아해서 그랬대도 ‘좋아서 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냐.’ 고 뻔뻔하게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입을 열었다 닫기를 두어 차례 더 한 끝에, 루카와는 믿기 힘들면 안 믿어도 된다는 말을 앞에 달고 이유를 털어놓았다. 

ㅤ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에 따르면, 지난 주 금요일 밤 꿈에 새까만 바탕에 샛노란 색으로 이-런요런(이 말을 하면서 루카와는 허공에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검은 가면을 쓴 머리 긴 사람이 나왔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루카와 때문에 자기가 공들여 만든 집이 망가졌으니 벌을 내리겠다고 말했단다. 다만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 네가 좋아하는 동물로 골랐다며, 오늘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누군가와 입을 맞추지 않으면 너는 고양이가 될 거라는 저주를 했다는 것이다. 
ㅤ루카와는 깊이 잠드는 타입이라 꿈을 별로 꾼 적도 없고, 혹시 꿈을 꿨더라도 일어나서 세수하는 동안 곧장 잊어버린다고 했다. 그런데 그 꿈은 이상할 정도로 생생했고, 아침 나절 내내 꿈에서 만난 사람의 목소리가 계속 생각나서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단다. 그런 채로 원온원을 하러 와서 한창 농구를 하는 동안은 잊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가 되니 그 목소리가 또 생각나버렸고, 고양이가 되면 농구를 할 수 없으니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 가까이 있던 센도에게 입을 맞춘 거라고 했다. 입만 마주댄 것 뿐이었지만 그것도 유효했는지 고양이로 변하는 일은 없었고, 그래서 오늘도 돌아가기 전에 입을 맞추고 갈 작정이었다는 게 루카와가 털어놓은 사건의 전말이었다.
ㅤ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센도는 할 말을 잃었다,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누군가와 내기를 했다던가 벌칙 게임이었다던가 하는 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으면 무슨 농담을 이렇게 어이 없고 재미 없게 하나 생각했겠지만, 상대가 루카와였다. 도통 거짓말을 못할 것 같은 타입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류의 농담이나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굳이 지어내면서 변명으로 갖다 붙일 녀석도 아니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상세하게 묘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상상력이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도 않다.

ㅤ“…너도 싫지 않았으니까, 괜찮지 않나?”

ㅤ싫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딱 잘라 안 된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뻔뻔한 대사와 다르게 루카와의 어조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루카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상당한 곤경에 처한 것이고, 루카와의 말이 거짓이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해야 할만한 사정이 있다는 얘기다. 센도는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하다면 못 도와줄 것도 없지.

ㅤ“일주일에 한 번이지?”
ㅤ“…응.”
ㅤ“알았어.”

ㅤ센도의 승낙에 루카와는 꽤나 안심한 듯한 얼굴을 했고, 이런 합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매주 하는 원온원의 마지막 루틴으로 뽀뽀가 추가되었다. 뽀뽀를 승낙하며 센도가 내심으로 했던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뽀뽀 좀 했다고 서로 거북해지거나 분위기가 묘해지는 일은 없었다. 루카와는 여전히 농구에만 몰두했고 원온원이 끝나면 입만 쪽 맞추고는 재깍 돌아갔으며 토요일 한나절 말고는 센도의 생활에 끼어드는 일이라곤 없었고, 묻는 말에는 곧잘 대답했지만 먼저 제 얘기를 하거나 센도에게 농구 외의 것에 대해 물어 보지는 않았다.
ㅤ의식하고 하는 일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루카와가 선을 넘지 않는다는 걸 센도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겨우 뽀뽀 정도로 루카와가 어색해하면서 발길을 끊었다면 아쉬웠을 테고, 뽀뽀 좀 했다고 자신과 사실 이상으로 가까워졌다고 오해했다면 불편해졌을 테니까. 제 쪽에서 먼저 하자고 한 건 아니었어도, 이제 매주 루카와가 찾아오는 것을 센도 역시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ㅤ센도는 농구를 정말 좋아하고 훈련이나 연습도 질려하지 않는 성격에 시합도 즐기지만, 아무튼 훈련은 훈련이고 연습은 연습이고 시합은 시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카와 카에데와 하는 원온원은 센도에게 ‘놀이’였다, 이 녀석과 맞붙는 것이 훈련이고 연습이고 동시에 시합인데도 그랬다. 루카와는 무척 재미있는 상대였다, 코트 밖에서의 인상은 재미있는 녀석이라기보다는 웃기는 녀석에 가깝긴 하지만, 아무튼 매번 즐겁지 않았더라면 센도의 성격에 매주 그와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ㅤ아마도 센도가 원온원 말고 다른 것도 루카와에게 제안해 본 건 그래서일 터다, 부담 없지만 가볍지 않고 친밀하지만 무겁지 않게 느껴지는 상대여서. 낚시를 가자거나 신발을 사러 같이 가자거나 하는, 센도로서는 거절당해도 별 상관 없는 사소한 권유에 루카와는 의외로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쭐래쭐래 따라와 놓고서, 재미가 없으면 안 그런 척 꾸미지는 않는 게 또 웃겼다. 
ㅤ센도가 권하는 대로 낚시에 따라 나선 루카와는 센도의 옆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다가 이내 앉은 채로 잠들었고, 센도가 돌아가자고 깨울 때까지 내리 몇 시간을 잤다. 농구화를 사러 갔을 때는 센도가 뭘 집을 때마다 옆에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별로라며 종알종알 참견했고, 그런 주제에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는 또 앉기가 무섭게 잠들었던 탓에 센도는 꼼짝없이 어깨를 빌려줘야 했다. 먼저 내려서 집에 갔어도 되었을 것을 굳이 센도의 집이 있는 역에서 내려서 자전거로 돌아갔는데, 집에 돌아 와서 져지를 벗고 보니 루카와가 침까지 흘리면서 잔 탓에 어깨에 동그랗게 침 자국이 남아있어서 센도는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었다.
ㅤ루카와 카에데와 같이 있는 건 즐거웠다, 딱히 우스운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세상 예민하게 생겨서 의외로 덤덤하고 무던해서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 것도 재미있었고,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와 달리 사실은 제법 헐랭한 것이며 무뚝뚝한 얼굴로 은근히 말이 많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코멘트를 붙이는 것도 웃겼다.
ㅤ무엇보다도 코트 안에 발을 들이고 농구공을 잡으면 눈빛이 형형해지는 것이 제일 흥미로웠다, 마치 이제야 전원이 켜진 것처럼 불타오르고 날이 선다. 그 에너지가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순간의 희열 때문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원온원을 요구하는 루카와에게 매번 응해준 거겠지.
ㅤ아직 대진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윈터컵에서도 한 번은 쇼호쿠와 만나게 되겠지, 양쪽 모두 선수진이 꽤 변경된 터라 저번과는 또 상황이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저는 루카와를, 루카와는 저를 전보다 더욱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센도는 저절로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될 만큼 기대가 됐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라고 센도는 생각했다, 그 원인이 루카와라는 것 또한 아주 즐거웠다. 

*

ㅤ아무튼, 루카와는 진짜 재미있다니까. 칸칸이 나눠진 뷔페 접시에 음식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와중에, 문득 녀석을 떠올리고 센도는 또 피식 웃고 말았다. 오전부터 멀끔하게 입고 예식장에 끌려와서는 내내 축의금 부스에 앉아 있었던 터라 다른 친척들보다 식사가 늦어졌지만, 덕분에 한 차례 피크가 지난 터라 사람은 빠지고 음식은 새로 채워져 있어 오히려 좋다. 
ㅤ예식장을 여러 곳 둘러보고 음식이 제일 맛있는 곳을 골랐다더니, 멜론 프로슈토 같은 것도 있고 메뉴도 다양한데다 전부 제법 맛이 좋았다. 루카와는 멜론 좋아하려나, 가만 보면 딱히 가리는 건 없이 잘 먹지만 호불호는 확실한 것 같던데. 센도는 좋아하는 걸 먹을 때는 루카와의 미간이 느슨해지는 게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새우 튀김이라던가 달달한 계란말이 같은 거.
ㅤ토요일에 못 만난다고 할 게 아니라 이번 주는 도쿄에 가니까 너도 오라고 할 걸 그랬나, 센도는 뒤늦게 후회했다. 축의금 부스에서 몇 시간을 봉사했으니 제 몫에 더해서 식권 한 장 정도는 또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루카와에게 맛있는 것도 먹이고 그 애를 핑계로 일찍 카나가와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터다. 
ㅤ루카와는 어제 센도가 말한 대로 저녁에 센도의 집으로 왔다, 늦을 까봐 걱정이 되어 연습 후에 씻자 마자 바로 달려온 건지 평소에는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이 파삭파삭 얼어있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센도는 걱정 어린 타박과 함께 그 애를 집에 들여서 뜨끈뜨끈한 드라이어 바람에 머리를 말려줬다. 찬 바람에 얼었다가 따뜻하게 녹아서 그런지 얼굴이 평소보다 발긋해진 루카와에게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머리를 헝크러뜨리자, 루카와는 사납게 눈을 치떴지만 그만 하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ㅤ어차피 나가야 하니 역으로 가는 겸 루카와를 배웅 해줬는데, 평소와 달리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고 왔길래 의아하게 쳐다봤더니 이런 자전거가 아니면 학교에서 자전거 통학 금지라고 했다. 루카와는 제 자전거의 앞바구니에 센도의 짐을 실어줬고, 센도는 자전거를 끄는 그 애와 나란히 걸어 역까지 갔다.
ㅤ조심히 가고 다음 주에 봐, 역으로 들어가기 전 골목 끝에서 센도가 인사하자 루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추위를 많이 타는 탓인지 잠깐 걸어온 것만으로도 귀가 붉게 얼었는데 지퍼는 끝까지 채웠어도 목도리도 귀도리도 없는 게 좀 안쓰러웠다.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인사를 남긴 루카와는 금방 등을 보이고 빠르게 멀어졌다, 날이 추워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건지 평소보다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 그나저나 다음 주에도 토요일에 만나면 일주일을 넘기는 건데 그걸 눈치는 채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가, 아마 아무 생각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센도는 또 피식 웃음을 흘렸었다.

ㅤ“참, 나 어제 ‘렛츠키레レッツキレ’ 못 봤는데, 두 사람 못 만났다며?”
ㅤ“아, 그래그래, 일주일 지났잖아. 자정 넘기기 전에 키스했어야 했는데, 엇갈려서-.”
ㅤ“응응,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고양이로 변하고 끝났어! 삼색 고양이던데 너무 귀엽더라.”
ㅤ“맞아, 엄청 귀여웠어. 어디서 그렇게 닮은 애를 데려왔나 몰라.”

ㅤ음식을 쌓아온 접시 두 개를 빠르게 해치우고 2차로 한 바퀴 돌려고 다시 일어났는데, 옆 테이블의 하객 서너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갑자기 귀에 꽂혔다. 키스, 일주일, 고양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인데. 센도는 음식을 가지러 가려던 발을 멈추고 다시 슬그머니 테이블에 앉아 낯선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어느 부분이 좋았고 어디는 설렜고 거기는 웃겼다며 계속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으로 파악하자니 ‘렛츠키레レッツキレ’는 드라마 제목이었다, 그리고 ‘매주 누군가와 키스를 하지 않으면 고양이가 되어버리는 저주에 걸렸다’는 드라마의 얼개가 놀랍도록 루카와의 이야기와 비슷했다. 


ㅤ식욕이 뚝 끊겼다, 식사고 뭐고 더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원래는 내일 카나가와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센도는 예식장에서 바로 카나가와로 가겠다고 했다, 아는 사람들 틈에서 웃는 얼굴로 대화에 섞이는 게 갑자기 지나치게 피곤해진 탓이었다. 다운 점퍼를 입고 본가로 왔다가 코트 차림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본가에 들렀다 가기조차 귀찮아 바로 역으로 향했다. 점퍼가 필요하면 다음 주에 다시 본가에 오면 될 일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있던 예정이 곧 없어질 지도 모르니까.
ㅤ워낙 허황된 얘기였으니 센도 역시 루카와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설마 정말 루카와가 고양이로 변할까봐 걱정이 돼서 매주 입을 맞춰줬을까. 그럼에도 따지고 들거나 캐묻지 않았던 건 거짓말을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루카와의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루카와를 믿은 셈이다. 그런데 그 동화 같아서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싶었던 핑계가 그냥 드라마 얘기를 적당히 끌어와 둘러댄 거였다니, 루카와에게 완전히 놀림 당한 기분이었다.
ㅤ사람과 부대끼는 게 싫어 그린차グリーン車 티켓을 추가로 결제한 센도는 옆에 있던 키오스크에서 난생 처음으로 TV매거진을 샀다, 표지에 남녀 주인공의 사진과 함께 ‘렛츠키레レッツキレ’라는 로고가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렛츠키레가 ‘렛츠·키스·레스큐’의 줄임말이라는 걸 센도는 잡지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드라마는 다음 주에 방영 5주차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ㅤ순서가 이상했다, 루카와가 센도에게 처음 입술을 들이댄 것보다 두 주 늦게, 그리고 ‘저주’에 대해 말한 것보다는 한 주 늦게 첫 방송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 루카와가 드라마를 보고 적당히 핑계를 대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는 아직 첫 방송도 나오기 전이었으니까. 하긴…루카와 카에데가 그런 걸 볼 녀석인가? 드라마는 고사하고 TV 자체를 안 보는 것 같은데. 게다가 드라마의 방영 시간은 10시, 루카와는 보통 9시면 잠자리에 들고 혼자 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온 날에도 그 시간에는 침대에 눕는다는 녀석이다.
ㅤ그럼 드라마를 보고 둘러댄게 아닌가? 하지만 내용이 이렇게까지 겹치는데 이게 우연일 수 있나? 당장 루카와를 찾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지만 자기 집까지 알려준 것과 반대로 센도는 루카와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학교야 알고 있지만 토요일 저녁 시간에 거기 있지는 않을 테고. 먼저 찾아오는 건 늘 루카와 쪽이었고, 코트 밖에서 만날 때는 미리 약속을 했던 터라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ㅤ아니다, 지금 루카와를 만나면 좋은 말은 안 나올 거 같으니까 차라리 이게 다행인 건지도 모른다. 센도는 한숨을 쉬며 잡지를 덮었다, 그리고 루카와가 어떻게 나오는지 주말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당장 월요일에 쇼호쿠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료난도 연습이 있다, 곧 윈터컵인데 주장인 자신이 땡땡이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카와하고 입을 맞춘 건 어제, 그러니 늘 그렇듯 토요일에 만난다면 루카와가 말한 타임 리미트인 일주일이 지나게 된다. 그것 때문에 이번 주에도 일부러 금요일에 만난 거였으니, 아무리 루카와가 둔하고 별 생각이 없다 한들 다음 주 금요일이면 제 거짓말이 들켰다는 걸 깨닫겠지.
ㅤ입을 맞추는 것 정도야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단순한 일 때문에 갑자기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느낌이었다. 상대가 녀석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터무니없는 부탁에 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응했다고 한들 이쯤에서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다시 보지 않기를 택했을 텐데. 아니면 거짓말이든 뭐든 아예 신경쓰지 않고 하던 대로 계속 했겠지, 별 일이 아니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나.
ㅤ그러니까…루카와는 별 일인 거군, 한 발 늦게 요점을 알아차린 센도는 헛웃음을 흘렸다. 입맞춤이나 거짓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상대가 루카와라는 게 이렇게 머리가 복잡한 이유였다. 처음에는 혹시 그렇다는 대답이라도 할까봐 나를 좋아하는 거냐고는 묻지도 않으려고 했던 주제에 지금은 전혀 다른 마음이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자각도 있고 스스로도 어이없지만 그렇게 됐다. 루카와가 저를 속인 이유가 자신을 좋아해서인 게 아니라면 아마도, 저는 아주 많이 실망하게 될 것 같았다.

*

ㅤ기말고사 성적이 잘 나왔고 윈터컵 대비도 순조로웠지만 한 주 내내 센도의 기분은 괜찮았다가도 금세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원인은 당연히 루카와 카에데였다. 자신이 이렇게나 심란해하는 이유를 센도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이 루카와를 기다리는 건지 그와 만나는 걸 미루는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루카와를 만나면 어떻게 할 건지도 결정 못 했고 어쩌고 싶은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로 한 주가 흘렀다.
ㅤ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금요일 연습을 마치자마자 돌아와서 집에서 내내 기다렸지만 루카와는 센도를 찾아오지 않았다, 루카와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늦게까지 깨어 있었던 센도는 ‘렛츠 키레’도 봤다. 이번 화에서는 상대역이 고양이가 되어버린 주인공을 데려가 정성껏 돌봐주고 뭔가 방법을 찾아보자고 달래줬다-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른 고양이를 착각하고 데려간 거였다. 진짜 주인공은 추운 밤거리를 혼자 헤매다가 겨우 자기 집을 찾아서 집 안에도 못 들어가고 베란다에서 떨면서 잠들어 있었다. 센도는 드라마의 난데없는 전개에 어이없어하다가, 혹시 루카와도 고양이가 돼서 저렇게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어서 밤잠을 설쳤다.
ㅤ덕분에 늦잠이라도 자서 오후에 일어났으면 그 핑계로 코트에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 동안의 습관 탓인지 몰라도 10시에 눈이 떠졌다, 그래도 여섯 시간은 잤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은 센도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제 말대로면 이제 고양이로 변했어야 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까, 오늘 나오긴 하려나, 거짓말인 걸 들켰다고 생각해서 다시 안 나오면 어쩌지? …그럼 찾아가 봐야지, 그동안 우리가 한 게 뭐든 이렇게 흐지부지 끝낼 수는 없으니까.
ㅤ그래, 나는…아무튼 끝내고 싶지는 않은 거군. 센도는 집을 나서기 직전에야 결론을 내렸다- 아니다, 결심을 했다는 게 옳겠다. 오늘은 루카와가 있다 해도 원온원을 해줄 생각이 없어 청바지에 맨투맨, 그리고 어제 입고 돌아온 코트와 목도리를 걸쳤다. 농구공이나 수건이나 물병은 챙기지도 않고 지갑만 주머니에 넣은 센도는 평소와 다르게 미적대는 걸음으로 코트로 향했다, 여전히 루카와를 보고 싶은 건지 이 만남을 미루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ㅤ그 덕에 여느 때보다 40분은 늦게 도착했는데 의외로 코트는 비어있었다, 루카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센도보다 늦게 나온 적이 없었는데. 설마 거짓말을 들킨 걸 알고 이제 안 올 생각인가? 실망감과 당혹감이 치미는 것을 억누르며 코트 끝의 벤치로 발을 옮기는데, 볕이 곱게 든 벤치 끄트머리에 웬 까만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는 게 보였다.


ㅤ아니, 그럴 리 없지. 그렇긴 한데…루카와는 없는데 고양이가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잖아. 

ㅤ“……루카와?”

ㅤ고양이의 귀가 움찔한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센도는 벤치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길고양이라면 달아날 테고 루카와가 맞으면 가만히 있겠지, 아니, 그런 걸로 판단하는 게 말이 되나. 센도가 바로 앞까지 갔는데도 고양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귀가 파닥이더니 고양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깜빡깜빡하고 하품을 크게 한 뒤 몸을 일으킨 고양이는 앞뒤로 몸을 쭉쭉 늘려가며 스트레치를 하더니 센도의 손에 머리를 푹 묻으며 뺨을 비볐다, 이쯤 되자 센도는 이 고양이가 정말 루카와가 맞는 건지 진짜 헷갈리기 시작했다.

ㅤ“고양이가…너 좋아하네.”

ㅤ…그럼 그렇지, 저주는 무슨. 
ㅤ어깨 너머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져 성대하게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루카와 카에데가 멀쩡한 사람의 모습으로 서있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을 물리고 센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별나게 사람을 잘 따르던 고양이는 애앵- 하고 느른한 소리를 내고는 이내 우아하게 벤치에서 뛰어내려 통통대는 걸음으로 금세 멀어졌다. 

ㅤ“늦었네.”
ㅤ“…응.”

ㅤ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가 늦었지- 라던가 고양이로 안 변했네? 같은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루카와가 이렇게 늦게 나온 게 실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서다, 나름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나온 거라는 게 짐작이 돼서다. 오늘은 원온원을 해주지 않을 걸 예상했는지 루카와 역시 농구공을 가져오지 않았다, 수건이나 물통을 넣어다니는 가방도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 핸들을 쥔 루카와의 손은 장갑도 끼지 않아서 발갛게 곱아있었고, 귀도 코도 볼도 발개져서 보고 있기만 해도 제 몸이 다 시리는 것 같았다.
ㅤ추위도 많이 타는 녀석이 왜 이렇게 가볍게 입고 나온 거야, 윈터컵이 금방인데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센도는 우선 제 목에 대충 걸치고 있던 목도리를 휙 풀어서 루카와의 목에 사뿐히 감았다, 루카와는 좀 놀란 듯 했지만 센도의 손을 피하지 않고 그가 긴 목도리를 목이며 턱끝까지 둘러주는 걸 얌전히 받고 있었다. 이대로 뺨을 쓰다듬으면 아까 그 고양이처럼 제 손에 뺨을 부벼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건 꽤 괜찮을지도…하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고 있는 자신에게 센도는 스스로 좀 놀랐다.

ㅤ“…너 나 좋아해?”

ㅤ센도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고 대신 다른 말을 골랐다, 확실히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너도 다 믿은 건 아니지 않냐고 되받았으면 사실 할 말은 없었을 텐데, 루카와는 그렇게 탓하거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센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싫지 않았으니까 괜찮지 않냐고 물었을 때처럼 퍽이나 조심스러운 루카와의 얼굴은 센도의 물음에 솔직하게 답해도 될지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부정하지 않는 것 자체로 이미 대답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도 했다. 
ㅤ답답하거나 속이 상해서가 아니라 루카와가 저를 좋아하는 게 맞다는 것이 다행스러워서 센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이야 했던 일이긴 했지만 확신까지는 없었던지라 확인하고 나니 이제 마음이 놓였다. 

ㅤ“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왜 저주에 걸렸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어?”
ㅤ“……네가, 듣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ㅤ“내가? 뭘?”
ㅤ“…너 좋아한다는 거.”
ㅤ“…….”
ㅤ“좋아하냐고는 절대 안 묻길래, 그 말은 듣기 싫은가 보다 했지.”

ㅤ루카와는 의외로…예리한 구석이 있다, 무심한 성격이니 타인의 감정이나 인간관계에는 서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 제 반응을 살피고 속마음을 눈치챘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제가 듣기 싫어하는 고백을 피하려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별 수 없이 황당한 얘기를 끌어온 거였다니. 그걸 ‘배려’로 여기고 마냥 고마워하기엔, 제 눈밖에 날까봐 제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을 루카와의 심정을 알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ㅤ“싫은 건 아니었는데….”
ㅤ“…싫지 않은 정도로 될 문제는 아니라며.”

ㅤ루카와는 의외로…기억력이 좋다, 어설픈 해명이 자기가 했던 말로 바로 반박 당하자 센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 때는 자신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그 날 루카와가 고백했더라면 자신은 좋은 말로 거절한 후 원온원도 그만하자고 했을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루카와는…좋은 플레이를 한 셈이다, 그럴 의도나 계산은 전혀 없었던 것 같지만.

ㅤ“…싫지 않은 정도로 누가, 매주 입도 맞추고 데이트도 하겠어.”
ㅤ“데이트…?”
ㅤ“너 나랑 낚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저녁도 같이 먹었잖아.”
ㅤ“그건…그런데….”

ㅤ루카와에게 들어야 할 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말도 있다, 루카와는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였어도 자신은 아직 인정한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센도는 좀 뻔뻔하게 나가보기로 한다, 덥석 먼저 말하는 게 아니라 루카와가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서다. 아니,  좀 파렴치한 일이지만 루카와가 나를 좋아하냐고 묻는 것도 듣고 싶어서라는 쪽이 옳을까.

ㅤ“나 아무나 집에 안 데려가.”
ㅤ“…….”
ㅤ“머리 말려준 거 네가 처음이야.”
ㅤ“…응.”
ㅤ“목도리 해준 것도 네가 처음이고.”
ㅤ“…알았어.”

ㅤ너도 나를 좋아하는 거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말한 적도 없는 답을 들은 것처럼 루카와는 그냥 알겠다고 그런다, 슬쩍 눈을 내리 까는 루카와의 귀와 뺨은 여전히 붉었지만 지금은 추워서 그런 게 아니라 열이 올라버린 탓인 듯했다. 결국 나를 좋아하냐고 묻는 건 듣지도 못했고 너를 좋아하는 게 맞다고 말하지도 못했는데,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은 못했어도 들을 말은 다 들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건 맞긴 하지.

ㅤ“가자.”
ㅤ“어딜….”
ㅤ“춥잖아, 집에 들어가자. 피자 시켜줄게.”
ㅤ“피자….”
ㅤ“피자 별로야? 다른 거 먹을래?”
ㅤ“아니, 좋아.”

ㅤ어찌 됐든 이 날씨에 루카와를 밖에 세워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센도는 거의 뺏듯이 루카와의 자전거 핸들을 대신 잡으며 고갯짓을 했다, 순순히 자전거를 내어준 루카와가 센도의 옆으로 따라 붙는다. 루카와가 자유로워진 두 손을 얼른 점퍼 주머니에 넣은 걸 보고 센도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라고 핸들을 잡아챈 거였으니까.

ㅤ“드라마 내용은, 방송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ㅤ“…그 드라마, 우리 누나가 쓴 거야.”
ㅤ“아…?”
ㅤ“누나가 작가라고. …나한테 먼저 내용 말해줬어.”

ㅤ과연…, 그래서 방송되기 전에 내용을 알고 있었던 거였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시간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꿈 얘기를 할 때 이상할 정도로 묘사가 자세하다 했더니 누나가 제게 한 표현을 그대로 옮긴 모양이었다. 그 별 것 아닌 이야기에, 일주일 내내 기분이 엉망이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자꾸 웃음이 났다. 이렇게 심란해할 일은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며칠 동안 계속 싱숭생숭했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자꾸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간다.

ㅤ“루카와, 집에 가면 말이야.”
ㅤ“…응? 응.”
ㅤ“키스부터 할 거야.”
ㅤ“…….”
ㅤ“저주 안 걸렸어도, 해도 되는 거 맞지?”

ㅤ지금까지 너랑 한 건 뽀뽀였고, 뽀뽀랑 키스가 많이 다르다는 건 해보면 알 테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만약 루카와가 뭐라고 하면 그래서 싫었냐고, 싫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센도의 당당한 선언에 당황한 듯 벌어진 루카와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포옥 퍼진다, 목도리를 둘러 싸둔 터라 이제 얼굴은 시렵지도 않을 텐데 뺨과 귀는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은 기운이 번졌다. 

ㅤ“나는 원래…도, 저주 같은거 없이…그냥 했는데.”
ㅤ“아…, 하하- 그렇네.”

ㅤ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다문 루카와는 센도가 단단히 둘러준 목도리를 끌어올렸다, 작은 얼굴의 반이 목도리에 파묻혀 눈 위로만 겨우 보일 정도가 됐다. 부끄러워진 건지 루카와의 걸음이 성큼성큼 빨라지는데, 그렇게 빨리 우리 집에 가고 싶냐고 놀리려다가 그러면 도망이라도 칠 것 같아 센도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ㅤ아무래도 안 되겠다, 뽀뽀가 아닌 키스를 하고 나면 루카와가 묻지 않더라도 내가 해줘야 할 말은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센도는 뛰듯이 앞장서는 루카와를 따라 나는 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조금도 버겁지 않고 발이 가볍기만 한 게 그 동안의 혹독한 훈련 때문만은 아닌 건 분명했다.

勝負·初めて·恋人·四季·年末

bottom of page